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인물의 이름을 딴 밀라노의 축구 경기장, rd1=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ffffff '''주세페 메아차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folding ▼ ||<-4> {{{#333333,#cccccc '''둘러보기 틀 모음'''}}} || || {{{#333333,#cccccc '''클럽'''}}} || || [[틀: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감독(1대~40대)|[[파일: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엠블럼(2014~2021).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1072BA; font-size: 0.9em;" [[틀: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감독(1대~40대)|{{{#000000,#e5e5e5 '''인테르'''}}}]]}}}[br]{{{-2 19대, 26대, 29대}}} || ---- ||<-5> '''{{{#ffffff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주장}}}''' || || 레오폴도 콘티 [br](1922~1931) || {{{+1 →}}} || '''{{{#ffffff 주세페 메아차}}}'''[br]'''{{{#ffffff (1931~1940)}}}''' || {{{+1 →}}} || [[아틸리오 데마리아]][br](1940~1943) || ---- ||<-5> '''{{{#fff AC 밀란 역대 주장}}}''' || || 브루노 아르카리[br](1940~1941) || {{{+1 →}}} || '''{{{#fff 주세페 메아차}}}'''[br]'''{{{#fff (1941~1942)}}}''' || {{{+1 →}}} || 주세페 안토니니[br](1942~1944) || ---- ||<-5> '''{{{#ffffff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루이지 알레만디]][br](1935~1936) || {{{+1 →}}} || '''{{{#113ed7 주세페 메아차[br](1937~1939)}}}''' ||{{{+1 →}}} || [[실비오 피올라]][br] (1940~1947)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ffffff '''주세페 메아차의 수상 이력'''}}}}}} || || {{{#!folding ▼ ||<-2>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9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fff 1934}}}]]'''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9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fff 1938}}}]]''' }}}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ffffff '''주세페 메아차의 기타 정보'''}}}}}} || || {{{#!folding ▼ [include(틀: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명예의 전당)]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rgba(50%, 50%, 50%, 30%) 0%, transparent)" {{{+1 {{{#000000,#e5e5e5 '''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dn.bleacherreport.net/Giuseppe_meazza_1937_display_image.jpg|width=100%]]}}} || ||<-2> {{{#000000,#e5e5e5 ''' 이름 ''' }}} || {{{+1 '''주세페 메아차'''}}}[br]'''Giuseppe Meazza''' || ||<-2> {{{#000000,#e5e5e5 ''' 출생 ''' }}} ||[[1910년]] [[8월 23일]] / [br] {{{-1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28]]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롬바르디아주]] [[밀라노|밀라노광역시]]}}} || ||<-2> {{{#000000,#e5e5e5 ''' 사망 ''' }}} ||[[1979년]] [[8월 21일]] (향년 68세) / [br] {{{-1 [[이탈리아]] [[롬바르디아|롬바르디아주]] 몬차에브리안차현 리소네}}} || ||<-2> {{{#000000,#e5e5e5 ''' 국적 ''' }}} ||[include(틀:국기, 국명=이탈리아)] || ||<-2> {{{#000000,#e5e5e5 ''' 신체 ''' }}} ||[[키(신체)|키]] 169cm | [[체중]] 73kg || ||<-2> {{{#000000,#e5e5e5 ''' 직업 ''' }}} ||[[축구선수]] ([[공격수]][* [[인사이드 라이트]]] / ^^은퇴^^)[br][[축구감독]] ^^은퇴^^ || ||<|2> {{{#000000,#e5e5e5 ''' 소속 ''' }}} || {{{#000000,#e5e5e5 ''' 선수 '''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나치오날레]] (1927~1940)'''[br][[AC 밀란]] (1940~1942)[br][[유벤투스 FC]] (1942~1943)[br][[바레세 칼초|AS 바레세]] (1943~1944)[br][[아탈란타 BC]] (1944~1946)[br][[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나치오날레]] (1946~1947) || || {{{#000000,#e5e5e5 ''' 감독 ''' }}} ||{{{-1 [[아탈란타 BC]] (1945~1946 / ^^선수 겸 감독^^)}}}[br]{{{-1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나치오날레]] (1946~1948 / ^^선수 겸 감독^^)}}}[br][[베식타스 JK]] (1949)[br]프로 파르티아 (1949~1951)[br][[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올림픽 대표팀]] (1952~1953)[br][[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나치오날레]] (1955~1956)[br][[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나치오날레]] (1957) || ||<-2> {{{#000000,#e5e5e5 ''' 국가대표 '''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width=20]]]] 53경기 33골[* 대표팀 역대 득점 2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 1930~1939)^^ || ||<-3> '''정보 더 보기'''[br]{{{#!folding [ 펼치기 · 접기 ] || {{{#000000,#e5e5e5 ''' 등번호 '''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역대 최고 선수로 손꼽힘에도 결번처리가 되지 않은 이유이다.] || }}} || [목차] [clearfix] == 개요 == ## 현 나무위키 편집지침에서 상단 요약문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한 축구선수 개요문단 선수 비교 및 서열 서술(ex: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21세기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등)은 금지된 상태입니다. 볼드체 사용하지 마세요. 또 개요부분에는 간략한 설명만 해주세요.## [youtube(xUgoQkG34Es)] >'''내 트릭을 이해 못하는 [[골키퍼]]들에게 [[페널티킥]]을 막히는 것이 최악의 수치이다.'''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 [[1957년]]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감독을 맡았다. 1930년대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테르]] 소속으로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국가대표팀에서도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1934년, 1938년 월드컵에서 2연패를 이끈 선수이다. == 생애 == === 유년기 === 주세페 메아차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였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며 어린 메아차를 키웠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지만 메아차가 축구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던 메아차의 어머니는 그의 축구화를 매일 감췄다. 그러자 메아차는 길거리에 나가 맨발로 축구하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처음 어린 메아차가 동경하던 클럽은 [[AC 밀란]]이었다. 그리고 13살 되던 해 메아차는 AC 밀란에서 뛰고 싶다고 찾아갔지만 AC 밀란은 제 발로 찾아온 메아차를 말랐다는 이유로 내쳤다. 그 이후에도 계속 맨발로 볼을 다루던 그를 같은 연고지를 두던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주목했다. 길거리에서 맨발로 공을 다루던 그의 기술에 꽂힌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스카우트는 구단에 그를 영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구단 측에서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인테르나치오날레 소속의 선수가 되었다. === 선수 경력 === ==== 클럽 경력 ==== 메아차는 곧바로 재능을 보였고 17살에 처음으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1군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그를 팀에서는 썩 내켜하지 않았었고, 이 때 그의 별명인 발릴라[* 원래는 테이블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가 붙었다. 이 별명을 붙인 사람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선배였던 [[레오폴도 콘티]].[*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소속으로 300경기나 출전한 스타 스트라이커였다. [[1924 파리 올림픽|1924년 올림픽]]에도 나간 경력이 있다.] 콘티는 어린 메아차가 마음에 안 들었고 "이제 우리 팀이 [[유치원]]이 되는군."이라는 식으로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정부]]에서 [[파시스트]] 선전용으로 밀어주던 발릴라란 [[오페라]]가 있었는데 그것은 8살에서 14살의 소년들이 공연하던 것이었던 터라 콘티는 그것을 이용해서 비아냥거렸고, 그의 별명이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별명인 페피노도 콘티가 붙인 것이다. 즉, 메아차의 유명한 2개 별명은 둘 다 콘티가 붙여준 것.] 하지만 메아차는 데뷔 시즌에만 12골을 넣음으로서 실력으로 의문부호를 떼었고, [[세리에 A]]의 창설 시즌인 1929년[* 이탈리아 정부의 정책에 의해 이 당시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암브로지아나 인테르로 이름이 바뀌었다.]에는 33경기에 출전 31골을 넣어 '''세리에 A 최연소 득점왕'''의 기록을 세웠다. 이 때 메아차의 나이 19살.[* 하지만 최연소 득점왕 기록은 3년 후 유벤투스의 신예 공격수 [[펠리체 보렐]]이 가져가 버렸다.] 베네치아와의 경기에서 10대2로 이길 때에는 6골을 집어넣기도 하였고, [[AS 로마]]와의 경기에서는 3분 만에 [[해트 트릭]]을 달성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해당 경기에서 메아차는 4골을 기록했다.] 이 활약으로 메아차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대표팀]]의 파란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국가대표 팀에서도 전설을 써내려갔다. 메아차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이후 부상 때문에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했고, 1940년 11월 28일,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AC 밀란]] 소속으로 뛰던 첫 [[밀란 더비]] 당시 메아차는 라커룸에서 울었다고.. 그리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AC 밀란의 앙금을 희석시키려 노력한 거의 유일한 선수라고 알려져 있다. 2년간의 평범한 활약을 뒤로 하고 [[유벤투스 FC]]로 이적한[* [[FC 인테르나치오날레|세리에 A]] [[AC 밀란|3대]] [[유벤투스 FC|명문]]을 최초로 뛰어본 선수가 바로 메아차다.] 그는 이후 바레세, 아탈란타 등을 떠돌다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플레잉 코치로 은퇴했다. 그는 마지막 시즌에 17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넣었는데 이 두 골이 아니었으면 인테르나치오날레는 강등당했을 것이다.[* 순위는 10위지만 강등 턱밑인 17위와의 승점차가 4점밖에 나지 않았다.] 그는 인테르에서 총 284골을 넣었는데 이 기록은 70년이 넘는 시간동안 깨지지 않고 있는 인테르의 역대 최다 득점자 기록이다.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경력 ==== =====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 1930년 2월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메아차는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와의 데뷔전에서 2골을 넣어버렸고, 3달 후의 헝가리 원정에서는 아예 해트 트릭을 기록하여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월드컵 직전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의 기세에 눌려 유럽 최강의 칭호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1934년 2월에 [[토리노]]에서 있었던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에이스 공격수 [[마티아스 신델라]]가 빠진 오스트리아에게 4대2로 패함으로써 월드컵 우승도전에 찬물이 제대로 끼얹어진 상황이었다. 반면 이탈리아는 주세페 메아차, [[잔피에로 콤비]],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루이스 몬티]], [[비르지니오 로세타]] 등을 내세워 [[총력전]]을 펼쳤지만 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해결된 문제기는 하지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유벤투스 FC]] 선수들 사이의 [[지역감정]] 문제도 있었다. 처음 메아차는 자신을 은근히 깔보던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콤비와의 내기[* 자신의 기술이 통하는지의 여부로 내기를 했다.]를 통해 사이를 회복시켰다. 처음에는 메아차를 무시하던 콤비도 차츰 메아차를 인정했고 이렇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출신의 주전 공격수와 [[유벤투스 FC]] 출신의 주전 골키퍼의 사이가 좋아지니 팀의 지역감정 문제는 자연스럽게 완화되었다. 하지만 첫 경기에서 만난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은 이탈리아가 7대1로 압살했다[* 이 경기는 역대 월드컵 사상 최다 득점 개막전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2위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84년 후 열린]]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개막전에서 개최국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5:0으로 압승했던 2018년 대회이다.]. 다음 상대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을 이기고 올라온 스페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1차전에서는 [[리카르도 사모라]]의 신들린 선방으로 [[조반니 페라리]]의 한 골[* 하지만 이 골은 반칙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에 그쳐 1대1로 비겼고, 2차전에서야 메아차의 결승골로 1대0으로 승리를 거두어 4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다음 4강전의 상대는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 월드컵이 열리기 3달전에 이탈리아에게 공개 망신을 주었던 그 팀이었다. 이번에는 신델라까지 참가하여 이탈리아를 [[GG|확실히 보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망신당했던 기억을 갚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결과는 이탈리아의 승리.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엔리코 구아이타]]의 골로 1대0 승리를 거두어 3달전의 망신을 갚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결승전의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공수 밸런스가 좋은 팀으로 콤비, 사모라 등과 함께 유럽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놓고 다투던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를 축으로 한 수비진과 [[올드르지흐 네예들리]]가 버티고 있는 공격진 역시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경기 자체는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메아차가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었기 때문에[* 구아이타가 결승골을 넣을 때 메아차가 오스트리아 골키퍼와 충돌하면서 공이 흘렀고 이것을 구아이타가 놓치지 않고 넣은 것이다. 메아차는 이 때 부상을 당했다.] 이탈리아의 공격에는 다소 날카로움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결승전 후반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푸치|푸치]]에게 선제골을 내주자 이탈리아의 관중들은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응원구호였던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는 아예 '''"죽어라"'''로 바뀌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라이문도 오르시]]의 기적 같은 동점골이 터져 연장전에 들어갔고 메아차->구아이타-> 스키아비오의 결승골로 이어지는 기점도르 역할을 했고 이탈리아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골든볼을 받았다고 알려졌으나 정작 피파 공홈과 RSSSF에서는 1982년 이후 골든볼 기록만 인정되었지 그 이전은 나오지도 않았다. 다만 1998년 아르헨티나 최대 언론인 클라린에서 선정한 역대 월드컵 MVP에 1934년 수상자로 선정된 바는 있다. 자세한 내용은 월드컵/수상 문서 참고. 그리고 계속된 국가대표팀에서의 득점 행진으로 메아차는 국가대표팀에 데뷔한지 4년만인 1934년 12월. 25골로 [[아돌포 발론체리]]의 종전 득점 기록을 돌파하였다.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프랑스 월드컵]] ===== 1931년 이후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주장이 된 메아차는 1938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주장이 되어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역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우승이 아니면 죽음을!!"''' 4강전에서 이탈리아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과 맞붙었고 브라질의 수비수 [[도밍구스 다기아]]의 파울로 [[페널티 킥]]을 얻은 이탈리아. 키커로는 메아차가 나섰다. 하지만 킥을 하려고 달려오는 순간 메아차의 바지 고무줄이 끊어져 버렸고 메아차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왼쪽으로 슈팅을 날렸다. 그리고 그 공은 마치 [[파넨카 킥]]처럼 천천히 날아갔고, 브라질 골키퍼 바우테르는 그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 페널티킥이 메아차의 마지막 A매치 득점이다.] || [[파일:1938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사로시와 악수하는 메아차.png|width=100%]] || || {{{#ffffff '''메아차 VS 사로시'''}}} || 결승전에서 [[샤로시 죄르지]]가 이끄는 헝가리를 만난 메아차는 [[실비오 피올라]] 등 신진 선수들을 잘 이끌고 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월드컵]] 2연패의 대기록에 기여했다. 메아차는 이탈리아에서 [[FIFA 월드컵|월드컵]] 2연패를 이룬 4명의 선수[* 메아차 외에는 [[조반니 페라리]], [[귀도 마제티]], [[에랄도 몬첼리오]]가 있다.] 중 한 명이 되었다. === 죽음 그리고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 1979년 메아차가 심장 혈관의 이상으로 사망하고 1980년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측은 [[AC 밀란]]과 합의해 그의 이름을 자신의 홈구장에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메아차가 [[AC 밀란]]에서 뛰긴 했지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 남긴 족적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크다보니 [[AC 밀란]] 구단 측에서는 구장이 있는 거리 이름인 산 시로를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현재 메아차의 무덤은 밀라노의 [[공동묘지]]에 있고 2004년에 지하로 이장되었다. == 플레이 스타일 == 기술이 매우 빼어난 선수로 알려져 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맨발로 [[축구]]를 연습하다보니 남들보다 순간적인 상황 판단력이 매우 빨랐다. 그가 주로 쓰던 기술이 바로 [[골키퍼]] 제끼기였으며[* 앞에서 이야기한 [[잔피에로 콤비]]와의 내기도 이를 기초로 했다. [[골키퍼]]가 각을 좁히기 위해서 메아차를 향해 나오면 그는 골키퍼를 피해 빈 골대로 유유히 달려가 골을 넣었다. 또는 골키퍼를 점프해서 뛰어넘는 기술을 이탈리아에서는 알라 메아차(alla Meazza) 또는 발명(a invito)이라고 부른다.] 예술적인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하프라인 근처에서 드리블해 들어와서 수비수들 벗기고 골을 넣는 것. 훌륭한 슈터이면서 터닝 능력도 매우 좋았고 양발로 뿌려주는 패스도 일품인데다 키는 보통이었지만 탄력도 좋아서 공중 볼에도 강했다고. == 기록 == === 대회 기록 ===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27~1940 / 1946~1947) * [[세리에 A]]: 1929-30, 1937-38, 1939-40 * [[코파 이탈리아]]: 1938-39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 * 중유럽 인터내셔널컵: 1927-30, 1933-35 === 개인 수상 === * [[세리에 A]] 득점왕: 1929-30, 1935-36, 1937-38 * [[미트로파컵]] 득점왕: 1930, 1933, 1936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 *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15 * 인터 밀란 명예의 전당: 2019 == 메아차에 대한 말말말 == >'''저는 [[펠레]]가 축구하는 것 역시 보았습니다만 메아차만큼 아름다운 플레이를 하지는 못했어요. 하루는 저는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는데 2미터 쯤 되는 높이[* 원문에는 2미터 쯤 뛰어올랐다고 되어있다.]에서 바이시클 킥 자세로 공을 받았죠. 그리고 그는 볼을 발에 붙인듯 착지했고, 놀라 자빠진 수비수를 드리블로 제낀 후 그의 특징적인 슈팅, 냉소적이고 정확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 ---- > 루이지 베로넬리([[이탈리아]]의 [[미식가]], [[와인]] 평론가)[* 출처는 [[http://www.archiviolastampa.it/component/option,com_lastampa/task,search/action,viewer/Itemid,3/page,0028/articleid,0332_01_2001_0222_0048_2907493|이곳]]] >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기술적인 선수들과 대등히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인]].''' > ---- > 잔니 브레라([[이탈리아]] [[축구]] 저널리스트) > '''위대한 선수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했다. 어쩌면 더 거칠고 그 이상의 선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발명, 훌륭한 슈팅, 위압적인 드리블과 도리에 벗어나지 않는 것, 모든 시대의 그의 잃어버린 희생자(골키퍼)에게 외로운 탈출구의 면모에서 우리가 그 위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 ---- > 잔니 브레라 > '''그는 가끔 강렬한 성적 에너지와 지나친 게임에 대한 열정 때문에 심한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훌륭하고 막을 수 없는 선수였다. 그리고 필드를 지배하면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 ---- > 페피노 프리스코([[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前 부회장) > '''페피노는 전술에 대한 것을 절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펠레]]와 비견될만한 기술로 페널티 박스 안에 들어가면 왕이 되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 ---- > 브루노 아르카리 Ⅳ[*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동료였던 [[피에트로 아르카리]]의 동생.](前 [[AC 밀란]] 선수, 코치) == 여담 == * 사생활면에서는 대단한 [[골초]]였고, [[카브리올레]]와 [[샴페인]], 그리고 여자를 무지하게 밝혔다고 한다. [[홍등가]]에 참 자주 들락거렸다고. * 메아차가 터키의 [[베식타스 JK]]로 건너간 것은 역대 최초의 이탈리아 코치의 해외 부임이다. * 그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코치로 있을 때 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7살 때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를 비행기 사고로 잃었다. 그 아이는 메아차에서 아버지의 향기를 느꼈는지 메아차의 기술에 큰 흥미를 보였고, 그것을 연습했다. 결국 메아차는 그 아이를 자신이 가르쳤고 결국 인테르나치오날레와 사인시키는데 성공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60년대 그란드 인테르의 최고 핵심 선수, '''[[산드로 마촐라]]'''이다.[* 설명을 덧붙인다면 산드로의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는 [[토리노 FC]]에 [[세리에 A]] [[연속우승|4연패]]를 토리노에 안겨 준 전설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5연패가 유력한 시점에서 '''[[수페르가의 비극]]'''이라 불리는 비행기 사고로 토리노의 성인팀 선수들이 전원 사망했고 마촐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드로 마촐라가 [[AC 밀란|라이벌 팀]]의 [[지아니 리베라|잔니 리베라]]와 더불어 6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는데, 발렌티노가 무사히 커리어를 끝마쳤다면 아들보다 더 위대한 선수로 이름을 남겼으리라는 평도 많이 있다.] * 1973년 [[루이지 리바]]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의 자신의 골 기록을 돌파하자 메아차는 리바의 골 기록은 [[키프로스 축구 국가대표팀|키프로스]]나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튀르키예]][[양민학살|같은 애들 상대로 넣은 골]]이라며 깠다. 그리고 메아차의 골 기록인 33골은 아직도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역대 2위 기록이다. [[분류:1910년 출생]][[분류:1927년 데뷔]][[분류:1947년 은퇴]][[분류:1979년 사망]][[분류:밀라노 출신 인물]][[분류:이탈리아의 축구선수]][[분류:이탈리아의 축구감독/은퇴·사망]][[분류: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분류:AC 밀란/은퇴, 이적]][[분류:유벤투스 FC/은퇴, 이적]][[분류:바레세 칼초/은퇴, 이적]][[분류:아탈란타 BC/은퇴, 이적]][[분류:아탈란타 BC/역대 감독]][[분류:선수 겸 감독/축구]][[분류: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역대 감독]][[분류:베식타스 JK/역대 감독]][[분류: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분류: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분류: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분류:FIFA 월드컵 우승 선수]][[분류:FIFA 월드컵 다회 우승 선수]][[분류: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명예의 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