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현재 대한민국 내 영국의 외교공관, rd1=주한영국대사관)] [include(틀: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include(틀:한영관계)] ||<-3> [[파일:대한제국 국장.svg|width=28]] '''[[틀: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ffd800 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 ||<-3> [[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width=9%]] [br] {{{#fff '''{{{+1 주한영국공사관}}}[br]駐韓英國公使館 | The British Legation in Korea[* 공사관은 영어로 Legation이라고 하며, 공사는 Minister라고 한다.]'''}}} || ||<-2><#fff,#12121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국 국기.svg|width=100%]]}}} ||<#fff,#12121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width=40%]]}}} || ||<-2><#c8102e> {{{#fff '''국기'''}}} ||<#c8102e> {{{#fff '''국장'''}}}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주한영국대사관, 너비=100%, 높이=100%)]}}} || || '''위치''' ||<-2> '''[[서울특별시]] [[중구(서울특별시)|중구]] 세종대로19길 24''' || || '''상급기관''' ||<-2> '''영국 외무부''' || || '''영사관 설립''' ||<-2> '''[[1884년]]''' || || '''공사관 승격''' ||<-2> '''[[1898년]]''' || || '''공사관 폐쇄''' ||<-2> '''[[1905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구한말 영국공사관.png|width=100%]]}}} || || {{{#fff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영국 공사관 모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s.wikimapia.org/70_big.jpg|width=100%]]}}} || || {{{#fff '''영국공사관의 현재 모습[* [[http://photos.wikimapia.org/p/00/01/68/32/70_big.jpg|사진 출처.]]]'''}}}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위치한 [[영국]]의 옛 [[공사관]]이다. 1957년에 [[대사관]]으로 승격되면서 현재는 [[주한영국대사관]]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위치와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때 지은 건물말고도 현대에 새로 지은 건물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이는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서양 국가들 중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은 장소 및 건물을 [[외교공관]]으로 사용한 유일한 사례이다.[* [[주한미국공사관|구 미국공사관]] 부지도 현재 [[주한미국대사관]] 측에서 사용 중이나 대사관이 아닌 대사관저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오롯이 조선 말기와 같은 용도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미국대사관저는 한옥이며 그나마도 현재는 새 한옥 [[하비브 하우스]]를 지어 입주했다. 근대에 지은 양관을 현재까지 사용하는 건 영국대사관 뿐이다.] == 역사 == 1883년([[고종(대한제국)|고종]] 20년) 11월에 [[조선]]과 [[영국]]은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다음해 4월에 비준서를 교환하여 [[한영관계#s-2.1.1|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영국은 [[거문도]]를 무단으로 2년간 점령했었는데 이 거문도 문제 해결 및 개방 정책의 일환으로 수교한 것이다. 영국은 곧바로 [[한성부|한성]]에 [[영사관|총영사관]]을 두었다. 이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한성부|한성]]에 설치한 [[서양]] 외교공관이었다. 그러나 조약이 비준되기도 전에 부지 선정 작업을 신속히 시작했으며 이는 미국보다 앞선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국제정세와 관련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러시아]]를 [[그레이트 게임|견제하기 위해]] 조선의 정세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에 따라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즉시 최대한 빨리 상주 공관을 두려고 했던 것이다.[* 한승훈 著, 《1882~1884년 영국의 공사관 부지 선정과 매입을 둘러싼 외교교섭》, 서울역사편찬원, 2018, p.87.]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옥 영국공사관.png|width=100%]]}}} || || {{{#fff '''한옥 영국공사관[* [[https://blog.naver.com/ohyh45/20147859018|사진 출처.]]]'''}}} || [[한성부|한성]] 내 여러 곳을 알아본 끝에 [[영국]] 측에서는 1883년(고종 20년) 4월에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있는 [[신헌]][*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대표였으며 [[경복궁 경회루]]의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다.] - 신정희 부자가 살던 [[한옥]]에 공관을 두려했다. 그런데 정작 집주인이 한성에 없는 관계로(...) 매매는 이듬해에 했다. 신정희는 [[임오군란]] 당시 도성과 궁궐을 지키던 어영대장이었는데 난을 진압하는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유배갔고 그래서 신헌도 한성 밖으로 떠나있었기 때문이다.[* 한승훈 著, 《1882~1884년 영국의 공사관 부지 선정과 매입을 둘러싼 외교교섭》, 서울역사편찬원, 2018, p.106.] 나중에 신헌 부자와 접촉을 하긴 했으나 그들은 공식적인 정부 허가 없이는 매매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영국 측에서는 확실하게 부지를 선점하기 위해 [[김옥균]]과 외아문 독판[* 외아문은 조선 말기에 외교와 통상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이고 독판은 최고 책임자를 말한다.] 민영목에게서 부지 선점 약속을 받아내고, 민영목의 후임으로 외아문 독판이 된 [[김병시]]에게 문제 해결을 바란다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김병시는 [[한성부]]의 중재로 계약을 처리해 줄 것을 약속했다.[* 한승훈 著, 《1882~1884년 영국의 공사관 부지 선정과 매입을 둘러싼 외교교섭》, 서울역사편찬원, 2018, p.107.] 우여곡절 끝에 영국 측은 1884년(고종 21년) 5월에 신헌 부자의 가옥을 사들이고 그곳에 총영사관을 차렸다. 그러나 [[서양인]]들에게 한옥 생활은 매우 낯설고 불편했으므로 새로 양옥을 짓기로 했다. 1889년([[고종(대한제국)|고종]] 26년) 1월에 상하이 건설국[* 영국 건설부 소속 조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국 외교공관의 건설, 유지, 관리를 책임지던 기구였다.] 책임건축가였던 F.J. 마셜이 예비 설계도를 만들어 영국 외무부로 보냈고, 그것을 바탕으로 건축 디자인을 설계했으며 건립 과정 전반은 당시 총영사였던 월터 힐리어[* Walter C. Hillier. 1889년(고종 26년) 5월부터 1896년([[건양]] 원년) 10월까지 약 7년 간 재임했다.]가 총괄주도했다. 그러나 자재 확보에 시간이 걸리는 등의 이유로 착공이 늦어지다가 1890년(고종 27년) 5월에 드디어 [[한옥]]을 철거하고 서양식 건물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해 7월 19일에 힐리어 총영사의 부인이 정초석을 놓았으며, 그 사실은 현재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정초석에 새겨져있다. [[https://jemulpoclub.com/Notice/?q=YToyOntzOjQ6InBhZ2UiO2k6MT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3815700&t=board&category=oO2H4T5M29|#]]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구한말 영국공사관2.png|width=100%]]}}} || || {{{#fff '''완공 후 영국공사관'''}}} || 1호관은 1891년([[고종(대한제국)|고종]] 28년), 2호관은 1892년(고종 29년)에 완공했다. 1호관은 총영사를 위한 곳으로 1층은 사무실, 응접실, 접견실, 식당, 서재 등 주로 공적인 공간이었으며 2층은 목욕탕과 침실 4개 등 사적인 공간이었다. 여기에 주방과 하인들의 숙소 용도로 세운 부속건물이 별도로 있었다. 2호관은 1호관보다는 작은 규모였으며, 각 층의 용도는 1호관과 비슷했다.[* 1호관의 침실 개수는 4개였으나 2호관의 침실 개수는 3개였다.][[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71001760001|#]] 완공된 영국총영사관 건물은 당시 서양식 고층 건물이 거의 없었던 [[한성부|한성]]의 풍광을 상당히 이채롭게 만들었다. 그 무렵 한성을 찾았던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총영사관 건물에 대해 꽤 인상깊게 느꼈던 모양이다. 완공 당시 영국총영사관을 찾았던 영국군 대위 카벤디시는 자신의 저서 《조선과 신성한 백두산》에 자신의 느낌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 >(전략) 우리는 극동 지역의 영국식 관공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통상적인 취향에 따라 설계된 새 총영사관을 방문했다. 총영사관 건물은 약간 도드라진 언덕 위에 서 있으며, 방들의 규모와 배치에 관한 한 내부는 흡족한 정도이다. 사무공간들은 이곳과는 테라스와 테니스 잔디구장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경사면에서 조금 더 내려간 곳에 위치했다. 열정적인 식물학자이기도 한 힐리어 총영사는 작은 온실에다 숱한 수목과 화초를 키우고 있으며, 상당한 취향과 정성으로 정원을 꾸며놓았다. (중략) 모여 있는 한옥으로 이루어진 원래 영사관 건물들은 새 건물을 지으면서 철거되었으며, 지금은 이곳이 정원으로 바뀌었다. 영사관 구역 바로 곁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한 넓은 정원이 있는데, 이곳은 [[명성황후|왕비]]의 재산이었으나 아무 것도 그가 이곳을 영국 정부에 내놓도록 하지는 못했다. (후략)[[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71001760001|#]] >---- >카벤디시, 《조선과 신성한 백두산》 또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자신의 저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길폭이 차차 넓어지면서 우리는 [[서울 한양도성|서울의 성벽]]에 도착했다. 굴곡이 깊은 이중 지붕을 가진 [[숭례문|성문(숭례문)]]이 있는 매우 높은 성벽을 통과하여 10여 분간 더 추저분한 길을 걸으니 산들바람 부는 언덕이 나타났다. 그 언덕 위에 눈에 확 띄는 영국영사관의 붉은 벽돌건물이 있었다. (후략)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譯,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영국 정부에서는 [[대한제국]] 수립 후인 1898년([[광무]] 2년) 2월에 영국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다.[[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6&content_id=cp071001760001&search_left_menu=3|#]]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nglo-Japanese_Alliance_002.jpg|width=100%]]}}} || || '''{{{#fff 일본}}} [[미츠코시 이세탄|{{{#fff 미쓰코시 오복점}}}]]{{{#fff 에서 제작한 영일동맹 기념엽서.[* 왼쪽의 영국 소녀는 일본 황실의 꽃인 [[국화]](菊花)를 들고 있고, 오른쪽의 일본 소녀는 잉글랜드의 국화인 [[장미]]를 들고 있다. 참고로 일본은 정해진 국화(國花)가 없고, 영국도 연합왕국 차원에서 정해진 국화가 없다.]}}}''' ||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본 제국|일제]]가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국교]]가 끊겼다. 사실 영국은 이미 그 전에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시적으로 인정한 상태였다. 영국공사관은 다시 [[영사관|총영사관]]이 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wG1IgthRlU)]}}} || || {{{#fff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이전했던 영국 공사관 터 확인을 다룬 연합뉴스TV 영상'''}}} || [[8.15 광복]] 이후인 1949년에 [[대한민국]]과 [[영국]]은 [[한영관계|외교관계]]를 재개했으며 영국 정부는 서울에 다시 공사관을 설치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사관은 부산으로 잠시 이전했고[[https://www.bsseogu.go.kr/tour/index.bsseogu?menuCd=DOM_000000301004020000|#]] 휴전 후 서울로 복귀했다.[* 단 당시 공사였던 비비언 홀트는 전쟁 초에 [[서울특별시|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혀 3년이나 억류당했다가 1953년 4월에서야 다른 민간인 포로들과 함께 풀려났다.] 1957년에는 영국 정부에서 최고위급 한국 주재 외교관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고 이에 공사관도 대사관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이후 내용은 [[주한영국대사관]] 문서 참조. == 건물 == * 1호관은 19세기 빅토리아 양식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건축 양식을 혼합한 형태로 평가받는다.[[https://www.ohseoul.org/2019/programs/%EC%98%81%EA%B5%AD%EB%8C%80%EC%82%AC%EA%B4%80/event/145|#]] 컨트리하우스 형태에 청나라 양식과 르네상스 빌라의 구성을 더했다고 보기도 하는데[[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55923|#]], 어떤 해석으로든 동, 서양의 건축이 섞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 붉은 [[벽돌]]과 회색 전돌을 쌓아 건물을 지었다. 정면 지붕에는 삼각형 모양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으며 페디먼트 가운데에 둥근 환풍구를 설치했다. 전면 칸 사이마다 [[아치(건축)|아치]]를 설치했으며 아치 하단에 난간을 설치했다. 1층의 아치는 한 칸에 하나인 반면, 2층의 아치는 한 칸에 2개이며 두 아치가 중앙에서 만나는 부분의 하단에는 돌기둥을 두었다. 아치 안으로는 [[베란다]]가 있다. == 여담 == * 이견이 있지만, 영국공사관 자리가 [[조선]] 초 [[태조(조선)|태조]] 시기에 [[신덕왕후]]의 [[정릉(서울 성북)|정릉]]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정동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다만, 능 자체는 1410년(태종 10년)에 [[태종(조선)|태종]]이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켰다.] *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본 제국|일제]] 침략을 비판하던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이 일제의 공작으로 인해 영국 사법당국에게서 재판을 받았던 곳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news20.busan.com/20091113000145_0.jpg|width=100%]]}}} || || {{{#fff '''영국공사관 옆에 있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http://news20.busan.com/content/image/2009/11/13/20091113000145_0.jpg|사진 출처 - 《부산일보》.]]]'''}}} || 바로 옆에 [[서울주교좌성당]]이 있다. 애당초 성당이 이곳에 자리잡은 이유가 영국공사관 옆이기 때문이다. * 1912년 7월 23일 자 《[[매일신보]]》기사에 따르면, 그달 18일 오후 1시에 [[덕수궁 준명당]] 후원의 [[느티나무]]가 쓰러지면서 준명당 뒤편에 자리하던 [[주한영국공사관|영국총영사관]]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 1933년 12월 15일 자 《[[조선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국총영사관에서 [[이왕직]][* 李王職.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이왕가]](구 [[대한제국 황실]])의 의전 및 관련 사무 담당을 위해 설치한 기구.]에 ‘[[덕수궁 석조전|석조전]] 2층에서 자신들의 공사관이 내려다보인다’며 항의했다고 한다. 그 무렵 [[일본 제국|일제]]가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방하여 일반인들이 자연스레 석조전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석조전 뒤편과 영국총영사관은 바로 마주보는 위치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자신들의 외교공관이 노출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현재 [[주한영국대사관]]과 덕수궁 사이에는 나무가 대량으로 심어져있어 덕수궁에서 영국대사관을 바로보기 힘들다. == 같이보기 == * [[주한영국대사관]] * [[영국문화원]]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한영관계]]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주한영국대사관, version=56, title2=영일동맹, version2=154, title3=덕수궁 준명당, version3=76)] [[분류:한영관계]][[분류:영국의 외교]][[분류:외교공관]][[분류:관저]][[분류:중구(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