[[분류:북한 대외경제상]] [[분류:북한 상업상]] [[분류: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 부위원장]] [[분류:조선로동당 간부부장]] [[분류:조선로동당 1기 중앙검열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2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조선로동당 3기 중앙위원회 위원]] [[분류: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1912년 출생]] [목차] == 개요 == 독립운동가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 생애 == 김중생의 책에 따르면 [[191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소련]] 외교문서에는 [[1912년]]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본 문서에서는 소련 외교문서의 기록을 따르도록 하겠다. 초급교육을 받고 노동자로 일했으며 동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소련]]으로 가서 모스크바 동방대학 조선반에서 20여명의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여정의 수기에 따르면 [[1938년]] 방호산, 림해, 박훈일, 리임, 전우, 장복, 김창덕과 함께 [[코민테른]]의 지시로 옌안에 파견되었다. [[주덕해]] 평전에도 내용은 같은데 다만 [[1939년]] 3월로 시기가 나온다. 주덕해 평전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거쳐서 중소 국경인 [[신강성]] 일리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연안에서 항일연군 4군 군장 이연록이 이끄는 연안군정대학 동북반에 편입되었으며 조선독립동맹과 무관하게 [[중국인]]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1942년]] 초 옌안의 해외연구반에서 주덕해, 이천부, 리권무, 장복 등과 함께 조선조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1945년]] [[조선의용군]] 대원들과 함께 1차로 입북했다. 이후 [[조선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는데, 정작 6월에 개최된 신민당 1차 당대회의 중앙집행위원 명단에는 빠져 있다. [[1946년]] 8월, 1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열위원회 부위원장, 검열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는 대표자격심사 결과를 발표하였으며,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리상조]]의 후임으로 간부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49년]] [[7월 21일]] 중앙조직위원회 3차 회의에서 [[남한]]의 노동당원들에게 당증을 수여하기 위한 당증수여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자 리승엽, 조영, 차영락과 함께 심사위원이 되었다. [[1950년]] [[2월 15일]], 중앙조직위원회 23차 회의 결정에 따라 내각 고급지도간부학교 개설에 참여했다. [[1952년]] 8월 우방국 순회를 다녀왔다. 1952년 12월 전원회의에서 간부부장에서 해임되었다. 서동만은 진반수가 [[남로당]] 숙청에도 관여했다고 판단한다. [[1953년]] [[4월 23일]], 상업성에서 무역성이 분리되어 나오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초대 무역상에 임명되었다. [[1953년]] [[7월 29일]], [[6.25 전쟁]] 종전 기념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6년]] 3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56년]] [[9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무역성과 상업성이 대내외상업성으로 통합되면서 초대 대내외상업상으로 유임되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대내외상업상에 유임되었다. [[1957년]] [[인도]], [[인도네시아]], [[미얀마]]에 북한 대표단장으로 방문, 각종 무역협정을 체결한 후 귀국했다. 1957년 10월에는 정부의 지시를 받아 [[개성시]]를 개방하여 남북한 교역을 실시하자는 제안을 남한에 보내기도 했다. 이는 공개제안이었기 때문에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 당대 남한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또한 [[일본]] 측에 남포항을 개방할테니 공식 무역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1958년]] 6월 전원회의에 출석하여 무역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기영, 리송운,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 최철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9월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대내외상업상이 상업성과 무역성으로 분리됨에 따라 [[1958년]] [[9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대내외상업상에서 해임되어 상업상에 임명되었다. 무역상에는 [[림해]]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1년이 채 되지 않아 [[1959년]] [[5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당중앙위원회 상업계획재정부장 [[정두환(북한)|정두환]]에게 상업상 자리를 물려주고 해임되었다. 여정은 그를 [[숙청]]된 인물로 보고 있으며 이후 특정 직무도 받지 못하고 [[실종]]되었고 [[애국렬사릉]]이나 조선대백과사전 등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봐선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 경력 == ||<#FF0000> {{{#ffffff '''임기시작'''}}} ||<#FF0000> {{{#ffffff '''임기종료'''}}} ||<#FF0000> {{{#ffffff '''비고'''}}} || ||<-3>'''북조선로동당 중앙검열위원회 부위원장''' || || 1946년 8월 31일 || 1948년 3월 30일 ||북로당 1기 1중전회에서 선출[br]북로당 2차 당대회에서 임기만료 || ||<-3>'''북조선로동당 간부부장''' || || 1948년 3월 31일 || 1952년 12월 18일 ||북로당 2기 1중전회에서 임명[br]1952년 12월 전원회의에서 해임 || ||<-3>'''내각 무역상''' || || 1953년 4월 23일 || 1956년 9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무역성 설치[br]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대내외상업성으로 통합 || ||<-3>'''내각 대내외상업상''' || || 1956년 9월 11일 || 1958년 9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br]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유임[br]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상업성 설치 || ||<-3>'''내각 상업상''' || || 1958년 9월 29일 || 1959년 5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br]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해임 || == 참고문헌 == * 강창록, 김영순, 이근전, 일천(강일천), 주덕해(서울: 실천문학사, 1992).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 전쟁(서울: 명지출판사, 2000). * 려정, 붉게 물든 대동강: 前 인민군 사단정치위원의 수기(서울: 동아일보사, 1991).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의 일지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의 일지 3.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관 직원들의 일지와 면담록 3. *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소장 북한 인물 자료 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