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조종대}}}'''[br]'''趙鍾大'''}}}}}}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조종대.jpg|width=100%]]}}} || ||<|2> '''출생''' ||[[1873년]] [[1월 24일]] || ||[[황해도]] [[금천군]] 군내면 상일리[* [[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07_25_0520|#]]][br](현 [[황해북도]] [[금천군]] 금천읍) || ||<|2> '''사망''' ||[[1922년]] [[7월 25일]] || ||함흥형무소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개신교]] {{{-2 ([[감리회|남감리회]])}}}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79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조종대는 1873년 1월 24일 황해도 금천군 군내면 상일리(現 황해북도 금천군 금천읍)에서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강원도]] [[철원군]]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기독교 전도사로서 선교활동을 펴는 한편 한의학을 전공하여 약종상(藥種商)을 겸하기도 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는 [[철원군|철원]]의 봉명학교(鳳鳴學校)와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구국 교육활동을 벌였다. 당시 배영학교는 군사교육까지 실시하던 민립학교였는데, 1909년 12월 19, 20일 배영학교 교장과 [[대한매일신보]] 지사장을 겸임하던 조종대는 [[한일합병]]에 반대하는 결의서에 2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한성부]]의 [[전덕기]]에게 보낸 바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철원 헌병분견소의 내사를 [[http://db.history.go.kr/id/jh_098r_0020_1860|받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배영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됨에 따라 조종대는 상경하였다. 그 뒤 [[경기도]] [[경성부]]의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선교사업을 폈는데, 이때 한의사 [[나병규]]를 만나게 되었고 나병규가 한의술로 자신의 모친을 치료해줘 그 인연으로 [[의형제]]까지 맺게 되는 등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nNewsNumb=20150818080&nidx=20594|#]] 어쨌든 그는 고향인 [[금천군]] 등 황해도 일대와 철원 등 각지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1915년 12월 28일에는 황해도 [[평산군]] 보산면 보산리에 살면서 [[조선총독부]]에 남감리교회파 [[http://db.history.go.kr/id/gb_1916_05_19_a11360_0170|포교 신고를 했다]]. 한편으로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강원도대표로 선출되었으며, 또한 항일운동의 방법으로서 조선인관리퇴직동맹(朝鮮人官吏退職同盟)을 추진하기 위해 일단 이에 필요한 재정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8월 21일 배영학교 시절부터 같이 활동했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서무국장 [[강대려]]로부터 대한독립애국단의 설치 사정을 접하고, 애국단에 가입하여 강원도 각군에 군단(郡團)을 설치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평소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강원도 전역의 기독교 인사들과 관련해 발이 넓은 것을 활용하여 [[원주시|원주군]]·[[횡성군]]·[[강릉시|강릉군]]·[[양양군]]·[[김화군]]·[[평창군]]·[[울진군]]·[[삼척시|삼척군]]·평해면 등지를 돌며 애국단의 조직 확대를 위해 힘을 쏟았고, 그 결과 강원도 각처에 애국단의 지단(支團)을 설치할 수 있었다.[[http://db.history.go.kr/id/hdsr_008_0010_0010_0010|#]] 그러나 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단 조직이 발각되어 그는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30일 [[http://db.history.go.kr/id/su_005_1920_10_30_0760|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증회·출판법 위반·보안법 위반·공갈취재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29&evntId=0034974726&evntdowngbn=Y&indpnId=000000691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정치범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9&evntId=0034970949&evntdowngbn=Y&indpnId=000000339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었다]]. 이에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4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9&evntId=0034970949&evntdowngbn=Y&indpnId=000015058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면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후 옥중에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1922년 7월 25일 [[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07_25_0520|옥중 순국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감리회 신자]][[분류:금천군 출신 인물]][[분류:1873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옥사한 인물]][[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조선의 유교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