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의 왕비, rd1=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include(틀:다른 뜻1, from=샬럿 왕비, other1=브리저튼의 등장인물, rd1=샬럿 왕비(브리저튼), other2=넷플릭스 드라마, rd2=샬럿 왕비: 브리저튼 외전)] [include(틀:역대 영국 왕비)] [include(틀:역대 하노버 왕비)] ---- ||<-3><#C9E1EA,#694E4B> '''영국 조지 3세의 왕비[br]{{{+1 조피 샤를로테}}}[br]Charlotte zu Mecklenburg-Strelitz'''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llan_Ramsay_-_Queen_Charlotte_(Royal_Collection)1.jpg|width=100%]]}}}|| ||<|2> '''이름''' || 독일어 ||조피 샤를로테[br](Sophie Charlotte)|| || 영어 ||소피아 샬럿[br](Sophia Charlotte)|| || '''출생''' ||<-2>[[1744년]] [[5월 19일]] [br] [[신성로마제국]]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국]] 미로|| || '''사망''' ||<-2>[[1818년]] [[11월 17일]] (향년 74세) [br] [[영국]] [[잉글랜드]] 큐 큐 팰리스|| || '''장례식''' ||<-2>[[1818년]] [[12월 2일]] [br][[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배우자''' ||<-2>[[조지 3세]] ,,(1761년 결혼),,|| || '''자녀''' ||<-2>[[조지 4세]], [[프레더릭 어거스터스|프레더릭]], [[윌리엄 4세]], [[샬럿 어거스타 마틸다|샬럿]],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에드워드]], 어거스타, 엘리자베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아돌푸스 프레드릭|아돌푸스]], 메리, 소피아, 옥타비우스, 알프레드, 아멜리아|| || '''아버지''' ||<-2>[[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 || '''어머니''' ||<-2>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 || '''형제''' ||<-2>크리스티아네, 카롤리네, 아돌프 프리드리히 4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조피 루이제, [[카를 2세(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카를 2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의 아버지.], 에른스트 고틀로프, 고트헬프,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 '''서명''' ||<-2>[[파일:QueenCharlotteSignature.svg.png|width=100]]||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의 국왕 [[조지 3세]]의 [[아내]]. 남편 조지 3세와 금슬이 매우 좋아 사이에서 무려 15명의 자식을 낳은 걸로 유명하며, 조카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루이제]](10명),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프리데리케]](13명)와 함께 대표적인 다산의 왕비였다. 온화하고 다정한 성품으로 인해 남편의 신뢰 뿐만 아니라 가정적인 면모도 많이 보여줘 영국인들에게도 사랑받았던 왕비다. == 작위 == ||
[[파일:Coat of Arms of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svg|width=250]]|| ||<#FFFFFF> 문장 || * 메클렌부르크의 공녀 조피 샤를로테 전하 Her Serene Highness Princess Sophie Charlotte of Mecklenburg ([[1744년]] [[5월 19일]] ~ [[1761년]] [[9월 8일]]) *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1761년]] [[9월 8일]] ~ [[1818년]] [[11월 17일]]) == 생애 == === 어린시절 === [[1744년]] [[5월 19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에서 카를 루트비히와 작센 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당시 샤를로테의 백부가 공작이었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해 두 오빠인 아돌프 프리드리히와 카를이 공작이 된다. 샤를로테의 부모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가 [[신성로마제국]]의 군인으로 자주 복무해야 해서, 어머니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가 샤를로테를 포함한 10남매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도맡았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샤를로테의 백부와 아버지가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는 샤를로테의 오빠의 권리를 위해 정치적으로 나서면서 아이들의 교육을 신경쓰지 못하게 되었다. 나중에 샤를로테가 영국의 왕비가 될 쯤 외교 문서에서 그녀의 교육 수준이 매우 열악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결혼 === [[1760년]]에 영국의 [[조지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손자인 [[조지 3세]]가 22세의 나이로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영국의 왕위계승자였던 조지 3세에겐 여러 혼담이 있었는데 대부분 가족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조지 3세는 1758년에 리치몬드 공작의 딸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 결혼에 대해서 뷰트 백작이 반대했다. 조지 3세의 조부인 [[조지 2세]]는 손자가 친척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조피 카롤리네와 결혼하길 원했지만, 조지 2세의 맏며느리이자 [[조지 3세]]의 어머니였던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웨일스 공비 어거스타]]가 반대했다. 어거스타도 아들이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프리데리케와 결혼하기를 희망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조지 3세-샬럿 왕비 결혼식.jpg|width=100%]]}}} || || 결혼식 || 아무튼 조지 3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서둘러 결혼을 해야 될 상황이 되자 여러 후보들을 조사한 결과 샤를로테가 영국의 왕비로 낙점됐다. 샤를로테가 왕비로 낙점된 이유는 그녀가 작은 공국 출신의 공녀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이 낮을 것이며, 궁정의 음모 등에 익숙치 않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샤를로테는 왕비가 된 이후에도 자신과 관련된 일을 제외한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1761년]] 8월 말에 샤를로테는 단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9월 8일]], 영국에 도착한 지 단 6시간만에 [[조지 3세]]와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왕비 === 영국에서 결혼한 샤를로테는 샬럿 왕비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록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지만 [[조지 3세]]와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는데, 조지 3세는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정부를 두었던 것과 달리 아내인 샬럿에게만 충실했다고 한다. 이러한 행복한 결혼 생활의 결과로 샬럿 왕비는 1762년 8월에 맏아들인 [[조지 4세|웨일스 공 조지]]를 낳았고, 이후에도 9남 6녀에 달하는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샬럿은 왕비로 재위한 지 20년 넘게 수많은 자녀들을 낳으면서 그들의 양육에 집중하느라 궁정의 음모와 복잡한 정치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적인 삶을 살았다.[* 산책할 때도 시종들을 대동하는 게 아니라 부부끼리만 오붓하게 즐기는 걸 낙으로 삼았으며, 샬럿 왕비는 버킹엄 저택(별칭: Queen of House)에서 살았다고 한다. 샬럿 왕비가 살았던 집이 바로 지금의 [[버킹엄 궁전]]이다.] 다만 정치에 대해서만 멀리했을 뿐이지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미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정치적 문제의 개입을 싫어했다.] 이후에도 예술, 과학 자선사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했다. 샬럿 왕비는 다른 왕족들처럼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독일 출신 예술가를 선호했고, 남편 조지 3세와 함께 [[헨델]]의 작품에 대해 경의를 보냈다. 유명한 음악가인 [[모차르트]]도 여행 중에 영국을 방문했고 샬럿 왕비와 조지 3세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국왕 부부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굉장히 감탄했다고 한다.[* 샬럿이 아리아를 부를 때 모차르트는 [[플루트]]를 불렀으며, 1765년 1월에 모차르트가 6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샬럿에게 선물했다.] 다양한 분야의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도 많이 후원했는데 샬럿 왕비는 그중에서도 특히 세밀화를 좋아했다. 이러한 후원 덕분에 샬럿 왕비와 그녀의 가족들의 초상화가 아직까지도 많이 남겨져 있다. 또한 당시 쿡 선장이나 뱅크스 박사가 수집한 여러가지 다양한 식물들이 왕립 식물원인 큐 가든에 있었을 정도로 식물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극락조화"[* 원산지가 남아프리카 산]를 좋아해서 이 꽃을 샬럿을 위해 "Strelitzia Reginae"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고아원과 여성 전문 병원을 설립하기도 했고, 여성 교육에도 많이 관심을 가졌다.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자신의 딸들에게도 수준 높은 교육을 지원했지만 가정적으로는 매우 엄하게 대했다고 한다.[* 실제로 살럿의 딸들은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고 모후를 보필했다고 한다.] 1780년대 이후에 조지 3세의 정신병이 재발하면서 샬럿 왕비는 매우 힘들어했다. 샬럿 왕비는 1788년 이후에 머리가 점차 흰머리로 바뀌어 갔고, 조지 3세가 반복되는 정신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자 덩달아 샬럿 왕비도 굉장히 고생했다고 한다. === 사망 === [[1810년]]에 막내딸인 아멜리아 공주가 사망했는데 [[조지 3세]]는 막내딸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병이 더욱 심해졌다. 이를 본 샬럿은 매우 가슴 아파하며 1812년 이후부터 남편하고 떨어져 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들 [[조지 4세|웨일스 공 조지]]가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1816년]]에는 손녀인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가 [[레오폴드 1세|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드 공자]]랑 결혼했지만, 1년 만인 [[1817년]]에 사산을 하고 얼마 안 있어 사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샬럿 공주가 다다음대의 유일한 합법적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으로 영국에선 계승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정작 샬럿 왕비는 15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그들이 낳은 적자나 적녀는 샬럿 공주 단 한명 뿐이었던 것. 딸들은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결혼을 늦추거나 아예 하질 않았고, 아들들은 사생아만 수십명을 낳았을 뿐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제대로된 결혼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결국 [[1818년]] 11월 17일, 74세의 나이로 아들 [[조지 4세|웨일스 공 조지]]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샬럿 왕비의 죽음을 전해들은 남편 [[조지 3세]]는 아내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샬럿의 유해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고 약 1년 후 남편 조지 3세도 세상을 떠나면서 샬럿의 곁에 안장되었다. 아쉽게도 약 6개월 후 그토록 바라던 적손주들인 케임브리지의 조지 공자[* 1819년 3월 26일 생. 7남 [[아돌푸스 프레더릭|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의 장남.]와 [[빅토리아 여왕|켄트의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녀]][* 1819년 5월 24일 생. 4남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장녀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왕위를 물려받아 빅토리아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게오르크 5세|컴벌랜드의 조지 공자]][* 1819년 5월 27일 생. 5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컴벌랜드와 테비오데일 공작 어니스트 어거스터스 공작]]의 장남. 훗날 [[하노버 왕국]]의 게오르크 5세로 즉위했다.]의 출생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가족관계 == === 조상 === ||<#FFA3A5,#5c0001> 본인 ||<#FFDBAE,#512c00> 부모 ||<#FFFFAE,#505100> 조부모 ||<#AEFFC6,#005118> 증조부모 || ||<#FFE4E1,#330500><|13>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br]{{{-2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6>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br]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br]{{{-2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Strelitz)}}} ||<|3>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br]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br]{{{-2 (Adolf Friedrich II, Duke of Mecklenburg-Strelitz)}}}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br]아돌프 프리드리히 1세[br]{{{-2 (Adolf Friedrich I, Duke of Mecklenburg-Schwerin)}}} || || 브라운슈바이크다넨베르크의 마리아 카타리나 여공작[br]{{{-2 (Duchess Marie Katharina of Brunswick-Dannenberg)}}} || ||<|3> 슈바르츠부르크존데르스하우젠의 크리스티아네 에밀리 공녀[br]{{{-2 (Princess Christiane Emili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 || 슈바르츠부르크존데르스하우젠 공[br]크리스티안 빌헬름 1세[br]{{{-2 (Christian William I, Princ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 || 바르비뮐링겐의 안토니 지빌레 여백작[br]{{{-2 (Countess Antonie Sybille of Barby-Mühlingen)}}} || ||<|7>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br]{{{-2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 ||<|3>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br]에른스트 프리드리히 1세[br]{{{-2 (Ernest Frederick I, Duke of Saxe-Hildburghausen)}}} ||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br]에른스트[br]{{{-2 (Ernest, Duke of Saxe-Hildburghausen)}}} || || 발데크의 조피아 헨리에테 여백작[br]{{{-2 (Countess Sophia Henriette of Waldeck)}}} || ||<|3> 에어바흐에어바흐의 조피아 알베르티네 여백작[br]{{{-2 (Countess Sophia Albertine of Erbach-Erbach)}}} || || 에어바흐에어바흐 백작[br]게오르크 루트비히 1세[br]{{{-2 (George Louis I, Count of Erbach-Erbach)}}} || || 발데크의 아말리아 카타리나 여백작[br]{{{-2 (Countess Amalia Katharina of Waldeck)}}}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조지 4세]][br]{{{-2 (George IV)}}} || [[1762년]] [[8월 12일]] || [[1830년]] [[6월 26일]] ||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br]슬하 1녀[* [[샬럿 어거스타|웨일스의 샬럿 공녀]]] || || '''2남''' || [[프레더릭 어거스터스|요크와 올버니 공작 프레더릭 왕자]][br]{{{-2 (Prince Frederick, Duke of York and Albany)}}} || [[1763년]] [[8월 16일]] || [[1827년]] [[1월 5일]] || [[프로이센]]의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공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장녀이다.] || || '''3남''' || [[윌리엄 4세]][br]{{{-2 (William IV)}}} || [[1765년]] [[8월 21일]] || [[1837년]] [[6월 20일]] ||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br]슬하 2녀 || || '''1녀''' || [[샬럿 어거스타 마틸다|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샤를로테]][br]{{{-2 (Charlotte, Queen of Württemberg )}}} || [[1766년]] [[9월 29일]] || [[1828년]] [[10월 5일]] || [[프리드리히 1세(뷔르템베르크)|프리드리히 1세]] || || '''4남''' ||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br]{{{-2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 [[1767년]] [[11월 2일]] || [[1820년]] [[1월 23일]] || [[마리 루이제 빅토리아|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br]슬하 1녀[* [[빅토리아 여왕]]] || || '''2녀''' || 어거스타 소피아 공주[br]{{{-2 (Princess Augusta Sophia)}}} || [[1768년]] [[11월 8일]] || [[1840년]] [[9월 22일]] || || || '''3녀''' || 헤센홈부르크 방백비 엘리자베트[br]{{{-2 (Elizabeth, Landgravine of Hesse-Homburg)}}} || [[1770년]] [[5월 22일]] || [[1840년]] [[1월 10일]] || 헤센홈부르크 방백 프리드리히 6세 || || '''5남'''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br]{{{-2 (Ernest August I)}}} || [[1771년]] [[6월 5일]] || [[1851년]] [[11월 18일]]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케]][br]슬하 1남 1녀[* [[게오르크 5세]] 등] || ||<|2> '''6남''' ||<|2> 서식스 공작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왕자[br]{{{-2 (Prince Augustus Frederick, Duke of Sussex)}}} ||<|2> [[1773년]] [[1월 27일]] ||<|2> [[1843년]] [[4월 21일]] || --레이디 어거스타 머레이--[br]슬하 1남 1녀 || ||<#F0F8FF,#001b33> 레이디 세실리아 언더우드 || || '''7남''' || [[아돌푸스 프레드릭|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테크의 메리]]의 외할아버지다.][br]{{{-2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 || [[1774년]] [[2월 24일]] || [[1850년]] [[7월 8일]] ||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테 공녀[br]슬하 1남 2녀[* [[메리 애들레이드|테크 공작부인 메리 애들레이드 공주]] 등] || || '''4녀''' ||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부인 메리 공주[br]{{{-2 (Princess Mary, Duchess of Gloucester and Edinburgh)}}} || [[1776년]] [[4월 25일]] || [[1857년]] [[4월 30일]] ||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프레더릭 왕자[* 숙부 [[윌리엄 헨리|윌리엄 헨리 왕자]]([[조지 3세]]의 동생)의 아들로 친사촌간이다.] || || '''5녀''' || 소피아 공주[br]{{{-2 (Princess Sophia)}}} || [[1777년]] [[11월 3일]] || [[1848년]] [[5월 27일]] || || || '''8남''' || 옥타비우스 왕자[br]{{{-2 (Prince Octavius)}}} || [[1779년]] [[2월 23일]] || [[1783년]] [[5월 3일]] || || || '''9남''' || 알프레드 왕자[br]{{{-2 (Prince Alfred)}}} || [[1780년]] [[9월 22일]] || [[1782년]] [[8월 20일]] || || || '''6녀''' || 아멜리아 공주[br]{{{-2 (Princess Amelia)}}} || [[1783년]] [[8월 7일]] || [[1810년]] [[11월 2일]] || || 무려 '''9남 6녀의 15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는데 엄청난 사실은 이 많은 자녀들을 모두 샬럿 왕비 본인이 낳았다는 점이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8남, 9남, 6녀 3명은 부모보다 빨리 [[요절]]했다. == 흑인 혼혈설 == 이에 대해서는 그녀의 조상이자 [[포르투갈 왕국]] 국왕 [[아폰수 3세]]의 [[정부]]였던 마드라가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포르투갈]] 최남단에 위치한 알가르베([[파루]]의 옛 지명) 출신이였는데, 알가르베는 [[무어인]]의 오랜 통치로 인해 현재까지도 그들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유럽]] 대륙에 속하지만 [[아프리카]]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마드리가나 역시 [[북아프리카]]에서 온 조상을 둔 [[흑인]]이거나 흑인 혼혈이였을 것이라는 설이 있는 것. 다만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뇌피셜|확인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샬럿은 마드리가나의 '''16대손'''으로, 마드리가나다 유색인종이였더라도 이미 손주나 증손대쯤부터 가계도를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외양이 [[백인]]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여담으로 [[금발벽안]]이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6대조 외할머니 역시 [[인도인]] 어머니를 둔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이애나의 6대조 외할머니인 엘리자는 [[스코틀랜드]] 시골 대가문의 아들이자 [[인도]]로 정착해 사업을 하던 테오도르 포브스의 저택 가정부로 일하며 그의 [[사생아]] 딸인 캐서린을 낳았다. 아버지 테오도르는 딸 캐서린을 스코틀랜드 본가로 보내 교육시켰을뿐더러 그녀 앞으로 많은 재산을 남기고 사망했다. 캐서린은 비록 사생아였으나 어릴 때 영국으로 건너왔고 아버지의 유산 덕에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할수 있었고, 외증손녀인 루스가 퍼모이 [[남작]] 가문에 시집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친어머니 프랜시스를 낳았던 것.] [* 게다가 본인의 손녀랑 결혼한 남자 [[프란츠 폰 테크]] 역시 어머니로부터 순수 유럽인이 아닌 헝가리 [[마자르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고 그 조상중에 [[쿠만족]]의 족장이었던 [[어버 샤무엘]]이 있었으며, 그는 유대인이었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유럽왕실에서 순수 유럽 백인 왕조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샬럿의 16대조 할머니인 '''마드리가나조차 [[흑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으며,''' 만일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엔 무려 '''520여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 없다.''' 더군다나 마드리가나와 그녀의 후손들의 [[초상화]] 역시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 샬럿과 그 조상들의 [[DNA 검사]]를 해보지 않는 이상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예정이다. == 여담 == * [[프랑스 왕국]]의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1755년생)와 친분이 있었다. 두 왕비는 만난 적은 없으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아 친분을 유지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샬럿 왕비의 취향이 서로 비슷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영국식 스타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녀가 많은 샬럿 왕비의 편지에 의례적인 답장을 보냈지만, 8남 옥타비누스 왕자를 낳은 샬럿에게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끝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자 샬럿 왕비는 큰 충격을 받았고, 남편의 나라인 영국에서도 똑같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많은 걱정을 했다. *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편 [[조지 3세]]는 샬럿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그녀의 이름을 딴 케이크를 선보였는데, 이 케이크의 이름이 바로 '''[[마조트루비용#s-5|샬럿 로얄(Charlotte Royal)]]'''이다. * 남편과의 관계가 매우 좋아 다산할 만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자식 농사는 실패했다.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아들들은 정략결혼한 본부인과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아서 정부를 끼고 살았고[* 이 중에서도 최악은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조지 4세]]로 아내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와 결혼한 지 1년 만에 별거하고, 이후엔 아예 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캐롤라인을 영국에서 쫓아내 왕비로서 대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 딸들은 조지 3세 부부가 시집보내는 걸 꺼렸다.[* 조지 3세는 자신의 딸들이 누이들처럼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여담으로 조지 3세의 딸들은 아무도 자식을 낳지 않았다.] 결국 조지 3세의 아들들 중 몇 명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허락받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겠다며, 아예 정부와 사실혼 관계로 동거하며 사생아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조지 3세의 아들들은 자식을 아예 낳지 못하거나 정부에게서 낳은 사생아만 남기고[* 거의 모든 유럽 왕정에서는 사생아의 왕위 계승을 엄격히 금지했다.] 줄줄히 사망했고, 결정적으로 장남 [[조지 4세]]의 외동딸 [[샬럿 어거스타]] 공주가 요절하면서[* 샬럿 공주는 장남 조지 4세의 유일한 정실 부인 소생의 외동딸로, 조지 3세의 손자녀들 중에서도 왕위 계승 서열이 가장 높았다. 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실상 미래 영국의 여왕이 될 것이 확실시 된 상태였다.] 영국의 왕위 승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가까스로 샬럿 왕비와 조지 3세의 4남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외동딸인 [[빅토리아 여왕|빅토리아]]가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 그 손녀인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공과의 사이에서 많은 적자녀들을 낳았고, 그 자녀들이 많은 유럽 왕실과 혼인을 했다. 그렇기에 아주 먼 후손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론 샬럿 왕비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최대 도시인 샬럿의 유래가 되었으며 [[플로리다]] 남서부의 두 번째로 큰 항만인 샬럿 하보(Charlotte Harbor) 역시 원래는 '카롤루스 아브리고(Carlos abrigo)'라고 불렀으나 후에 영국이 점령한 뒤 이름을 바꿨다. *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왕비다. 국왕의 배우자 중에서도 [[필립 마운트배튼|필립 공]]에 이어 두번째로 오래 재임했다. == 대중매체에서 ==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834|조지 왕의 광기]]에서는 [[헬렌 미렌]]이 연기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에서 등장하며 자세한 내용은 [[샬럿 왕비(브리저튼)]] 문서 참고. 본 문서의 여담 문단에 나온 내용에 맞춰 흑인 배우인 골다 로스휴벌이 연기했다. 샬럿 왕비의 젊은 시절을 다룬 프리퀄 드라마 [[샬럿 왕비: 브리저튼 외전]]에서는 [[인디아 암아티피오]]가 연기한다. [[분류:1744년 출생]][[분류:1818년 사망]][[분류:그레이트브리튼 왕비]][[분류:하노버 선제후비]][[분류:하노버 왕비]][[분류:윈저 성 안장자]][[분류:하노버 가문]][[분류: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분류:메클렌부르기셰젠플라테 군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