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fff00 연변 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장}}} [br] {{{#ffff00 {{{+1 주덕해}}}[* 중국식 독음을 옮기면 주더하이.][br]朱德海 | Zhū Déhǎ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Zhu_Dehai.jpg|width=100%]]}}} || || '''본명''' ||오기섭[br]吳基涉|| ||<|2> '''출생''' ||1911년 3월 5일 || ||[[러시아 제국]] [[우수리스크]] 도별하|| ||<|2> '''사망''' ||1972년 7월 3일 (61세) ||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중국)]|| || '''민족''' ||[[조선족]]|| || '''가족''' ||^^배우자^^ 김영선[* 중국 이름은 Jin Yongshun.] || || '''학력''' ||동방노력자공산대학 {{{-2 (졸업)}}}|| || '''직업''' ||정치인, 군인[* 1939 ~ 1947년까지 복무.]|| || '''소속''' ||[[중국공산당]], [[팔로군]]||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의 [[조선족]] 출신 정치인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 주장을 지냈다. 본명은 오기섭(吳基涉)으로 1930년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항일투쟁에 나서면서 여러 가명을 썼다가 주덕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 생애 == [[1911년]] [[러시아 제국]] [[우수리스크]] 부근 농촌마을인 도베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어머니와 같이 잠시 [[일제강점기 조선|조선]]으로 간 적도 있었지만, 여의치가 않아서 결국에는 [[연변]]에 정착하게 된다. 연변에서 일제의 만행으로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조선의용군]]에 입단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소련]]으로 [[유학]]갔다가 [[중일전쟁]]이 터지자 다시 중국으로 와서, 항일투쟁을 하는 동시에 학교를 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벽돌공장과 설탕공장을 꾸리는 사업을 벌였다. 중일전쟁이 끝나고 나서 [[국공내전]]이 벌어졌을때 다시 참전하여 나름대로의 활약을 보였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 연변조선족자치구역의 신설을 당국에 요구했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1952년]]부터 [[1966년]]까지 초대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을 지냈고, 이외에도 [[지린성]] 부성장,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소수민족]] 대표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지방정부 수장으로써는 그런대로 능력이 있어서 연변 발전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홍위병]]들에게 집안을 털리고, 능욕 당한 건 물론이고 연변자치주장 자리에서 쫓겨나 [[후베이성]] 일대 농촌지역으로 하방당하며 말년을 비참하게 지내야했다. [[폐암]]으로 병석에 들었을 때도 병원에서 약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나마의 배려를 받을 수 있었지만, 끝내 공직에 복귀하지 못한 채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4인방]]이 쫓겨나면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으며, [[1986년]]에 주덕해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현재는 [[조선족]]들 사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로 연변자치주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되며 위인전도 여럿 나오고 있기도 하다. == 관련 문서 == * [[중국/인물]] [[분류:1911년 출생]][[분류:1972년 사망]][[분류:중국의 정치인]][[분류:조선족]][[분류:우수리스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