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명 추존 황제)] ||<-2><:>{{{#!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38F00 0%, #F0C420 20%, #F0C420 80%, #B38F00)" '''{{{#800000 명 추존 황제}}}'''[br]{{{#800000 {{{+1 '''睿宗 獻皇帝 | 예종 헌황제'''}}}}}}}}}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34px-明興獻王坐像_軸_(1).jpg|width=100%]]}}}|| || '''[[묘호|{{{#800000 묘호}}}]]''' ||<(>[[예종]](睿宗) || || '''[[시호|{{{#800000 시호}}}]]''' ||<(>지천수도홍덕연인관목순성공검경문헌황제[br](知天守道洪德淵仁寬穆純聖恭儉敬文獻皇帝) || || '''[[성씨|{{{#800000 성}}}]]''' ||<(>주(朱) || || '''[[휘|{{{#800000 휘}}}]]''' ||<(>우원(祐杬) || || '''{{{#800000 부황}}}''' ||<(>[[성화제]] || || '''{{{#800000 모후}}}''' ||<(>[[효혜황후 소씨]] || || '''{{{#800000 황후}}}''' ||<(>자효헌황후(慈孝獻皇后) || || '''{{{#800000 생몰}}}''' ||<(>1476년 ~ 1519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명나라]]의 추존 황제로, 제11대 황제인 [[가정제]]의 부친이자, 제8대 황제였던 [[성화제]]의 넷째 아들로, 제9대 황제인 [[홍치제]]의 이복동생이다. == 생애 == 주우원은 본래 성화제와 [[효혜황후 소씨]](邵氏)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주우원은 성화제에 의해 1487년 흥왕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주우원은 무종 정덕 14년(1519년)에 사망하여, 흥헌왕(興憲王)으로 추시되었다. == 추존 논쟁 == 주우원이 죽고 2년 뒤 제10대 황제였던 [[정덕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정덕제 사후 주우원의 아들이었던 주후총에게 제위를 잇게 하였는데, 이가 바로 제11대 황제인 가정제이다. 가정제의 즉위 직후 추존 논쟁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대례의 의' 논쟁이었다. 주우원의 추숭 논쟁이 주된 논쟁이었는데, 양정화를 비롯한 관료들은 홍치제를 양부로 모셔서 황고(皇考)로 칭하고, 친부인 주우원은 황숙부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가정제는 친아버지인 주우원을 황고로, 홍치제를 황백부로 칭해야 한다고 맞서며 논쟁이 벌어졌다.[* 쉬운말로 풀이하면 관료들은 앞으로 실제로는 삼촌인 홍치제를 아버지로 부르고, 친아버지인 주우원을 삼촌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지만 세종은 친아버지인 주우원을 끝까지 아버지로 부르고, 홍치제를 큰 삼촌으로 부르겠다고 맞선것이다.] 결국 황제의 의견이 관철되어, 주우원은 헌황제(獻皇帝)로 추존되었다. 주우원의 무덤은 현릉(顯陵)으로 칭해졌고,[* 난징에 안장된 [[홍무제]]의 효릉을 제외한 나머지 명 황제들의 능은 모두 베이징에 위치하지만, 가정제에 의해 추존된 주우원의 능은 봉지였던 안륙주에 가까운 지역에 안장된 것을 황제 추존 후에도 이장하지 않고 본래의 장지에 그대로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후베이 성]] [[중샹 시]]에 따로 있다. 여담으로 증손인 [[만력제]] 시절 진봉이라는 환관이 주변 무덤을 도굴하다가 같이 도굴한게 걸려서 극형을 받은 일이 있다.] 세종에 의해 헌황제실록이 편찬된다. 주우원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양정화 등은 익왕[* [[성화제]]의 6남이자 주우원 및 [[홍치제]]의 이복동생. 이름은 주우빈(朱祐檳). 사후 단(端)의 시호를 받아 익단왕(益端王)이 되었다.]의 차남인 주후현을 흥왕으로 책봉할 것을 논의했으나 황제가 윤허하지 않았고, 결국 흥국(興國)은 단절되었다. 이후 주우원은 지천수도홍덕연인관목순성공검경문헌황제(知天守道洪德淵仁寬穆純聖恭儉敬文獻皇帝)로 추시되었고 묘호는 예종(睿宗)으로 정해진다. 주우원의 부인인 흥왕대비 장씨(蔣氏)는 세종 재위기인 1538년까지 태후로 재위했으며, 사후 자효정순인경성일안천탄성헌황후(慈孝貞順仁敬誠一安天誕聖獻皇后)로 추시되었고 주우원의 무덤인 현릉에 합장되었다. 대례의 의는 명나라 이전 [[북송]]에서 벌어진 [[조윤양]]의 추존 논쟁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차이점이라면, 조윤양의 추존 논쟁이 조윤양의 친아들이었던 [[영종(북송)|영종]]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된 반면, 주우원의 추존 논쟁은 결국 세종의 의견이 관철되어 주우원이 황제로 추존된 점이었다. 대례의 의는 후대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그 양상이 바로 [[조선]]의 제16대 국왕이었던 [[인조]]의 [[정원군|정원대원군]](원종) 추존 논쟁과도 매우 비슷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명사)] [include(틀:명의 황자)] [[분류:명나라의 추존 황제]][[분류:1476년 출생]][[분류:1519년 사망]][[분류:베이징시 출신 인물]][[분류:서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