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조지 프라이스}}}[br]George Price'''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6a00d8341c464853ef01b8d2eca1db970c.jpg|width=100%]]}}} || || '''본명''' ||조지 로버트 프라이스[br]George Robert Price|| ||<|2> '''출생''' ||[[1922년]] [[10월 6일]]|| ||[[미국]] [[뉴욕 주]]|| ||<|2> '''사망''' ||[[1975년]] [[1월 6일]] (향년 52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 || '''직업''' ||이론생물학자|| || '''분야''' ||[[진화생물학]], [[집단유전학]], [[물리화학]]|| || '''모교''' ||[[시카고 대학교]] {{{-2 (1946년 [[박사]])}}}|| || '''배우자''' ||줄리아 메디건 ^^(1947년 ~ 1955년, 이혼)^^|| || '''종교''' ||[[무종교]]([[무신론]]) → [[기독교]]|| [목차] [clearfix] == 개요 == [[미국]]의 이론생물학자. 샛별처럼 등장했다가 아쉽게도 오래 연구하지 못하고 타계한, [[진화생물학]] 분야의 특이한 인물. == 생애 == [[시카고 대학]]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하고, 194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하버드 대학]]의 강사, 아르곤 국립 연구소의 컨설턴트, 벨 연구소 등을 거쳐 1961~67년 동안 [[IBM]]에서 그래픽 데이터 처리 컨설턴트로 재직했다. 1966년 그는 [[갑상선암]]을 수술하다가 결과적으로 한 팔을 잘 쓰지 못하는 사태를 당했다. 원래 이 팔은 [[소아마비]]의 후유증 때문에 약간 불편했다고 하는데, 이 수술은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그는 상당한 보험금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다음 해에 IBM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넉넉한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한가한 생활을 하다가 그의 눈에 [[윌리엄 D. 해밀턴]]의 1964년 논문이 보였다. 이것이 그를 진화생물학 분야의 큰 공로자로 남게 해 준다. 그는 1968년 해밀턴에게 편지를 보내 그 논문의 reprint를 청했다. 해밀턴은 편지에 감명을 받고 긴 답을 했으나, 브라질로 9개월 동안 현장 조사를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바로 같이 연구를 할 수는 없었다. 그 동안 그는 뒤에 프라이스 방정식(Price equation)이라고 불리게 된 식을 유도하는데, 그야말로 획기적이어서 해밀턴이 "당신이 유도한 식에 매료되었습니다"라 답할 정도였다.[* 개체군 유전학에서 특정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서 빈도가 변하는 데 대한 기본 방정식이라 할 만 하다. 현대적으로는 [[자연선택]]을 특정 유전자의 빈도 변화로 정의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자연 선택의 기본 방정식이라 부를 수 있다. 식 자체와 그 자세한 의미는 [[http://fischer.egloos.com/4806574|여기]] 참고.] 해밀턴은 이 식을 자신의 논문에 집어넣고, 새로 알게 된 동료의 논문과 함께 [[네이처(학술지)|네이처]]에 투고한다. 해밀턴이 염려했던 대로 이미 명성이 있던 해밀턴의 논문은 바로 통과됐으나 프라이스의 논문은 거절되었는데, 해밀턴은 "내가 쓴 논문은 그의 식을 이용했다. 당연히 그의 논문이 실려야 하지 않냐"고 주장하여 프라이스의 논문도 실렸다. 이 논문은 프라이스 방정식의 유도와 의미를 설명했는데, 그의 독창성을 반영하듯이 참고 문헌이 하나도 없다. 그의 또 다른 큰 공헌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의 창안이다. 네이처에 처음 발표된 것은 [[존 메이너드 스미스]]와 공저로 올라가 있으나 나중에 그가 밝혔듯이 중요한 아이디어는 프라이스가 처음 제시했다. 원래 강경한 [[무신론]]자였던 프라이스는 갑자기 1970년 여름 경건한 신도로 전환하는데,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프라이스 자신은 "천문학적으로 낮은 확률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경 연구, 무료 봉사 등에 열중하다가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게 되었는데, 갑상선암 수술의 부작용으로 늘 치료를 받다가 약을 거르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가기도 할 정도였다. 아파트에서도 나와 밑바닥 생활을 하는 등 전반적으로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주변에서 자살을 염려할 정도였다. 1974년 정도에는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이나 제임즈 크로(James Crow)같은 저명한 개체군 유전학자들이 그의 공헌을 인정하는 편지를 보내 올 정도로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4년 말 해밀턴 가족과 한 주를 같이 보내는데, 이 때는 거의 정상적이었으며 해밀턴은 그가 다시 유전학에 전념하도록 거의 설득했다. 하지만 새해가 되자마자 그는 결국 불법 거주하던 낡은 집에서 손톱을 깎는 [[가위]]로 경동맥을 잘라 자살하고 말았다. 유품은 해밀턴에게 왔던 편지 몇 장 뿐이었으며, 신원 확인은 해밀턴이 했고 장례식에는 종교 봉사 관계로 알던 사람들 외에 학계에서는 메이너드 스미스와 해밀턴만이 참석했다. [[분류:진화생물학]][[분류:미국의 생물학자]][[분류:미국의 자살한 인물]][[분류:1922년 출생]][[분류:1975년 사망]][[분류:미국의 기독교 신자]][[분류:뉴욕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