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월북 관련 사건]][[분류:제5공화국/살인사건]][[분류:총기난사]][[분류:대한민국 육군/사건 사고]][[분류:1984년 범죄]][[분류:제22보병사단/사건 사고]][[분류:김일성 시대]][[분류:대한민국 국군/살인사건]] [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제22보병사단 사건일지)] [목차] == 개요 == [[1984년]] [[6월 26일]]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제22보병사단]]에서 복무 중이던 조준희 [[육군]] [[보병]] [[일병]]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해 12명을 살해하고 11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월북]]한 사건. 참고로 본 사건에 대한 기사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 21세기 기준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난리 났을 사건이지만 1994년 개정 이전까지 군사기밀보호법 11조에 따라 보도 자체를 원천 차단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에도 여타 이슈에 밀리면서 [[남북의 창]]이나 [[통일전망대(MBC)|통일전망대]] 등에 가끔씩 언급되거나 22사단 제대자들에 의해 후문이 전해지는 수준에 그쳤다가 2005년 [[530GP 사건]]을 계기로 연합뉴스에 의해 [[https://m.yna.co.kr/view/AKR20050623002300061|제대로 된 보도가 이루어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환경운동가 서재철의 2015년 저서 <지구상의 마지막 비무장지대를 걷다>에서 본 사건을 언급했다. == 전개 == 1984년 6월 26일 오전 10~11시경 [[강원도]] [[동부전선]] 까치봉에 있는 육군 22[[사단(군대)|사단]] [[제56보병여단|제56보병연대]] 4[[대대]] TOC 상황실에서 522[[GP]]로부터 [[아비규환]]의 [[전화]]보고 소리와 수류탄 폭음이 들리서 사건이 알려졌다. 초기접보시에는 북측의 강습으로 판단했으나 해당 GP 소속 [[상황병]]인 조준희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M16 소총]]을 난사한 뒤 휴전선을 넘어 월북한 것이었으며 사건 바로 다음 날 조 일병의 대남월북권유 방송을 통해 조 일병의 월북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 [[로동신문]]은 한 달 후인 7월 26일에 <남조선괴뢰군 사병이 헌병초소를 까부시고 공화국북반부로 의거>라는 기사를 게재함으로 공식적으로 월북을 알렸고 조준희의 얼굴, 나이, 소속 등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조 일병은[* 북한은 7월 26일 기사에서는 조준희의 고향을 서울 강서구 신정동으로 소개했는데 8월 9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준희는 자신의 고향이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이라고 했다.]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3학년까지 다니고 22사단에 입대한 후 56연대 4대대 특공 13중대에 배치되어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사고 당일 새벽 치밀한 계획하에 내무반에서 잠을 자던 [[사병]]들에게 M16A1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했으며 총에 맞은 피해자들은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한편 도주하던 조준희 일병을 추적하던 13전초중대 수색대원 3명이 [[지뢰]], 오발 사고 등으로 순직했다. 해당 GP 신임 [[소대장]] [[소위]]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살아남았으며 이 사건으로 당시 사단장 장기하 육군 [[소장(계급)|소장]], [[연대장]], [[대대장]] 곽근용 육군 보병 [[중령]] 모두 [[보직해임]]/전역 조치되었다.[* 이후 장기하는 [[하나회]] 멤버로 전두환의 비호를 받아 [[청보식품]] 사장을 거쳤고 1985년부터 8년간 (주)진로 사장을 지냈으며 1990년 [[진로그룹]] 주류/식음료부문 부회장, 1992년 회장, 1995년 고문을 지내먄서 1997년 퇴직할 때까지 장진호 그룹회장을 모시기도 했다.] 사건의 규모나 파급효과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국군 건군 이래 최악([[팀킬|아군 사살]]+적에게 [[투항]])의 총기사고로 기록될 정도로 심각했지만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정권에서 [[보도지침]]과 같은 [[언론통제]] 정책을 강력히 시행한 데다 1994년 이전까지 군사기밀보호법상 [[TV]]나 출판물 등지에서 보도가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일반 군 사고로 처리되어 유가족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2006년에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최초로 조사를 실시하기로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0604032246471|결정했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다. 한편 동료를 사살하고 월북했던 조 일병은 월북 이후 1달여간에 걸쳐 대남방송을 통해 월북 조장 방송 및 매체 등에 출연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22사단 부대원들은 매일 저녁 전방 경계근무를 설 때마다 조 일병의 대남방송을 들으면서 치를 떨어야 했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yikim607/100014185377|당시 북한에서 뿌린 삐라에 나온 조준희의 모습]] 조준희는 사건 이후에도 2000년대 초반까지 북한 방송에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북한의 언론에 등장한 사례는 없고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되었다는 루머가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며 이러한 주장들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6.25 전쟁]] 이전에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월북]]한 [[제8보병여단|8연대]] 강태무, 표무원 육군 [[소령]]도 처형당했다는 설이 많았으나 둘 다 2000년대까지 80세가 넘도록 북한에서 천수를 누리고 사망한 것으로 보았을 때 조준희도 현재까지 천수를 누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강태무는 1980년 북한에서 만든 기록영화인 <조국해방전쟁사>에 출현하여 자신이 미국이 지원한 이승만 정부의 학살 만행에 분노하여 월북을 했다고 증언했다.] 황해북도 사리원시 인민위원회 과장직을 역임하고 있다고 대남선전에 나온 적이 있는 걸로 봐서는 현재 북한에서 살아 있는 걸로 보인다. 80-90년대 대남선전지를 몇 번 확인해 보면 월북자 가족 소개 사진에 나온 조준희는 아내와 쌍둥이 두 아들을 데리고 북한에 살고 있는 듯하다. 참고로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1999년]] [[6월 26일]]에 만료되었고 설령 공소시효 만료 전에 불구속 기소되었다면 재판시효도 [[2014년]]에 만료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법적으로 반국가단체이기 때문에 헌법상으로도 북한의 영토는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해외 도피로 인한 공소시효 정지를 적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란죄에 해당한다면 공소시효[* 내란죄는 [[1995년]]에 공소시효가 폐지되었다.]가 없어서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남북통일]]된 후에야 이 사건의 처벌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 조준희 일병은 왜 월북을 하였는가? == 최전방 부대로 강제 배치된 조준희 일병의 범행 및 월북 동기는 여러가지로 조사되었지만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출범기였던 1984년 당시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정치상황과 연계된 자생 [[좌파]]라는 설과 군대 내의 폭력 문화의 비극이란 설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강제입대한 데다 월북 직전에 휴가 때 여자친구와 이별하는 등의 행동을 볼 때[* 왜냐하면 그 시점에 이미 사고칠 결심을 했기에 이별을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범행 동기로 강력히 대두되었으나 조 일병의 [[대남방송]]에 따르면 군대 내 극심한 폭력이 원인인데 자신이 대학교를 다니다 입대한 것을 가지고 선임병들이 데모하다 끌려왔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한다.[* 3학년을 마치고 늦게 입대한 케이스라 실제로 데모하다가 강제 입대당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보통 군 입대는 늦어도 2학년을 마치고 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인 데다 당시 대학생들은 데모하다가 징역을 선고받아 [[병역면제]]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 시절에는 대학 교수의 울며 겨자먹기식 승인 하에 [[운동권]] 대학생을 강제 입대시키는 지도휴학 제도가 있었는데 [[국군보안사령부]]가 학생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주도한 일명 [[녹화사업(비밀 공작)|녹화사업]]으로 이는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이나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드라마)|삼김시대]]에서도 묘사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대개 사살되거나 [[자살]]로 끝장내는데 월북까지 감행한 것을 보면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우발적인 범행인데 피해가 피해인지라 이미 정상적으로 살 길이 없으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1963년생으로 22사단에서 근무한 모 교수의 발언을 빌려 보면 조준희와 같은 중대여서 간접적으로 겪어 본 일이 있다는데 굉장히 반골기질이 강했던 성격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1대 때리면 눈을 부라려서 4대, 5대, 10대 매를 버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21세기에는 말도 안 되지만 1984년은 군대에서 구타는 통과의례고 묘약인 시대였으며 당시 1사단에서 근무했던 모 중위의 말을 빌려 보면 전통문에 월북 사유에 대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여자친구와의 이별 등 복합적 사유가 개입되었는데 때마침 "대학 다니다 군대 왔다" 라고 비아냥대는 고참들의 개갈굼과 구타가 결합돼서 그런 일이 벌어진 듯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 관련 문서 == * [[북한이탈주민 강화도 경유 월북 사건]] *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