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 개요 == 刁彝 (? ~ 374) [[동진]]의 인물로 자는 대륜(大倫). 기주 발해군(渤海郡) 요안현(饒安縣) 출신으로, 아버지 [[조협]]은 [[동진]] [[원제(동진)|원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대장군 [[왕돈(동진)|왕돈]]의 난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 생애 == 아버지 조협이 왕돈에게 살해당해 가세가 순식간에 기울면서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왕돈의 난이 평정되자 조이는 [[복수|아버지의 원수 무리를 모조리 참살하고]] 그 수급을 모아 아버지의 묘에 바쳐 제사를 지냈다. 사실상 연쇄살인을 저지른 조이는 정위(廷尉)[* 구경(九卿) 중 형벌과 옥사를 담당하던 관직명.]에게 나아가 자신의 죄를 자수했다. 어차피 조이가 죽인 것은 반역자인 왕돈의 무리라 조정에서는 그를 특별히 사면해주었다. 이 일로 조이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퍼졌고, 이후 관직에 임용되어 상서사부랑, 오국내사를 역임했다. 함강 연간(335 ~ 342), 조이가 상소해 부친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을 청했다. [[성제(동진)|성제 사마연]]은 그의 청을 수락하고 태뢰(太牢)의 예로 다시금 조협의 제사를 지낼 것을 허락했다. 함안 2년(372년) 4월, 대사마 [[환온]]이 폐제 해서현공(海西縣公) [[사마혁]]을 오국(吳國) 서채리(西柴里)로 귀양보내고 오국내사 조이에게 명해 그가 허튼 짓 못하게 감시하도록 했다. 영강 원년(373년) 9월, 서연이주자사(徐兗二州刺史), 북중랑장으로 옮겨져 서주 광릉(廣陵)에 진수했다가, 이듬해인 영강 2년(374년) 정월에 사망했다. 동진 조정은 중서령 [[왕탄지]]를 서연이주자사로 삼고 광릉으로 파견해 조이를 대신하게 했다. 아들 [[조규]], 조창(刁暢), 손자 조홍(刁弘)은 역적 [[환현]]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남들 눈치보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사리사욕을 채웠으나 훗날 [[유유(유송)|유유]]에게 패하면서 멸족당했다.[* 하필 조규는 과거 유유에게 30,000냥의 빚을 갚지 않았다며 말뚝에 묶는 수모를 준 적이 있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7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