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중앙아프리카공화국 관련 문서)] ||<-3><:> {{{#fff {{{+1 '''중앙아프리카 제국'''}}} [br] '''Empire Centrafricain''' }}} || ||<:><-2> [[파일: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기.svg|width=100%]] ||<:> [[파일:중앙아프리카제국 국장.svg|width=60%]] || ||<-2> {{{#ffffff '''국기'''}}} || {{{#white '''국장'''}}} || ||<-3> [[프랑스어|{{{#D21034,#289728 '''Unité, Dignité, Travail'''}}}]] [br] {{{#003082,#ffce00 '''통일, 존엄, 노동'''}}} || ||<-3><:> '''{{{#fff 1976년 12월 4일 ~ 1979년 9월 20일}}}''' || ||<:><-2> '''{{{#fff 성립 이전}}}''' ||<:> '''{{{#fff 멸망 이후}}}''' || ||<:><-2> '''[[중앙아프리카공화국|{{{#fff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중앙아프리카공화국|{{{#fff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 '''{{{#fff 위치}}}''' ||<(><-2> 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 '''[[수도(행정구역)|{{{#fff 수도}}}]]''' ||<(><-2> [[방기(중앙아프리카공화국)|방기]] || ||<:> '''{{{#fff 정치체제}}}''' ||<(><-2> 명목상[[입헌군주제]], [[군사독재]][br]사실상 [[전제군주제]][*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는 입헌군주제였던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도 가끔씩은 전제군주적인 일면을 보이기는 했으나 보카사 제국은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뿐인 완전한 전제군주국이었다. ] || ||<:> '''{{{#000 국가원수}}}''' ||<(><-2> 황제 || ||<:> '''[[언어|{{{#000 언어}}}]]''' ||<(><-2> [[상고어]], [[프랑스어]] || ||<:> '''[[종교|{{{#000 종교}}}]]''' ||<(><-2> [[가톨릭]], [[이슬람교]] || ||<:> '''{{{#000 통화}}}''' ||<(><-2> [[중앙아프리카 프랑]] || [목차] [clearfix] == 개요 == [[1976년]] 12월 4일에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대통령]]이던 [[장 베델 보카사]]가 '[[보카사 1세]]'라는 이름으로 [[황제]]를 자칭하고 [[제국]]을 선포하면서 수립된 국가. == 역사 == || [youtube(2_74Hh35jk0)] || || [[보카사 1세]]의 대관식 당시 실제 영상 || 제국 수립 1주년이던 [[1977년]] 12월 4일에 [[보카사 1세]]는 과거 중앙아프리카의 종주국이던 [[프랑스]]의 원조금까지 빼돌려가며 1년 국가 [[예산]]의 1/3, 국가 [[GDP]]의 18% 정도인 2200만 달러[* [[2022년]] 가치로는 약 9천만 [[미국 달러|달러]]로, [[대한민국 원|원화]]로 환산하면 약 1200억 원이다.]를 들인 초호화 대관식을 열었다. 이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실제로 보카사의 대관식에 [[외국]]의 [[국가원수]]는 [[병먹금|단 한 명도 오지 않았고]], [[영부인]]을 보낸 나라도 단 2개국([[모리셔스]], [[모리타니]])밖에 없었다.] 이후 프랑스는 중앙아프리카 제국과 보카사를 암묵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보카사 1세는 국민들을 위해 나름 선정을 펼쳤다고 볼 여지도 있는 대통령 집권기와 달리 국민들의 자유를 심각하게 탄압했고, 경제를 파탄내며 점점 국민의 신뢰를 크게 잃었으며, 폭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우간다]]의 [[이디 아민]] 이상으로 잔혹한 [[식인]] 소문까지 나돌았을 정도였다.[* 다만 식인 소문만큼은 무근거로 확인되었다.] [[1978년]] 10월부터 보카사 1세는 [[자뻑|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황제의 모습이 그려진]] [[교복]]을 학생들에게 국민들의 반년 봉급 이상으로 비싼 가격으로 강매했는데,[* 당시 교복의 가격은 당시 가치로만 165달러였고, 2022년 기준으로는 약 680달러(약 92만 원)이다. 참고로 2022년 기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1인당 GDP]]가 527달러다.] 이 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과 국민들이 [[1979년]] 1월 18~20일/4월 17~19일에 방기에서 2차례에 걸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열었다.[* 참고로 문제의 교복 규정은 1차 시위 종결 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2차 시위의 발생은 이후에도 반정부 학생들에 대한 탄압이 그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온 것에 가깝다.] 이 두 시위에서 보카사는 황실 [[근위대]]와 [[자이르]]에서 파견된 군대[* 심지어 이들은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용병]]도 아니었고, 보카사가 [[모부투 세세 세코]] 자이르 대통령에게 '''군대 파견 요청을 해서 온 것이었다.''']를 시위 진압에 투입한 후 발포를 명령하며 폭압적인 진압을 자행하여 1차 시위에서는 50~150명의 민간인들을, 2차 시위에서는 100명의 학생들을 포함한 4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심지어 2차 시위 당시에 보카사 1세 황제는 감옥에 가서 수감된 어린 학생들을 '''직접''' 때려 죽였다고 한다.] 심지어 이 참극들이 일어난 [[1979년]]은 [[UN]]에서 '''세계 아동의 해'''라고 선포한 해이기도 했다. 이 피의 [[학살]]은 세계적으로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 광풍을 보다 못한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은 조사 위원회를 만들어 [[방기(중앙아프리카공화국)|방기]]에 왔지만, 보카사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2년 전에 [[이혼]]한 [[프랑스인]] [[아내]]의 복수극이라고 일컫는 등의 [[궤변]]을 일삼았지만, 오히려 조사관들은 이 아동 학살을 고발하는 보고서 발표하게 되며, 보카사를 암묵적으로 지원하던 프랑스도 [[특사]]를 보내 보카사에게 선정을 베풀라고 다그쳤으나 보카사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그 특사를 두들겨 패고 쫓아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프랑스는 제국에 대한 지원을 사실상 완전히 끊은 후 보카사의 전임 대통령이던 [[다비드 다코]]를 지지하는 세력과 [[쿠데타]]를 계획하였고, 1979년 9월 20일에 [[제1해병공수연대]]를 방기에 투입하는 '바라쿠다 작전'를 실시하여 제정을 무너뜨린 후 다코를 다시 대통령에 앉혔다. 보카사 1세가 쫓겨난 후 방기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하며, 이후 보카사는 프랑스로 [[망명]]을 갔다가 [[1986년]]에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고국]]에 돌아와 [[재판]]을 받게 되어[* 여담으로 이 재판은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로 열린 전직 [[독재자]]에 대한 재판이기도 했다.] [[1987년]]에 [[사형]] 판결을 받게 되나, [[1988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93년]]에 [[사면]]되고 [[1996년]] 11월 2일에 방기에서 향년 75세로 [[사망]]한다. [[분류: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분류:20세기 멸망]][[분류:나무위키 아프리카 프로젝트]][[분류:아프리카의 황제국]][[분류:과거의 독재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