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2> '''무창장공(武昌壯公)[br]{{{+1 周炅 | 주경}}}''' || || '''시호''' ||장(壯) || || '''작위''' ||서릉현후(西陵縣侯) → 용원현후(龍源縣侯)[br] → 무창군공(武昌郡公) || || '''성''' ||주(周) || || '''이름''' ||경(炅) || || '''자''' ||문소(文昭) || || '''생몰''' ||513년 ~ 576년 || || '''부친''' ||주영기(周靈起) || || '''조부''' ||주강(周彊) || || '''출신''' ||여남군(汝南縣) 안성현(安成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양(남조)|소량]], [[진(남조)|남진]]의 장수로 자는 문소(文昭). 여남군(汝南郡) 안성현(安成縣) 출신. == 생애 == 주경의 할아버지 주강(周彊)은 [[제(남조)|남제]]에서 태자사인(太子舍人), 양주(梁州) 자사를 지냈다. 주경의 아버지 주영기(周靈起)는 [[양(남조)|소량]]에서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여계2주(廬桂二州) 자사를 지냈고 보성현후(保城縣侯)에 봉해졌다. 주경은 젊은 시절에 호쾌하고 의협심이 있었으며, 장수의 재간을 지녔다. 소량 대동(大同) 연간[* 535년 ~ 546년]에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주의직합(朱衣直閤)에 임명되었다. 태청(太淸) 원년(547년), 익양(弋陽) 태수로 전출되었다.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경은 상동왕(湘東王) [[효원제|소역]]의 승제(承制) 하에서 서양(西陽) 태수로 제수되고 서릉현백(西陵縣伯)에 봉해졌다. 후경이 조카 후사목(侯思穆)을 파견하여 제안(齊安)을 점령하자, 주경은 용맹한 병사들을 이끌고 주경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주경은 지절(持節), 고주(高州) 자사로 제수되었으며, 무창군(武昌郡)과 서양군(西陽郡)에서 군대를 모았다. 후경의 장수 임약(任約)이 번산(樊山)을 점령하자, 주경은 영주(寧州) 장사 [[서문성]]과 함께 임약을 공격하여 임약의 장수 질라자통(叱羅子通), 조가루(趙迦婁) 등을 사로잡았고 승세를 몰아 임약을 추격하여 연승한 끝에 임약을 거의 물리쳤다. 승성(承聖) 원년(552년), 사지절(使持節), 도독강정2주제군사(都督江定二州諸軍事), 융소장군(戎昭將軍), 강주 자사로 전임되고 작위가 후로 올라갔으며, 식읍 500호를 받았다. 557년, 진패선이 [[경제(양)|경제]] 소방지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남진)|무제]]였다. 이때 왕승변의 부하였던 왕림은 진패선에 반발하여 상류를 점령했고 주경은 왕림의 부하로 종군하였다. 왕림이 자신의 장수 조경(曹慶) 등을 파견하여 주적을 공격할 때 주경은 군사들을 이끌고 진군했으나 [[후안도]]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힌 뒤 건강으로 압송되었다. 주경은 이후 [[문제(남진)|진천]]의 용서를 받아 융위장군(戎威將軍), 정주 자사로 제수되고 서양군과 무창군의 태수를 겸임하였다. 천가(天嘉) 2년(561년), 동양(東陽) 태수 유이가 반란을 일으키자, 문제는 주경을 조정으로 불러들여서 유이를 토벌하도록 명하려고 했으나 머지 않아 유이가 토벌되면서 주경은 돌아갔다. 광대(光大) 원년(567년), 화교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워서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로 제수되었다. 태건(太建) 원년(569년), 지절, 용양장군(龍驤將軍),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로 전임되었다. 태건(太建) 5년(573년), 사지절, 서도도독안기강형사정6주제군사(西道都督安蘄江衡司定六州諸軍事), 안주 자사로 제수되고 용원현후(龍源縣侯)로 봉해졌다. 이때 주경은 도독 [[오명철]]의 북벌에 종군했고 연전연승하여 한 달 동안 12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북제의 상서좌승(尙書左丞) 육건이 2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파주, 기주 등지에서 출병하자, 주경은 약한 군사들과 군수품을 남기고 의병(疑兵)을 심어서 북제군에 맞서게 했으며, 자신은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지름길을 따라 육건의 배후를 습격하고 육건을 물리친 뒤 북제의 수많은 물자들을 노획하였다. 주경은 뒤에 파주(巴州)로 진공하여 파주를 함락했고 강북의 성과 곡양(穀陽)의 백성들이 모두 성에서 투항하였다. 주경은 화융장군(和戎將軍), 산기상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조정의 명으로 입조하였다. [[후량(남북조시대)|후량]]의 정주 자사 전용승(田龍升)이 남진에 항복하자, 조정에서는 전용승을 진원장군(振遠將軍), 정주 자사로 임명하고 적정왕(赤亭王)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주경이 입조할 때 전용승은 강북 6개의 주와 7개의 진을 북제에 바치며 배반하였고 북제에서는 전용승에게 호응하도록 역앙왕(歷陽王) 원경안을 파견하여 전용승에게 호응하였다. 남진에서는 주경을 강북도대도독(江北道大都督)으로 임명하여 전용승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이때 전용승의 익양 태수 전용염(田龍琰)이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천(亭川)에 진을 치고 원경안이 수릉(水陵)과 음산(陰山)에 포진하며 전용염에게 호응했으며, 전용승은 산곡에 포진하였다. 주경은 군대를 나누어 각자 이들에 맞서도록 명했고 자신은 용맹한 군사들을 이끌고 전용승을 먼저 공격했다. 전용승이 대패하자 전용염은 달아나려고 했지만 주경이 이를 추격하여 참수했고 원경안은 달아났다. 주경은 평북장군(平北將軍), 정주 자사로 임명되었고 지절과 도독은 종전과 같이 받았다. 주경은 태건(太建) 8년(576년)에 죽어거 사주(司州) 자사로 추증되고 무창군공(武昌郡公)으로 추봉되어 장(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13년 출생]][[분류:57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