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07년 출생]][[분류:1882년 사망]][[분류:이탈리아의 군인]][[분류:외국의 실향민]][[분류:이탈리아의 개신교 신자]][[분류:니스(프랑스) 출신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전함소녀의 캐릭터, rd1=주세페 가리발디(전함소녀), other2=벽람항로의 캐릭터, rd2=주세페 가리발디(벽람항로))] ||<-7><:> [[사르데냐 왕국|[[파일:사르데냐 왕국 국장(1848).svg|width=100]]]] || ||<-7><:> '''[[이탈리아 통일|{{{#ffffff 이탈리아 통일 삼걸}}}]]''' || ||<:> [[카밀로 카보우르|{{{#white 카밀로 카보우르}}}]] ||<:> {{{#000 '''주세페 가리발디'''}}} ||<:> [[주세페 마치니|{{{#white 주세페 마치니}}}]] || ---- ||<-2> '''{{{+1 주세페 가리발디}}}[br]Giuseppe Garibald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Giuseppe_Garibaldi_(1866).jpg|width=100%]]}}} || || '''본명''' ||주세페 마리아 가리발디[br]Giuseppe Maria Garibaldi|| ||<|2> '''출생''' ||1807년 7월 4일|| ||[[프랑스 제1제국]] [[니스]][* 현(現) [[프랑스|프랑스 공화국]]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니스]].]|| ||<|2> '''사망''' ||1882년 6월 2일 (향년 74세)|| ||[[이탈리아 왕국]] 카프레라[* 현(現) [[이탈리아|이탈리아 공화국]] 카프레라. [[사르데냐]]의 부속 섬이다.]|| || '''묘소''' ||[[이탈리아]] 카프레라 섬|| || '''국적'''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25]] [[이탈리아 왕국]]|| || '''직업''' ||혁명가, 군인, 정치인|| || '''정당''' ||[[청년 이탈리아당]] (1831~1848)[br][[이탈리아 국민협회]] (1848~1853)[br][[행동당(이탈리아 1853년)|행동당]] (1853~1867)[br][[역사적 좌파]] (1867~1877)[br][[역사적 극좌파]] (1877~1882)|| || '''배우자''' ||아니타 가리발디 ^^(1842년 결혼)^^[br]주세피나 라이몬디 ^^(1860년 결혼)^^[br]프란체스카 아르모시노 ^^(1880년 결혼)^^|| || '''자녀''' ||메노티 가리발디, 리치오테 가리발디 외 6명|| || '''종교''' ||[[개신교]][* 가리발디는 생전 [[반가톨릭]] 성향의 개신교도였다. (Joseph O'Brien, "[[https://www.sandiegoreader.com/news/2018/mar/22/excerpts-giuseppe-garibaldi-pope/|Giuseppe Garibaldi speaks against the Pope]]", 「San Diego Reader」, 2018.3.22. · "[[https://www.nndb.com/people/150/000089880/|Giuseppe Garibaldi]]", nndb.com)]|| || '''서명''' ||[[파일:Appletons'_Garibaldi_Giuseppe_signature.png|width=20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이자 [[혁명가]], [[군인]], [[정치인]].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카보우르]]와 더불어 이탈리아 통일 삼걸로 꼽힌다. 흔히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이탈리아 통일의 계획과 실행은 카밀로 카보우르가 주도했고, 가리발디의 업적은 통일의 최대 난적 중 하나였던 [[양시칠리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조건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양도한 것이다. 카보우르가 주류 엘리트 중도우파 정치인에 왕당파였다면, 마치니와 가리발디는 공화주의적이고 내셔널리스트적인 좌파에 가까웠다. == 생애 == [[사르데냐 왕국]]의 항구 도시 니차(Nizza)[* 현 프랑스 [[니스]]]에서 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사르데냐 왕국은 [[나폴레옹]]한테 밀려 [[사르데냐|사르데냐 섬]]으로 밀려난 상황이었고 니차를 비롯한 [[리구리아]][* 리구리아 지역의 중심지는 제노바이나 니스도 지리적으로는 리구리아에 속한다.],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 [[사부아|사보이아]] 등 본토는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당한 상태였기에 출생 당시의 이름은 [[프랑스어]]인 조제프마리 가리발디(Joseph-Marie Garibaldi)였다. [[사르데냐 왕국]]의 해군에 들어간 것이 그의 군인으로서 경력 첫 줄을 장식한다. 아직 국가로서의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제노바]]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추진하던 [[주세페 마치니]]에게 감화되어 [[청년 이탈리아당]]에 들어간 것이 혁명가로서의 경력 첫 줄이다. 이 때가 1834년, 그러나 당시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조]]의 조상들처럼 일개 영주에 지나지 않은 가치관을 견지하고 있었고, 마치니를 끔찍이도 혐오했던 카를로 알베르토의 탄압으로 인해 주세페 마치니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끌어내려지고 [[7월 왕정|복고왕정]]이 세워진 어수선했던 프랑스에서도 그들은 청년 유럽당을 세워 활동했지만 실패해 [[스위스]]에서도 쫓겨나고 [[영국]]의 [[런던]]으로 향했다. 이 와중에 가리발디는 1836년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와 [[히우그란지두술 주|리오그란데]]와 [[우루과이]]의 혁명전쟁에 참전했다.[* 이 무렵 가리발디는 첫 아내인 아니타를 만나 첫눈에 반했고, 그녀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게 된다.] 군인과 혁명가로서의 이름을 올리고 있던 가운데 그는 조국의 [[이탈리아 통일]](Risorgimento, 1848)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귀국했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이 [[롬바르디아]]를 장악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나 [[1860년]] 그의 고향이었던 [[니스|니차]]가 사보이아 가문의 본관인 사보이아와 더불어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되자 이에 반발, 비정규군을 소집해 프랑스령 니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런 위험한 행동을 방관할 수 없었던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 [[카밀로 카보우르]]는 가리발디의 측근들을 적극 이용해 남이탈리아행을 유도했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자신의 고향인 니차를 프랑스에 팔아버렸다는 이유로 카보우르를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니차보다 훨씬 중요한 지역이었던 왕실의 본관 사보이아까지 할양을 감수할 정도로 이탈리아 통일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했다.] 그러자 그는 냅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방을 점령했다. 그가 조직한 '''붉은 셔츠단'''의 위명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무혈개선을 했을 정도였다. '''붉은 셔츠단'''은 [[민병대]]였으나 강철 같은 [[군기]]를 자랑했고, 행군 도중 길가의 [[오렌지]] [[나무]]에 열린 오렌지 한 알조차 따먹지 않았을 만큼 대민피해 방지에 철저했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리발디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남부 이탈리아의 [[독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카보우르 역시 가리발디가 직접 [[국왕]]이 되려 하거나 최소한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가리발디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두 말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통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점령지 전체를 헌납했다.''' 이후 사르데냐의 카프레라 섬으로 물러났으나, [[로마]] 병합이 지지부진하자[* 모든 [[교황령]]을 잃고 [[로마]]만 남은 [[비오 9세]]의 발악과 [[교황]] 보호라는 명목으로 프랑스군을 파병한 [[나폴레옹 3세]] 때문에 사실상 로마만 점령되지 않았었다.] 1862년과 1867년에 [[팔레르모]]에서 군대를 만들어 로마 함락을 시도하였지만 실패, 카프레라 섬에 다시 연금되었다. 이후 석방되었으나 말년의 대부분을 카프레라에서 보냈고, 묘지도 카프레라에 있다. 사실 정치인으로서 그 역량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시대의 [[영웅]]이자 [[애국자]]로 기억되고 있다. 가리발디는 정치 역량을 그다지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군인으로서는 상당한 역량을 발휘해서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여러번 [[이탈리아 왕국군]]을 지휘해서 승리하고 [[이탈리아 통일]]에 공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군사적 승리는 그가 순수하게 군인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기 보다는, 병사들이 그를 너무나 존경해서 그가 지휘를 맡으면 평소보다 월등히 잘 싸웠다는 이유가 크다. 가리발디를 향한 대중의 이런 존경은 단순히 이탈리아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가리발디가 자신의 점령지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납하고 [[이탈리아 왕국]]을 세운 뒤로는 전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받은 경애의 감정은 21세기 현재 전 세계의 진보주의자들이 [[체 게바라]]에게 가진 감정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유럽의 골수 [[왕당파]]나 극단적인 [[보수주의]] 세력을 제외하고 거의 전 유럽인과 아메리카 대륙인들이 그를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당시의 민족주의는 지금처럼 자민족 중심주의라기 보다는 이상적 [[민족 자결주의]]에 가깝다.]의 상징이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전설로써]] 그를 존경했는데, 실제로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리발디에게 북군의 총사령관 자리를 제안한 일도 있었다.[* 이 때 가리발디는 미국에서 노예제를 완벽하게 폐지해준다면 북군에서 복무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당시 사정상 완벽한 폐지는 불가능했다. 결국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령관직을 거절하게 되었다. 사실 가리발디도 사정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을 테니 완곡한 거절에 가까울 것이다.] 이후 [[1864년]]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는 그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한 명의 [[외국인]]이 영국에서 이 정도로 국민적인 환영을 받은 일은 역사적으로 거의 유례 없는 일이었다. 가리발디의 업적이 매우 큰 나머지, [[이탈리아인]]들 가운데 아직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날로 먹은 사람이고, 진짜 왕 대우받을 사람은 가리발디다."'''[* 심지어 이탈리아인들과 역사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리발디가 통일까지 다 해놓을 동안, 에마누엘레는 뭐 한 게 없어. 그냥 놀았어."'''하고 말하는 평범한 이탈리아인들도 의외로 상당히 많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정치 업적은 [[이탈리아/역사|이탈리아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인데도 말이다.[* 이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친손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파시즘]]과 [[베니토 무솔리니]]를 용인해 나라를 재앙에 빠뜨려서 사보이아 왕조에 대한 이미지도 같이 나빠진 게 크긴 하다.] == 여담 == * [[이탈리아 왕국]] 해군의 경순양함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s-2.5|주세페 가리발디]], 장갑순양함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과 [[이탈리아 해군]]의 항공모함 [[주세페 가리발디급 항공모함]]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소련 해군(!)의 구축함 중에도 가리발디 호가 있었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가리발디는 말년에 [[파리 코뮌]]과 제1[[인터내셔널]]에 무한한 지지를 보낸 사회주의자였다. * [[캡콤]]의 액션게임 [[나이츠 오브 더 라운드]]에서 가리발디에서 모티브를 얻은 걸로 보이는 최종 보스가 등장한다. 이름도 같은 가리발디. *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 가면 가리발디 광장이 있는데 이 사람을 기린 것은 아니고 그의 손자인 주세페 가리발디 2세를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멕시코 혁명]] 당시 [[프란시스코 마데로]] 휘하에서 혁명군을 도와 전투를 지휘한 주세페 가리발디 2세를 기리고자 1920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 [[영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비스킷]]이 [[https://en.wikipedia.org/wiki/Garibaldi_biscuit|있다.]] [[건포도]]가 사이에 들어있고 주로 [[차]]나 [[커피]]에 적셔서 먹는다고 한다. * [[산마리노]] 중심의 티타노 광장에는 뜻밖에도 가리발디의 동상이 있다. 끝내 이탈리아에 병합되지 않은 소국에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동상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통일전쟁 당시 가리발디가 산마리노에 피난한 적이 있었다는 인연으로 산마리노는 끝까지 독립을 유지할수 있었다고. 그래서 산마리노에서는 가리발디의 동상도 세워주고 기리는 듯 하다. * 고향인 니스에는 가리발디 광장이 있다. 원래는 니스를 발전시켰던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이름을 따 비토리오 광장이었으나 니스의 프랑스 할양 이후 가리발디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니스 할양 이후 니스의 이탈리아 재할양을 공약으로 내세워 이탈리아계 주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가 [[프랑스 의회]]의 제재를 받아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 [[한국]] 인명사전에서는 [[유리 가가린]]과 함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 [[기동전사 Z 건담]]의 등장하는 모빌슈트 [[가르발디 베타]]는 이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 [[럭비 유니언]] 최대 대회 중 하나인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의 [[프랑스 럭비 유니언 국가대표팀|프랑스]]과 [[이탈리아 럭비 유니언 국가대표팀|이탈리아]] 간의 경기에 “주세페 가리발디 컵”이라는 타이틀이 걸려 있다. 가리발디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2007년에 시작되었는데 이탈리아는 2011년, 2013년밖에 이기지 못했다. * [[빅토리아 3]]에서 역사적 선동가로 등장하며, 자유의 적이나 이탈리아의 적에 맞서 계속 나라들을 떠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