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지달수}}}'''[br]'''池達洙'''}}}}}} || || '''이명''' ||이달수(李達洙), 이경옥(李慶玉) || || '''자''' ||동수(東洙) || || '''본관''' ||[[충주 지씨|[[파일:충주 지씨 종문.svg|width=20&bgcolor=#fff]] 충주 지씨]] (忠州 池氏)[* 경력공파 33세 수(洙) 항렬.] || ||<|2> '''출생''' ||[[1909년]] [[8월 5일]] || ||[[한성부]] 북서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br](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 ||<|2> '''사망''' ||[[1969년]] [[5월 16일]] (향년 59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89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909년 8월 5일 한성부 북서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지청천]]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용자[* 윤기희(尹基喜)의 딸이다.]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성부 [[내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 일찍이 아버지 지청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고, 1932년 [[한국독립군]]에서 [[중사]](中士) 급 분대장으로서 한·중 연합군의 일원으로 [[길림성]] 쌍성시(雙城市)[*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솽청구(雙城區).]·아성현(阿城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아청구(阿城區).]·우가둔(牛家屯)[* 쌍성보와 약 20km 떨어져 있다고 하나 현재 어딘지 확실하지 않다.] 등지에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며 [[만주군]]과 교전했다. 그 뒤 한·중연합군이 와해되고 독립군의 근거지가 중국 본토로 옮겨지자, 아버지를 따라 [[난징]]으로 가서 둥관터우(東關頭)[* 현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난징시]] 친화이구(秦淮區) 둥관터우샤오취(東關頭小區).]에 거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민족혁명당]] 군사부원이 되었다. 그리고 [[http://db.history.go.kr/id/ij_009_0040_00490|1938년 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화베이]] 및 [[내몽고 자치구|수원성]](綏遠省) 지구 공작대장으로 특별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주계(主計) 및 경리로 임명되었고, 그해 11월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간부에 보임되었다. 1941년 2월 [[나태섭]]·[[고시복]]·[[유해준]](兪海濬) 등과 함께 수원성을 근거지로 하여 [[국민혁명군]] 각 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으며, 수원성 일대부터 [[관동군]] 점령 하에 있는 [[하북성]]의 [[북경]]·[[천진]](天津)·[[탕산|당산]](唐山)지구와 [[장자커우|장가구]](張家口)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전방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전에 장가구에서 포섭했던 조선인 청년 최준(崔俊)이 관동군 헌병대에 자수하여 밀고함으로써 동지들이 검거되자,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복귀하여 항일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평수(平綏)[* [[북경]]의 옛 이름인 [[베이핑]](北平)과 [[후허하오터시]]에 있던 수원(綏遠)까지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지구 적 후방 공작단 부단장에 임명되어 활동했고, 1943년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장 및 남경 임시편입 지대 부대장을 역임했다. [[8.15 광복]] 후에는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가,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1969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97376#home|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충주 지씨]][[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909년 출생]][[분류:196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독립유공자 후손]][[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