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from=중국 공산당, other1=게임 Hearts of Iron IV의 세력, rd1=중국 공산당(Hearts of Iron IV))]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중국/정치)] || '''[[파일:중국 공산당 문장 옐로.svg|width=20]] 중국공산당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공산주의)] [include(틀:마오주의)] [include(틀:중국공산당의 구조)] [include(틀:중국공산당 중앙영도기구)] [include(틀: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원내 구성)] [include(틀: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원내 구성)] [include(틀:중화권 관계 관련 문서)] [include(틀:중국 관련 문서)] }}} || ||<-4>
{{{#ffff00 {{{+1 '''중국공산당''' }}} [br] '''中国共产党 / 中國共産黨''' [br] '''Communist Party of China'''}}} || ||<-4> {{{#!wiki style="margin: -11px; margin-top: -16px; margin-bottom: -16px" ||<:> [[파일:중국 공산당 당기.svg|width=80%]] ||<:> [[파일:중국 공산당 문장.svg|width=50%]] || ||<:> '''{{{#ffff00 당기}}}''' ||<:> '''{{{#ffff00 당장}}}''' ||}}} || || '''{{{#ffff00 약칭}}}''' ||<-3><(> [[중공]], CPC[* 중국공산당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이다.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보는 좌파 단체들에서도 CPC를 주로 사용하는 편. 다만 전 세계적으론 CCP가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CPC를 선호하는 쪽은 국제주의에 따라 중국공산당을 중국의 공산당('''Chinese''' Communist Party)이 아니라 중국에 있는 공산당(Communist Party '''of China''')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딧 r/socialism에서 CCP라고 쓰면 친절하게 CPC로 수정하도록 권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CCP, [[일당 독재|당(党)]][* 중국 현지에서 쓰이는 명칭. 다른 당이 [[일당제|사실상 없으며]] '''중화인민공화국 = 중국공산당'''이라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민주당파]] 정당들이 존재해서 법정 야당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반우파 투쟁]] 이후 세력을 크게 잃어 제대로 된 야당의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다. 이렇게 불리우는 또 다른 정당으로는 [[북한]]의 [[조선로동당]]이 있다.] || || '''{{{#ffff00 창당일}}}''' ||<-3><(> [[1921년]] [[7월 23일]]^^([age(1921-07-23)]주년)^^[* 창당 기념은 [[7월 1일]]에 한다. [[중국공산당#여담|여담 문단]] 참조.] || || '''{{{#ffff00 창당자}}}''' ||<-3><(> [[천두슈]], [[리다자오]] || || '''[[총서기|{{{#ffff00 총서기}}}]]''' ||<-3><(> [[시진핑]] || || '''{{{#ffff00 정치국[br]상무위원}}}''' ||<-3><(> [[시진핑]], [[리창]], [[자오러지]], [[왕후닝]], [[차이치]], [[딩쉐샹]], [[리시]] || || '''{{{#ffff00 중앙 당사}}}''' ||<-3><(> [[중국]] [[베이징시]] [[중난하이]] || || '''[[기관지#s-2|{{{#ffff00 당보}}}]]''' ||<-3><(> [[인민일보]], [[광명일보]], [[경제일보]] || || '''{{{#ffff00 청년조직}}}''' ||<-3><(>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중국 소년 선봉대 || || '''[[당군|{{{#ffff00 군사조직}}}]]''' ||<-3><(> [[중국 인민해방군]] || || '''{{{#ffff00 국제조직}}}''' ||<-3><(> [include(틀: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 || '''{{{#ffff00 당원}}}''' ||<-3><(> 98,000,000명^^(2022년 기준)^^[[https://m.yna.co.kr/view/AKR20230630171200097?section=international/all|#]] || || '''[[표어|{{{#ffff00 슬로건}}}]]''' ||<-3><(> 为人民服务[br]^^(인민을 위해 복무한다)^^[* 중국공산당, 중국 정부 및 중국 인민해방군의 표어로, [[마오쩌둥]]의 기고에서 유래하여 슬로건으로 널리 쓰인다. / (번역 인용) 시진핑, "당이 인재를 관리하는 원칙을 견지하고 로동을 존중하고 지식을 존중하며 인재를 존중하고 창조를 존중하는 방침을 견지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효과적인 인재정책을 실행하여 광범한 인재들이 당을 사랑하고 조국에 보답하고 헌신적으로 맡은 바 사업에 최선을 다하며 '''인민을 위해 복무'''하도록 인도하여야 합니다."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의 보고 한국어판」. 2022년 10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 || '''[[전국인민대표대회|{{{#ffff00 전국인민대표대회}}}]]''' ||<-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10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e1c25 70%, transparent 70%)" {{{#ffffff 2,097석 / 2,980석(70%)}}}}}} || || '''{{{#ffff00 정치적 노선}}}''' ||<-3><(> [[국수주의]]적 [[패권주의]][* 현 중국에선 자신들은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에둘러 부정하고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에 [[희토류]] 제한 조치를 거는 등의 행태는 사실상 [[패권주의]]다. 이러다 보니 [[국수주의]]적 행태도 종종 보인다.][br][[반서방]] ,,(2012년~),,[* 주석에 따라 달랐다. 대표적으로 [[장쩌민]], [[후진타오]] 시절에는 [[서방]] 및 주변국들과 원만하게 지내려는 노력도 했다. 사실 이는 시진핑도 이론적으론 일부 추구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중국 패권주의가 노골화되며 이상과 현실에선 차이가 커지고 있다.] || || '''{{{#ffff00 이념}}}''' ||<-3><(>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2017년~),,[* 일명 '''시진핑 사상'''이라 불리기도 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주의, 덩샤오핑 이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자칭한다. 실체가 두루뭉술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br][[중화민족주의]][br][[공산주의]][* 다만 중국공산당의 혁명 이론에 따르면 중국은 공산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 여정에 있으며, 실제로 공산주의에 도달했다고 선포한 적은 없다. 이는 소련과는 다른 부분이다.] ---- '''과거의 이념:[br]'''[[마르크스주의]] ,,(1921년~1929년),,[br][[스탈린주의]] ,,(1929년~1935년),,[br][[마오주의]] ,,(1937년~1978년),,[* 개혁개방 이후 사실상 마오주의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하는 기운도 있지만 [[중국공산당 규약|강령]]에는 공식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개인 우상화 등에 비춰보면 [[전체주의]]와도 연관되지만, 사실 아래에서부터의 반응 측면에선 [[문화대혁명]] 시기를 제외하곤 논쟁의 여지가 있다.][br][[권위주의]] [[과두정|과두 독재]] ,,(1978년~2012년),,[br][[중국 특색 사회주의]] ,,(1978년~2012년),,|| || '''{{{#ffff00 정치적 스펙트럼}}}''' ||<-3><(> [[극좌]] ,,(1921년~1978년),,[br][[혼합정치]] ,,(1978년~),,[* 공식적으로는 극좌 정당으로 분류하나 현재 중국공산당이 타국의 [[공산당]]과 비슷한 극좌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애초에 현 중국은 자본주의 체제에 많이 물든 상태이며(물론 사회, 정치, 제도에서 사회주의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상태다.), 마오쩌둥 시기 실시되었던 대학 무료 교육이나 노동자 무상 아파트 지급 등도 실시하지 않고 있다. (참고로 이때 무상 아파트를 지급받은 이른바 따마(아줌마) 세대는 개방개혁 이후 부동산 폭등의 영향으로 졸부가 된 경우도 상당했다. 이는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좌절감과 불만을 주기도 한다. 젊은 세대의 극단적 애국주의도 이런 좌절감의 발로로 보기도 한다.) 결국 개방개혁 이후 중공의 경제 노선은 공산당내 우파(중도파) 세력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실용주의]] 노선은 다른 나라 좌우 정당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니, 결국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 구분되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이 문제.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현재 중국공산당의 정책 방향은 현상유지를 전제로 [[국력]] 강화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노리는 것은 당연히 현 권력층의 권력 유지.] || ||<-4><:> [[http://www.gov.cn/zhuanti/19thcpc/index.htm|'''{{{#ffff00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파일:중국 공산당 문장 옐로.svg|width=20]] || ||<-4><:> [[http://cpc.people.com.cn/|'''{{{#ffff00 중국공산당 뉴스포럼}}}''']]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의 현재 집권여당.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시|상하이]]에서 [[천두슈]],[*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리다자오]]의 주도하에 창당됐다. [[1949년]]부터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중국 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집권정당인 [[독재]]정당이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에는 공산당 말고도 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8개의 [[민주당파]] 정당이 있지만 [[관제야당|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정치활동만 하고 있으며]] [[정권 교체]]는 실질적으로 할 수도 없고 시도 자체도 하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을 그나마 옹호하는 이들은 현재 중국이 일당독재 체제이긴 하지만 일인독재는 아니며, 엄연히 당내 파벌간 견제 장치가 작동하고 정년과 임기제가 정착되어 있어, 제도화된 파벌간의 권력 교대가 타 국가의 정권교체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2022년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3기 연임을 확정해 반대 계파를 지도부에서 일소하고 정년과 임기 제한을 사문화시키며 사실상 일인독재 시대를 열게 되어 이들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약칭은 '''[[중공]]'''(中共).[* [[1988년]] 이전까지 [[한국]]에선 중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일개 중국 공산당 당국 혹은 [[정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당시 수교 중이던 [[대만|중화민국]] 때문이었다. [[한국-대만 관계]] 문서 참조.] 중국 현지에서는 더 줄여서 그냥 "당"([[党]])이라고도 부른다. [[일당제]]인 중국에서는 [[중국 정부]]가 곧 중국공산당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 정부와 중국공산당은 별개의 [[조직]]이다. 중국 국내법상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라고 불리며, 이 국무원이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받는다. 즉, 당이 국가기관보다 상위 기관이며, 법의 서열도 헌법보다 당헌이 우선된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이 정부의 역할도 하는 이중정부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체제를 당국가 체제라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 자국 중앙 및 지방 정부를 단순히 "중앙 정부 혹은 지방 정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국 대륙내에서 [[중국인]]들이 "당"이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 이 곳을 가리킨다. 당원은 [[대륙의 기상|9천만명 이상]]이다.[* 중국 인구의 약 6.4%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정당이다. 1위는 당원 수가 무려 '''1억'''명 이상인 인도의 [[인도 인민당]]. 다만 중국공산당은 [[일당 독재]]로 가입수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음에도 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 부질없는 비교긴 하다. 유령 당원이 아닌 진성 당원 수가 저정도 된다는 소리라.. 참고로 당원 규모 세계 3위와 4위는 [[미국 민주당]]과 [[미국 공화당]]이다.]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전국대표대회]]'''라는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가 있다. 공산당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데 여기서의 결정이 다음 회의 때까지의 중국 정책방향을 결정한다.[*출처 서성, <한 권으로 읽는 중국 문화>, 넥서스, 2005, p38-40.] 2021년 11월, 공산당은 19기 6중전회를 개최한다. 중앙정치위 및 중앙정치국의 성과 총결산을 통해 제 [[2022년]]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20차 당대회]]의 전열 정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현 [[당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인 '''[[시진핑]]'''이다. == 역사 == === 창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3byZfHDLWM)]}}} || || [[중국 영화]] 《건당위업》의 한 장면.[* 영상 댓글 중 하나의 내용이 흥미롭다. ' "니가 심해를 보고 있을 때, 심해도 널 보고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니체]]. 본인들의 타도 대상보다 영악해지는 혁명가들.'] ||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영향을 받고 [[5.4 운동]]의 시류를 탄 천두슈 등의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이전에 학계에서는 [[1920년]]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라는 단체에서 출발했다고 해석되고 있다. 제1차 당대회는 [[1921년]] 7월에 있었는데, 이때 50여 명의 당원을 대표해 13명의 [[중국인]]과 2명의 [[외국인]]([[코민테른]]에서 [[파견]])이 참가하였다.[* 이 중 [[저우포하이]], [[천궁보]] 등은 탈당하여 [[중국 국민당|국민당]]에 합류했다.] 초기에는 1921년 [[노동조합]]서기처를 설립,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를 조직, 후원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처음에는 광동군벌 [[천중밍]], [[직예군벌]] [[우페이푸]] 등과의 합작을 도모했으나 천중밍과는 [[영풍함 사건]]으로, 우페이푸와는 [[2.7 사건]]으로 결렬했으며 [[쑨원]]과 연합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식으로 [[1차 국공합작]]에 나서게 된다. 이어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혁명군]]의 건설을 도왔으며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객군 반란]] 진압, [[국민당의 2차 동정]]과 남정에 적극 참여하여 대중운동을 선동하여 군사작전을 도왔고 공산당을 선전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며 국민당을 잠식하려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공간의 갈등이 끓어올랐고, 이런 [[갈등]]은 쑨원이 사망한 후에 폭발했다. [[1925년]] [[8월 20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암살되자]]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와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은 이를 구실로 [[후한민]], [[쉬충즈]], [[린썬]], 쩌우루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을 대거 숙청했다. [[장제스]]는 이 [[숙청]]에 가담하면서 국민당의 [[2인자]]로 자리잡았지만 [[북벌]] 문제를 놓고 공산당과 갈등을 빚었고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중산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군벌/중화민국|군벌]]이 장악한 [[북양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한다. 하지만 국공 갈등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영왕운동]], [[천도논쟁]], [[난징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보로딘은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급기야 [[4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시켰다. 결국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장제스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27년 [[5월]], 하두인을 비롯한 우파 장령들이 [[마일사변]]을 일으키며 분공을 요구했고 [[펑위샹]]도 분공을 요구, 거기에 코민테른의 [[5월]] 지시가 내려오게 되면서 1927년 [[7월]]에는 [[국공결렬|우한 국민정부와 공산당도 결별하게 되었고]]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시작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 때문에 '''[[8.7 긴급회의]]를 통해 천두슈가 실각하고''' [[취추바이]]가 집권하여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주도했으나 역시나 실패했다. [[12월]] 광저우 폭동의 실패의 결과로 6만에 달하던 당원이 1만명으로 급감하는 등 공산당의 피해는 심각했다. ===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과 [[대장정]] === 하지만 [[마오쩌둥]]과 [[주더]]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중국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했으며 특히 [[강서성]]에 건설된 강서 소비에트는 계속 확장,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되었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상하이]]의 임시 당중앙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마오쩌둥은 실각했고 [[오토 브라운]]과 28인의 [[볼셰비키]]라 불리는 [[소련]] 유학파들이 군사 노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 중앙 소비에트를 비롯한 여러 소비에트 지구들이 분쇄되었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멸망했다. [[1934년]] 공산당은 [[대장정]]에 올랐으며, [[1935년]]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복귀했다. 이후 당 권력을 두고 [[장궈타오]]와 마오쩌둥의 분쟁이 있었으나 마오쩌둥 당적까지 박탈한 장궈타오가 그의 4방면군과 함께 [[사천성]]에서 해방구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다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당하면서(...) 마오쩌둥의 우위가 확실해졌고, 마오쩌둥은 [[섬서성]] 연안에 정착하였다. [[2차 양광사변]]을 즈음해서 반장항일에서 핍장항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장제스에게 [[항일]]을 위해 화해하자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어 [[일본제국|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장쉐량]]은 [[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체포하고 [[국공합작]]을 강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여 중일전쟁 당시에는 어쨌든 느슨하게나마 연합해 있었다. === 국공내전 === [[중일전쟁]] 말기인 [[1945년]] 초에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자, 공산당의 중심지였던 [[산시성(산서성)|산시]] 및 [[화북]]일대가 [[무주공산]]이 되었고 더욱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동남부해안에 집결해있는 일본군과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틈을 노려 화북지역을 공산당이 재빠르게 장악하였다. 이후 공산당군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무려 120만 명의 군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륙타통작전|일본의 실수]]가 중국공산당에게 하늘의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소련은 [[만주 전략 공세 작전|8월 폭풍작전]]으로 만주지역을 발빠르게 장악하여 만주지역에 주둔한 [[관동군]]을 [[조선반도]]로 몰아내었다. 소련이 전후 [[만주]]를 중국공산당에게 양도한다는 약속을 하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어쨌든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며 중일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마무리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세력경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중재로 두 당 사이에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공산당 토벌을 목표로 선공을 가하면서 2차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중국공산당은 내전 초기 연전연패하면서 본거지인 [[옌안]]까지 함락당할 정도로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거느린 대군이 게릴라전으로 [[중원]]에서 국민당의 본거지인 [[난징]]-[[상하이]] 부근에서 북부로 가는 [[보급]]을 방해하면서 [[1947년]] [[겨울]]에 만주에서 국민당의 50만 대군에게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여기에 장제스가 내전에 승리하기 위해 [[군비]]에 몰빵하는 재정정책을 펼쳤는데, 이것이 독이 되어 난징-상하이 지역의 [[경제]]가 붕괴하면서 이후 공산당은 기세를 몰아서 국민당을 몰아붙여서 [[1949년]] 중국국민당을 [[국부천대|대만으로 밀어내고]] 대륙본토를 대부분 장악한다.[* [[윈난성]] 등 일부 지역의 국민당군은 계속 저항했지만, 외부에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1950년대]] 초반에 대부분 공산당군에 토벌된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공산당 창립 초창기에 있었던 코민테른 제1차 대회의 중국공산당 소속 참가자 13명 중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2명이었고, 4명은 혁명 활동 중 전사하고, 나머지 7명은 중국 국민당 혹은 일본의 [[괴뢰국|괴뢰정권]]으로 전향하였다. 다만 2명은 중공 정부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복당이 허용되어 이후 대륙에서 [[관리]]로 일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중국국민당과 더불어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본토와 [[만주|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보내주었고, [[좌우합작]]을 모색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부분적으로 협력관계를 맺기도 했다. [[조선의용대]]처럼 [[이념]]과 상관없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은 경우도 많이 있었다.[* 다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그렇게 적극적인 후원자는 아니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민정부|중화민국 정부]]가 주요 후원자였기에, 그와 대립하는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 이후부턴 사실상 적 비슷했다. 물론 임시정부 세력 자체가 미약하기도 하고, 일본 제국 상대하기도 바빠서 직접적으로 충돌하진 않았다.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도 [[저우언라이]] 같은 공산당내 온건파들과는 교류가 있었으나, 큰 접점까지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 [[1949년]] 이후 === [[마오쩌둥]] 집권 당시에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의 대형 실책을 저질렀지만, 마오쩌둥 사망 이후 [[4인방]]을 제거하고 [[화궈펑]]까지 밀어내며 권력을 쥔 후임자 [[덩샤오핑]] 시대부턴 개방개혁 정책이 효과를 봐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실제로 [[바이두]]에 "[[http://zhidao.baidu.com/link?url=Y7Pye2IC8zJQQSWYkndmIP2T2O8s3ZqqH3-AQSCLzKLirJ9SfWJHzben6CppAFGDJAFkgzukl_jeLCvESGuvAK|왜 [[중국]]이 [[일당제]]여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공산당이 모든 걸 다 해주는데 [[다당제]]가 왜 필요하냐"는 답변이 올라온 사례가 있다. 물론 현대에도 좌우 가리지 않고 독재 추종 세력들이 자주 떠벌리는 궤변으로, [[댓글알바|이런 댓글만 조직적으로 다는]] [[우마오당|공산당 관련자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020년]] "[[미중관계|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미국 공화당|같은 당]] 출신 전직 [[미국 대통령|대통령]] [[닉슨]]의 정책이, 변화하지 않는 중공의 집권만 강화시켜줬다"며 비판하기도 했다.[[https://www.ytn.co.kr/_ln/0104_202007241322469211|#]] 사실 이때만 해도 미국의 최대 정적은 [[소련]]이었으니 그 소련의 최대 우방인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며 소련을 고립시키는건 어찌보면 닉슨 시대에는 현명한 것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후진국이었던 중국이 이후 급격히 성장하면서 오늘날엔 러시아를 제치고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빈부격차]], [[부정부패]], [[환경오염]] 문제도 상당히 크고, 중국인들도 1당 독재를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등 [[정치]]에 관한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통치의 경직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그 불만을 교묘히 컨트롤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낮추고 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 시기에는 정부 [[비판]]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쌍백운동 시절에 잠깐 허용해준 적은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언론]]의 비판은 눈감아주는 추세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어떠한 경우의 정부 비판도 금지되었지만, [[후진타오]]-[[원자바오]] 시대 들어 점점 완화되기 시작해 현재는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하급 공무원 비리, [[환경오염]], 행정 부조리 등은 보도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배합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게다가 상기에 언급된 지방행정의 비리나 [[부조리]], 환경오염 등은 중앙정치에 있어서도 손해가 되고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런 지방 부정의 불만이 쌓이다 보면 결국 각 지방에서 동시적으로 터지는 불만을 막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중앙 입장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문제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국이 이렇게 좀 유연해진 건 [[원자바오]] 등 나름 온건한 그 시절 중국 지배자들의 스타일 덕분도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시진핑]] 정권이 출범하면서 다시 악화되고 있다. 사실 악화라는 것도 좀 웃긴 게 마오쩌둥 심지어는 [[국부천대]] 이전 장제스 정권 시절에도 중국은 사실상 [[독재]] 시기로, [[국민]]([[인민]])이 [[참정권]]을 가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이야 [[대만]]이 [[중화권]]에선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평가받지만,[* 대만(중화민국)을 제외하면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홍콩, 마카오도 사실상 그 영향력 안에 놓여있고, 화교가 많은 싱가포르도 돈 많은 북한이라는 비아냥에서 알 수 있듯 경찰국가 성격이 강하다.] 그건 장제스 독재 시절에 대항한 민주파들의 공이 크고, 국공내전 당시만 해도 사실 중국인들이 보기엔 그 놈이 그 놈으로 보일 여지는 다분했다.[* 게다가 당시 국민당 당 조직도 [[소련 공산당]]의 그것과 비슷하여 중공과 큰 차이도 없었다.] 게다가 먼저 집권한 집권당의 특성상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부패정당이란 낙인이 찍혀버렸고, 당시만 해도 약자를 위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택동의 공산당은 일반인들이 혹할만한 [[정당]]이었다. 사실 중국공산당의 당내 역할만 보면 [[후진타오]] 집권 시기까지는 [[일본]]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과 상당히 비슷한 1당 우위 속[* 중국도 엄연히 야당이 존재하며 현 단위에선 직접선거도 한다. 관제야당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 계파투쟁 측면도 있었다. 최고 지도자 1인 결정보다는 계파들 간의 합의나 원로 영향력이 더 큰 편이었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부터는 사실상 [[북한]]의 [[조선로동당]]과 유사하게 [[중국공산당의 파벌|이 파벌 통치]]가 아닌 최고지도자 1인 중심 체제가 되었다. 즉, [[2018년]] [[3월]] 시진핑이 사실상 종신 독재를 선언하면서 [[중국공산당의 파벌|저 돌아가면서 하는 파벌 통치]]는 끝났다는 것이다. == 중국공산당의 [[특징]] == ===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 === ||
'''第一条''' 中华人民共和国是[[프롤레타리아|工人阶级]]领导的、以工农联盟为基础的[[인민민주주의|人民民主专政]]的[[사회주의|社会主义]]国家。 社会主义制度是中华人民共和国的根本制度。__'''中国共产党'''领导是[[중국특색 사회주의|中国特色社会主义]]最本质的特征。__禁止任何组织或者个人破坏社会主义制度。 ---- '''제1조''' ① 중화인민공화국은 [[프롤레타리아|노동 계급]]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② 사회주의 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__'''중국공산당''' 영도는 [[중국특색 사회주의]] 최고의 본질적 특성이다.__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 ---- '''-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2 ([[2018년]] [[3월 11일]] 개정)}}}'''|| 중국공산당을 단순한 중국의 집권여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데, 민주국가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집권여당이라 해도 단순히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을 넘어 야당과 구별되는 지위가 부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비유하면 '''중국 전역의 정치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 학계, 문화예술체육계, 종교계 등 '''민간의 영역을 포함한 모든 “법인”에 침투해 있다.''' [[대학]]이나 [[기업]] 등에도 당 조직이 설치되어 있고 공산당원이 우대받는다. 공산당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직'''에 해당하는 성장이나 [[시장(공무원)|시장]] 등이 그 [[행정구역]]의 1인자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당직]]'''을 맡고 있는 성위원회나 시위원회의 당서기가 1인자고 성장이나 시장은 [[2인자]]에 불과하다. 성장이나 시장도 '''당내'''에서는 부서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를 들면 원칙적으로 [[광둥성]] 성장은 시정부의 책임자인 광저우 시장에게는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시당의 책임자로 법적으로 민간인인 [[광저우]] 시위서기와는 직접적으로 업무상 상하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광둥성 성위서기는 둘 모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공직자 간 상하관계와 경력의 차이가 있고 실제로는 광둥성 성장이 공산당 광둥성위 부서기를 겸임하는 만큼 그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영기업이나 대학에서도 그 기업이나 [[학교]]의 당서기가 총경리([[CEO]])나 [[총장]]보다 상급자다. 물론 국무원처럼 공직을 맡고 있는 총리나 각 부의 부장이 당조서기를 겸임하는 경우 공직을 맡은 사람이 그 조직의 1인자가 되기도 하지만, 가끔씩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국무원]] 부장 등 몇몇 공직이 [[구색정당]] 출신 인사에게 할당될 때는 실질적 권한은 당조서기로 임명된 부부장이 장악하게 된다. 민간기업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기업 내 공산당원들의 조직인 당위원회가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거기다 공산당과의 [[관계]]가 출세나 사업확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 경영진은 당원일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당의 규율과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엽관제]]가 생산수단과 지식인 집단으로 확장되었다고 보면 될 듯.[* 이런 당의 영도 매커니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글. [[https://brunch.co.kr/@booknsword/37|#]] 사실 공기업의 경우 한국에서도 [[낙하산 인사]]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나타나는 등 [[엽관주의]]가 일부 반영되어 있다.] === [[중국공산당의 파벌|파벌 경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중국공산당의 파벌)] === [[능력주의]]와 [[꽌시]]의 공존 === [youtube(76nPUtGl-KM)] [youtube(AXcf8XmAtF4)][* 중국공산당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당원 선발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다. 먼저 [[무신론자]]여야 하고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약칭 공청단)이라는 예비 조직에 들어간 뒤에 약 3년이 걸리는 능력 검증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거꾸로 실력있는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서 체제를 유지하고 당 내의 세대 교체를 하려고 하는 기능도 있다고. 실제 사례로 중국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등 점점 입당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다. 심지어 처음엔 차단되었던 자본가들도 많이 입당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는 '[[꽌시]]', 즉 [[인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정경유착]]도 상당히 심각하다. 더군다나 [[정경유착|정부와 기업, 민간이 힘을 합쳐 그것을 덮기 위해 사실상 통제한다고 보면 된다.]] 공산당 최상층부에는 '''[[태자당]]'''이라 불리는 [[개국공신]]의 2세, 3세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공청단]]'''에서 제도적으로 고급 당료가 끊임없이 수혈되고 있기 때문에 태자당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자당과 공청단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상호견제 하기도 하고, 그 드넓은 중국의 모든 지역을 커버하고, 당이 모든 것을 지도한다는 방대한 공산당 당조직의 전부를[* 장관급 공직자만 400명에 달하는 나라다. 직급 인플레가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중국은 인구 수천 만에 달하는 일급행정구만 31개에 당이 사법부와 입법부는 물론이고 경제와 문화, 과학 등 모든 분야를 영도하기 때문에 당과 정부조직이 거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중에서도 요직과 한직이 갈리지만, 한국에서 의전서열만 높고 실제로는 명예직일 뿐인 자리들과는 달리 이런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고위관료들 사이에서 밀릴 뿐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권력자이다.] 특정 파벌이 전부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 일례로 현 [[시진핑]] 국가주석은 정통 태자당이고, [[후진타오]] 전 주석은 공청단 출신이다.[* 후진타오는 공청단 후배인 [[리커창]]을 차기 대권후보로 밀었으나,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견제 때문에 결국 시진핑 [[중국 주석|국가주석]], 리커창 [[중국 총리|국무원 총리]] 체제로 결론이 났다.] 여기에 지방조직[* [[중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르려면 지방행정 실무경험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시진핑]]만 하더라도 [[허베이]], [[푸젠]], [[저장성]] 등을 거쳤다. 이렇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주재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오를 수 있는 직위가 [[장관]]급이 한계이다. 학자 출신으로 당 중앙정책실에만 20년을 있었던 [[왕후닝]]이 이례적으로 상무위원 자리까지 오르긴 했지만 이런 사례는 극히 예외이며, 당중앙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방 조직을 거쳐야 한다.]에서 실력을 검증받지 못하면, 최고위직까지 오르기가 힘들다. 아무리 부모 덕을 보더라도 [[20대]] 중반부터 시작하는 당조직 말단에서 30년 안에 4-5 단계의 직위를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고속 승진'''해야 정치국 상무위원(정원 7명)의 후보자로 들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정원 205명)에 진입할 수 있다. 실력을 입증하더라도 비리에 연루되는 등 구설에 오른다면 그것을 덮어줄 수 있는 최고위층 인맥의 적극적 비호가 있지 않는 이상 낙마할 수 있다. [[장쩌민]]도 80년대 상하이에서 부정부패 문제로 날아갈 뻔 했다가 보이보[* [[보시라이]]의 아버지]의 구원으로 살아남았고 [[시진핑]]도 푸젠 시절 밀수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 등의 위기를 겪었다. 물론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 인사들이 출세에서 부모 덕을 본 것은 맞지만, 신중국 수립 초기부터 부총리급 이상의 직위를 지낸 인사의 자녀들은 수백 명에 달했으니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대단한 경쟁을 뚫어낸 것이 맞다. 결국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 덩샤오핑의 9자녀들 가운데서도 [[장관]]급까지 오른 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 정협]] 부주석 덩푸팡 뿐이며, 이 자리도 거의 [[장애인]] 할당으로 얻은 자리다.[*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보다 더 끗발좋았던 [[아버지]]를 둔 [[보시라이]](개국공신 보이보의 아들)는 7인에 뽑히는 것이 유력했으나, [[2012년]]에 비리로 몰락했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시진핑]]의 집권을 도왔는데, 태자당 내 유력 주자 한 명이 날라가면서 당 중앙위의 태자당의 표가 분산되지 않고 시진핑으로 집결된 것이다] == 구조 == [include(틀:중국공산당의 구조)] [[파일:중국공산당 권력구조.jpg|align=center]] * 중국은 [[일당제]] 국가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중국의 행정 조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가행정조직/중국]] 문서도 참고하면 좋다. ===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비상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의 [[전당대회]]이다. 전 공산당원 중 3,000명 정도를 대표로 뽑아 5년에 1번 개최하고, 중앙위원회의 요청이나 전국 [[성(행정구역)|성급]]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때는 임시로 개최할 수 있다. 아래 위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차관]]급으로 예우한다.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당원의 부정부패, 비위행위를 감찰하는 기구[* 공무원의 부정부패 및 비위행위는 국가감찰위원회에서 감찰하며, 두 기관은 서로 인적구성이 같다.]로서 서기(1인), 부서기(8인), 상무위원 19인(서기와 부서기를 포함)으로 구성된다. == 역대 영도집체 == 중국공산당의 역대 지도부이다. === 역대 [[당수]] === [include(틀:역대 중국공산당 당수)] 중국에서는 중공중앙주요부책인(中共中央主要负责人)[* 부책인은 [[중국어]]로 책임자이다. 책임(责)을 부담(负)하는 사람(人)이란 뜻.]이라고 한다.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top2=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 * 중앙국 서기(제1차 전국대표대회) * 제1대: [[천두슈]] (1921. 7. 31. ~ 1922. 7. 23.) *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제2~3차 전국대표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총서기(제4차 전국대표대회) * 제1대: [[천두슈]] (1922. 7. 23. ~ 1925. 1. 11.) * 중앙위원회 총서기(제5~6차 전국대표대회) * 제1대: [[천두슈]] (1925. 1. 11. ~ 1927. 8. 7.) 7월 12일 코민테른에 의해 지도부 개조. [[8.7 긴급회의]]로 직무 정지. * 임시: [[장궈타오]] (1927. 7. 12 ~ 1927. 8. 7.) 임시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천두슈의 잠적으로 대행. * 임시: [[취추바이]] (1927. 8. 7. ~ 1928. 7. 19.) 임시중앙정치국 상무위원. [[8.7 긴급회의]]로 대행.(임시 중앙위원회 총서기) * 제2대: [[샹중파]] (1928. 7. 19. ~ 1931. 6. 22.) 제6차 전국대표대회 * 대리: [[왕밍]] (1931. 1. 15. ~ 1931. 9. 15.)(중앙위원회총서기 대리) * 대리: [[보구(중국 공산당)|보구]] (1931. 9. 15. ~ 1934. 1. 15.)(중앙위원회총서기 대리) * 제3대: [[보구(중국 공산당)|보구]] (1934. 1. 15. ~ 1935. 1. 25.)( 중앙위원회 총서기) * 제4대: [[장원톈]] (1935. 1. 15. ~ 1945. 6. 11.)(중앙위원회 총서기)[* 실권은 [[마오쩌둥]]이 쥐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대장정]] 문서의 쭌이회의 참조] * 중앙정치국 주석: [[마오쩌둥]](1943. 3. 20. ~ 1956.9.27)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top2=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 중앙정치국 주석[*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중앙정치국이 최고 기관이 되었고 중앙정치국 주석이 당수 역할을 함.] * 제5대: [[마오쩌둥]](1943~1956)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중앙위원회 주석]][* 중앙위원회가 부활하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신설되었다.][* 당 주석이라고 했으며 [[국가원수]] 직책인 [[중국 주석|국가주석]]과는 다른 직책이다. 국가주석은 공직이며 본 직책은 당직이다. ] (1956-1982) * 제5대: [[마오쩌둥]] (1956.9.27. ~ 1976.9.9.)(제7-10차 전국대표대회) * 제6대: [[화궈펑]] (1976.10.07. ~ 1981.06.28.)(제10-11차 전국대표대회)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현재) * 제7대: [[후야오방]] (1981.06.29. ~ 1987.01.16.)(제11-12차 전국대표대회)[*덩 실권은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이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었다.] * 대리: 자오쯔양 (1987.01.16. ~ 1987.11.01.)(제12차 전국대표대회)[*덩] * 제8대: [[자오쯔양]] (1987.11.02. ~ 1989.06.23.)(제13차 전국대표대회)[*덩][*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로 내려온다.] * 제9대: [[장쩌민]] (1989.06.24. ~ 2002.11.14.)(제13-15차 전국대표대회) * 제10대: [[후진타오]] (2002.11.15. ~ 2012.11.14.)(제16-17차 전국대표대회) * 제11대: [[시진핑]](2012.11.15. ~ 현재)(제18-20차 전국대표대회)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영도집체 === * [[천두슈]](1921년 7월 31일~1927년 7월 12일) * [[장궈타오]](1927년 7월 12일~1927년 8월 7일) * [[취추바이]](1927년 8월 7일~1928년 7월 19일) * [[차이허썬]](1928년 7월 19일~1929년 1월) * [[리리싼]](1929년 1월~1929년 11월) * [[저우언라이]](1929년 11월~1930년 3월) * [[리리싼]](1930년 6월~1930년 9월) * [[취추바이]](1930년 9월~1931년 1월) * [[왕밍]](1931년 1월~1931년 9월 15일) * [[보구]](1931년 9월 15일~1935년 2월 5일) * [[장원톈]](1935년 1월 15일~1943년 3월 20일) * [[마오쩌둥]](1943년 3월 20일~중화인민공화국 건국) === 5대 서기([[1945년]]~[[1966년]])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중앙서기처가 최고의사결정기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서기처 주석이 당의 영도자가 되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중앙서기처 주석으로 실권을 행사하던 마오쩌둥을 위한 조치였다. 서기처 구성원은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런비스]] 5인에 [[천윈]], [[펑전]] 2인의 후보위원이었다. 1950년 [[런비스]]의 사망으로 [[천원]]이 자리를 채웠다. 1956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부활하면서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 주석에 나머지 4인은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이때 [[덩샤오핑]]이 중앙서기처 총서기가 되었고 1958년 제8차 전국대표대회 5중전회에서 [[린뱌오]]가 중앙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런비스]] → [[천윈]] === [[4인방]]([[1966년]]~[[1976년]]) === [[문화대혁명]]으로 5대 서기가 무력화되고 마오쩌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마오쩌둥의 측근에 있던 4명이 권력을 행사한다. 마오의 부인이자 정치국 위원이었던 장칭(江青),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 왕훙원(王洪文),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张春桥), 문예비평가 겸 정치국 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의 4인으로 문화대혁명의 피로감과 저우언라이의 사망으로 촉발된 [[천안문 사태|제1차 천안문 사태]]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 중공 8대 [[원로]] 체제([[1978년]]~[[1990년대]] 중반) === [[1976년]] [[화궈펑]]이 권력을 잡으나 2년만에 [[덩샤오핑]]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고 [[1978년]]부터 [[덩샤오핑]]의 주도로 당 원로들의 집단 지도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정식 당직이 없었지만 [[원로]]로써 큰 권력을 행사하였고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덩샤오핑]],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덩샤오핑, 천윈이 이 위원회의 주임을 맡던 시절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 [[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즉 정식적인 국가주석은 따로있지만 주임을 맡던 덩샤오핑이나 천윈이 뒤에서 그 역할을 하고 당을 총관리하는 [[총서기]]도 [[후야오방]] 같이 따로 있지만 실제적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 실무 책임인 위원회의 상무부주임 보이보가 이 역할을 한 것).]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다. 견해1: [[덩샤오핑]], [[양상쿤]], [[천윈]], [[펑전]], [[보이보]], [[리셴녠]], [[덩잉차오]], [[왕전]] 견해2: [[덩샤오핑]], [[양상쿤]], [[천윈]], [[펑전]], [[보이보]], [[시중쉰]], [[완리]], [[쑹런충]]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제12차 전국대표대회(1982년~1987년) 주임: [[덩샤오핑]] 위원: 172명(1982년), 185명(1985년) 제13차 전국대표대회(1987년~1992년) 주임: [[천윈]] 위원: 200명 === [[장쩌민|장]]-[[리펑|리]]-[[주룽지|주]] 체제 === ==== [[리펑]] 정부(제7, 8차 국무원) ==== ==== [[주룽지]] 정부(제9차 국무원) ==== === [[후진타오|후]]-[[원자바오|원]] 체제 === ==== 제1기 [[원자바오]] 내각(제10차 국무원) ==== ==== 제2기 [[원자바오]] 내각(제11차 국무원) ==== === [[시진핑|시]]-[[리커창|리커창]] 체제 === ==== 제1기 [[리커창]] 내각(제12차 국무원) ==== ==== 제2기 [[리커창]] 내각(제13차 국무원) ==== === [[시진핑|시]]-[[리창|리창]] 체제 === [include(틀:중화인민공화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20기))] ==== [[시진핑]] 핵심 당 중앙위원회 ==== [include(틀:중국공산당 중앙영도기구)] == [[/문제점|문제점]]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중국공산당/문제점)] == 관영언론 == [include(틀:중화인민공화국의 중앙급 신문)] * [[인민일보]] (人民日报) * [[환구시보]] (环球时报) / [[글로벌타임스]](Global Times)^^영문판^^ - 인민일보에서 출자해서 만들었지만, 반(半)관영이다. 꼭 인민일보나 중국공산당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적는 인민일보가 점잖은 논조를 표방한다면 환구시보는 그와 정반대로 상당히 국수적인 논조를 나타낸다.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신문은 아니지만 중국공산당 내 극성파들의 속내가 어떠한지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유용한 편.[[http://news.joins.com/article/20362461|환구시보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 쉽게 말하자면,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그대로 말해준다면, 환구시보는 중국공산당이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나 국내, 국제적인 반발을 의식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비교적 자극적인 논조로 말해준다고 보면 된다.] == 여담 == * 실제 창당일은 [[7월 23일]]이지만, 창당기념일은 [[1938년]]부터 [[7월 1일]]에 기념하고 있다. 국민당과 다른 [[군벌/중화민국|군벌]]들과의 충돌로 초기 기록들을 망실하여 아무도 정확한 창당일을 모르게 된 탓에 마오쩌둥이 7월 1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나중에 학자들이 실제 창당일을 밝혀낸 이후에도 7월 1일을 창당기념일로 유지하고 있다.[[http://naver.me/x35IDjbx|#]][* 이와 유사한 게 [[크리스마스]]이다. 성탄절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념일이며, 예수의 [[생일]]이 아니다. 예수의 정확한 생일은 아무도 모른다.] * [[2021년]] 기준으로 창당된 지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704247&plink=ORI&cooper=NAVER|관련 기사]]. 100년을 바라보고 있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http://news.joins.com/article/19767049|관련 기사]]. [youtube(0Z5_ZtPcP08)]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100주년 기념식을 크게 치렀는데, 학생대표 4인 중 1명으로 선발되어 충성맹세를 선창한 펑린([[馮]][[琳]])이라는 21세의 여대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9년 10월 [[저장성]] [[자싱시]]에서 태어난 펑린(현재 [age(1999-10-01)]세)은 2018년 [[중국전매대학]] [[아나운서]]ㆍ앵커 전공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충성맹세를 선창했다. 또한 동년 9월의 전매대학 입학식에서는 재학생 대표로 연단에 올라 “나는 [[천안문광장]] 근거리에서 시진핑 주석의 연설을 학습하고 경청할 수 있었고, 무한한 영광을 느꼈습니다.”, “나는 중국 인민의 아나운서, 중국공산당의 아나운서입니다. 나는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승리를 향해 행진하는 중국 인민의 목소리, 중국공산당의 정정당당한 진리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라고 연설했다. 펑린의 사진과 영상은 그녀의 미모로 인해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화제를 모았고, 그녀의 개인 [[웨이보]]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은 중국인들, 특히 [[분청|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부쩍 심해진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중화사상]]과 [[애국주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 공산당 혁명 원로의 2대 후손들을 [[훙삼다이]](紅三代)라고 부르는데, [[안하무인]]스런 태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꽤 있어 대중의 시선이 좋지 않은 편이다. * 공산당에 의해 [[중국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최초로 참전한 [[전쟁]]이 [[6.25 전쟁]]이다. 신생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아닌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실질적인 [[한반도]] 반 통일 세력이다. 다만 이때 중공의 참전은 [[유엔군사령부|유엔군]] 정확히는 유엔군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당시 [[미군]] 사령부의 오판도 있었는데, 당시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공 수뇌부는 [[삼팔선|38선]] 남쪽의 유엔군 활동은 보장해주지만, 북쪽으로 넘어오는 순간[* 국군만 올라오는 건 민족 간 [[내전]]으로 보고 참전하지 않겠다고 했다. 참고로 당시 [[대한민국 국군|국군]]의 전력을 생각하면 물자 지원을 받는다 쳐도 단독으로 북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었을 지는 논쟁의 대상. [[인구]]야 당시에도 [[대한민국]]이 거의 2배 더 많긴 했지만 [[북한]]은 그런 열세를 뒤집고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려왔다. 물론 중공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고 오판하다 치명적 타격을 입은 지휘부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개입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는데, 이 때 중공의 전력을 우습게 본 [[맥아더]]를 비롯한 수뇌부는 진격을 계속했고 결과는 알다시피. 사실 당시 남측 수뇌부의 더 핵심적인 문제는 중공 전력의 과소평가에 따른 전세 역전 후 대안 전략 부재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때 최강 [[미군]]을 막았다는 사실 때문에 [[청나라|청]] 말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빨 빠진 호랑이로 취급받던 중국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올라간 측면은 있다. 그래서 중공도 미국과 마찰이 있을 때면 이 사건을 거론하며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띄우고 있는 것. * [[2010년대]] 들어 [[공자]]를 부쩍 띄우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2&aid=0002716212|#]] [[캐나다]] 출신으로 [[칭화대학]] [[교수]]를 역임한 대니얼 A. 벨 같은 친중공 정치학자는 심지어 중국공산당의 독재가 [[유교|공자의 사상]]에 입각한 '[[동아시아]]판 철인정치'라며, 서구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규모 공동체라면 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나 중국처럼 수억 명이 사는 대국에선 이른바 신유가식 현능정치가 최선이라는 것.[* 조직만 보면 [[국제연합]] 같은 범국가적 기구와 유사하긴 하다.] 그는 [[20세기]]엔 [[서구권]]식 [[민주주의]]의 경쟁자가 [[나치 독일|독일]]의 [[나치즘]], [[일본제국|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공산주의]]여서 가장 덜 나쁜 제도라고 볼 수 있었지만 [[21세기]]에도 이 제도가 여전히 그런지는 회의감을 느낀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도긴개긴|알아서 판단하자]]. 좋은 제도가 맞는지에 대한 반론은 이 [[문서]]에도 많은데다가 [[원류 파시즘]]도 덮어놓고 민족만 외치는 이념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면 이론이 어떻든간에 실전에 적용될 때가 문제. 다 떠나서 이 양반은 그래도 나름 현 [[인류]]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자기 딴엔 고심하는 것일 테지만 현 중공이 이런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것 같진 않다. 자기들 집권에 유리한 주장은 뽑아먹고 아니다 싶은 주장을 하면 가차없이 [[토사구팽]]시킬 게 뻔하니 말이다. * [[2020년]] [[7월 21일]] [[영국]]을 방문한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국무장관]]은 "전세계가 중국공산당의 위협에 대항해야 한다"고 밝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421&aid=0004768659|#]] * [[2020년]] [[8월 22일]] [[시진핑]] 주석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제명됐던 전직 중국공산당 간부학교 교수가 [[CNN]]과의 인터뷰에서 "중국공산당은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이라고 주장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421&aid=0004830825|#]] * 도올 [[김용옥]]은 [[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당독재]] 개념과는 좀 다르고, [[민주집중제|워낙 크고 체계, 토론 제도가 잘 되어 있고, 각 계파별로 서로 견제를 해서, 오히려 다당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경찰이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의 경찰과 충돌'''하는 일이 번번찮게 일어나는 면모도 보인다. 물론 일당제 내 계파 간의 견제는 [[다당제]]만큼의 [[견제]] 특히 지속적인 견제는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다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 사실상 [[양당제]] 등의 문제가 있어서 계속 제도적 수정, 보완이 이뤄지는 중.][* 실제 도올은 중공의 [[일당 독재]]를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도올은 진보 성향 학자라고 알려져있지만, 일반적인 진보 학자들과는 다르게 "민족 정기를 위해 [[징병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발언도 하는 등 꽤나 보수적인 견해도 비추는 학자이다.) 하지만 "시진핑 이후 1인독재가 되어버렸다"며 시진핑에 대해선 굉장히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친 바 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퇴임시 부정부패가 문제라는 발언, 중국에서 원로한테 훈수 받는 제도,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등 호랑이 4인방 같은 사례를 들면서 비리가 많다는 걸 말하기는 했다. * 약간 [[옥시덴탈리즘]]이 있는 것 같다. 서구의 [[마돈나]]나 [[엠마 왓슨]] 같은 [[페미니즘]], 기타 [[인권]] 운동 활동가들이 중국을 비난하자 반 관영 언론사 [[환구시보]]를 통해 "중국 [[여성]]에 비해 금방 늙고 [[아줌마]] 되는 [[백인]] 여성들이 한물 가자 뒤늦게 [[히스테리]] 한풀이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다만 상기되어있듯 환구시보는 완전히 중공과 일치하는 견해만 보이는 [[신문사]]는 아니긴 하다. 중공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인종주의]], [[성차별]]을 배척한다. 중공의 위선자적 면모 혹은 [[환구시보]]가 얼마나 저질스러운지 알 수 있는 한 대목이다. * 독재 국가지만, 의외라면 의외로 중국에서도 [[시위]]는 한다. 특히 중공을 지지하던 상당수 젊은 세대들이 [[코로나]] 시국을 거치며 봉쇄 정책 등에 꽤나 불만이 쌓인 것으로 보이는데, 때문에 중공 당국도 고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https://www.youtube.com/watch?v=tmQKRUzQoR4|#]] * [[한족]]이 주류를 이루는 중국이지만, 많은 [[소수민족]]을 품어야 하는 중공의 특성상 [[대한족주의]]는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론 일단 내세우고 싶어도 내세울 수가 없다. 당장 마오쩌둥도 집권 당시 당내에 퍼져있던 대한족주의를 경계하며 [[프롤레타리아]] 민족정책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덕분인지 그 엄혹한 시절에도 의외로 소수민족들은 한족에 비해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독립/분리운동하던 세력한테는 가차없었지만. * 2022년 1월부터 [[https://endccp.com/ko/|중국공산당 해산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분청,version=288)] == 관련 [[문서]] == * [[동방홍]] *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 * [[우마오당]] *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 [[중국공산당 규약]] * [[중국공산당의 파벌]] * [[중국 마오쩌둥주의 공산당]] * [[죽의 장막]] * [[초한전]] * [[흑묘백묘론]] * [[화웨이]], [[ZTE]] - 사실상 중국공산당 산하기업이다. * [[중국 인민해방군]]: 형식상 중국의 [[국군]]이 아니라 [[당군|중국공산당의 군대]]이다. * [[파이브 아이즈]] -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 [[중화민국|민국]] 시기 === * [[신청년]](1921~1927)[* [[잡지]] 자체는 [[1915년]]부터 발간했다.] * 1차 [[국공합작]](1924)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1925) * [[중산함 사건]](1926) *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1927) * [[난징사건]](1927) * [[4.12 상하이 쿠데타]](1927) * [[4.15 광저우 쿠데타]](1927) * [[마일사변]](1927) * [[국공결렬]](1927) * [[난창 폭동]](1927) * [[8.7 긴급회의]](1927) * [[추수폭동]](1927) * [[정강산 투쟁]](1927~1929) * [[창사 폭동]](1930) * [[부전사변]](1930~1932) * [[초공작전]] * [[제1차 초공작전]](1930~1931) * [[제2차 초공작전]](1931) * [[제3차 초공작전]](1931)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제5차 초공작전]](1933~1934) * [[만주사변]](1931)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 * [[열하사변]](1933) * [[복건사변]](1933) * [[대장정]](1934~1936)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 * [[서안 사건]](1936) * 2차 [[국공합작]](1936) * [[중일전쟁]](1937~1945) * [[평형관 전투]] * [[백단대전]] * [[환남사변]] * [[쌍십협정]] * [[국공내전]](1946~1949) === [[건국]] 이후 === * [[삼반오반운동]] * [[반우파 투쟁]] * [[대약진 운동]] * [[문화대혁명]] * [[천안문 사태]]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 * [[우마오당]] * [[인민대회당]] [[분류:중국공산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