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름이 같은 개그콘서트의 코너, rd1=조용!필)] || {{{#FFFFFF '''조용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60C30 20%, #003478)" {{{#FFFFFF '''조용필의 주요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한국대중음악상|[[파일:KMAlogoblack1.jpg|width=80]]]] || ||<-5> '''{{{#E5D85C 올해의 노래}}}''' || || [[싸이]][br]<[[강남스타일]]>[br](2013년) || {{{+1 →}}} || '''조용필[br][br](2014년)''' || {{{+1 →}}} || [[소유(가수)|소유]]X[[정기고]][br]<[[썸(노래)|썸(Feat. 릴보이 Of 긱스)]]>[br](2015년) || ---- ||<-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449A4 0%, #FFFFFF 30%, #FFFFFF 70%, #2449A4)" {{{+1 [[한국방송공사|[[파일:KBS 로고.svg|width=60]]]] '''[[KBS 가요대축제|{{{#2449A4 가요대상}}}]] {{{#2449A4 대상}}}'''}}}[* 1980년까지는 TBC 방송가요대상이라는 이름의 시상식으로 진행됐고 언론통폐합 이후인 1981년부터 KBS 가요대상으로 이름을 바꿔 진행했다.]}}} || || 조경수[br][[이은하]][br]'''행복이란[br]아리송해'''[br](1979년) || {{{#2449A4,#5B7FDA {{{+1 ▶}}}}}} || '''조용필'''[br][[윤시내]][br]'''{{{+1 창밖의 여자}}}'''[br]열애[br]'''(1980년)''' || {{{#2449A4,#5B7FDA {{{+1 ▶}}}}}} || 조용필[br][[이정희(동명이인)#s-2|이정희]][br]'''미워 미워 미워[br]그대여'''[br](1981년) || || 조용필[br][[윤시내]][br]'''창밖의 여자[br]열애'''[br](1980년) || {{{#2449A4,#5B7FDA {{{+1 ▶}}}}}} || '''조용필'''[br][[이정희(동명이인)#s-2|이정희]][br]'''{{{+1 미워 미워 미워}}}'''[br]그대여[br]'''(1981년)''' || {{{#2449A4,#5B7FDA {{{+1 ▶}}}}}} || 조용필[br][[윤시내]][br]'''비련[br]DJ에게'''[br](1982년) || || 조용필[br][[이정희(동명이인)#s-2|이정희]][br]'''미워 미워 미워[br]그대여'''[br](1981년) || {{{#2449A4,#5B7FDA {{{+1 ▶}}}}}} || '''조용필'''[br][[윤시내]][br]'''{{{+1 비련}}}'''[br]DJ에게[br]'''(1982년)''' || {{{#2449A4,#5B7FDA {{{+1 ▶}}}}}} || 조용필[br][[윤시내]][br]'''나는 너 좋아[br]공부합시다'''[br](1983년) || || 조용필[br]윤시내[br]'''비련[br]DJ에게'''[br](1982년) || {{{#2449A4,#5B7FDA {{{+1 ▶}}}}}} || '''조용필'''[br][[윤시내]][br]'''{{{+1 나는 너 좋아}}}'''[br]공부합시다[br]'''(1983년)''' || {{{#2449A4,#5B7FDA {{{+1 ▶}}}}}} || [[김수철(가수)|김수철]][br][[이은하]][br]'''못다 핀 꽃 한 송이[br]사랑도 못해본 사람은'''[br](1984년) || || [[김수철(가수)|김수철]][br][[이은하]][br]'''못다 핀 꽃 한 송이[br]사랑도 못해본 사람은'''[br](1984년) || {{{#2449A4,#5B7FDA {{{+1 ▶}}}}}} || '''조용필'''[br][[정수라]][br]'''{{{+1 그대여}}}'''[br]도시의 거리[br]'''(1985년)''' || {{{#2449A4,#5B7FDA {{{+1 ▶}}}}}} || [[전영록]][br][[정수라]][br]'''내 사랑 울보[br]난 너에게'''[br](1986년) || ---- ||<-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34555 0%, #FFFFFF 30%, #FFFFFF 70%, #334555)" {{{+1 [[문화방송|[[파일:MBC 로고.svg|width=50]]]] '''[[MBC 가요대제전|{{{#334555 10대 가수 가요제}}}]] {{{#334555 최고 인기 가수상}}}'''}}}}}} || || [[혜은이]][br]'''제3 한강교'''[br](1979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1 창밖의 여자}}}[br](1980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고추잠자리'''[br](1981년) || || 조용필[br]'''창밖의 여자'''[br](1980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1 고추잠자리}}}[br](1981년)''' || {{{#334555,#A8BBCC {{{+1 ▶}}}}}} || [[이용(가수)|이용]][br]'''잊혀진 계절'''[br](1982년) || || 이용[br]'''잊혀진 계절'''[br](1982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1 나는 너 좋아}}}[br](1983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친구여'''[br](1984년) || || 조용필[br]'''나는 너 좋아'''[br](1983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1 친구여}}}[br](1984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그대여'''[br](1985년) || || 조용필[br]'''친구여'''[br](1984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1 그대여}}}[br](1985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허공'''[br](1986년) || || 조용필[br]'''그대여'''[br](1985년) || {{{#334555,#A8BBCC {{{+1 ▶}}}}}} || '''조용필[br]{{{+1 허공}}}[br](1986년)''' || {{{#334555,#A8BBCC {{{+1 ▶}}}}}} || [[전영록]][br]'''하얀 밤에'''[br](1987년)[* 사실 1987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의 최고인기가수상은 조용필로 확정돼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사유로 조용필이 수상을 거부하면서 공식 시상 순서가 취소됐고 프로그램 자체도 시상식이 아닌 그냥 공연으로 대체했다. 형식적으로 선정한 1987년 최고인기가수상에는 전영록, 최고인기가요상에는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가 뽑혔다.] || ---- ||<-5> [[골든디스크어워즈|[[파일:골든디스크 시상식_로고.png|width=50]]]][br]'''{{{#000000 음반 대상}}}''' || || - || {{{+1 →}}} || '''조용필[br]<허공>[br](1986년)''' || {{{+1 →}}} || [[이문세]][br]<사랑이 지나가면>[br](1987년) || ---- ||<-5>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파일: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 로고 화이트.svg|width=80]]]][br]'''{{{#FFFFFF 올해의 노래상}}}''' || || [[싸이]][br]<[[강남스타일]]>[br](2012년) || {{{+1 →}}} || '''조용필[br][br](2013년)''' || {{{+1 →}}} || [[태양(BIGBANG)|태양]][br]<[[눈, 코, 입]]>[br](2014년) || ---- ||<-2>
[[문화훈장|{{{+1 {{{#EDE4D3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2> [[파일:문화보관.jpg|width=200]] || || '''{{{#EDE4D3 연도}}}''' || '''{{{#980000 2003년}}}''' || || '''{{{#EDE4D3 이름}}}''' || '''{{{#980000 조용필}}}''' || || '''{{{#EDE4D3 분야}}}''' || '''{{{#980000 가수}}}''' || ||<-2> '''{{{#EDE4D3 보관문화훈장(3등급)}}}''' || ---- ||<-2>
[[문화훈장|{{{+1 {{{#EDE4D3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2> [[파일:문화은관.jpg|width=200]] || || '''{{{#EDE4D3 연도}}}''' || '''{{{#980000 2013년}}}''' || || '''{{{#EDE4D3 이름}}}''' || '''{{{#980000 조용필}}}''' || || '''{{{#EDE4D3 분야}}}''' || '''{{{#980000 가수}}}''' || ||<-2> '''{{{#EDE4D3 은관문화훈장(2등급)}}}''' || }}} || [include(틀:갤럽 선정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 ---- ||<-5> [[한국갤럽|[[파일:한국갤럽 CI.svg|width=135]]]] {{{#000000,#FFFFFF {{{+1 '''올해를 빛낸 가수 1위'''}}}}}} || || [[싸이]][br](2012년) || {{{+1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7CEEB, #87CEFA, #00BFFF)" {{{#000080 '''조용필[br](2013년)'''}}}}}} || {{{+1 →}}} || [[아이유]][br](2014년) || ||<-5> {{{#000000,#FFFFFF {{{-2 ※ 매해마다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올해를 빛낸 가수 1위'를 선정.[* [[틀:올해를 빛낸 가수 · 노래 1위]] 참고]}}}}}} || ---- [include(틀:시사저널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연예인/2000년대)] ---- }}} || ||<-2> '''{{{+1 조용필}}}[br]趙容弼 | Cho Yong-pil'''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조용필.jpg|width=100%]]}}} || ||<|2> '''출생''' ||[[1950년]] [[3월 21일]] ([age(1950-03-21)]세) || ||[[경기도]] [[화성시|화성군]] [[송산면(화성)|송산면]] 쌍정리[br](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본관''' ||[[조(성씨)|임천 조씨]][* 임천 조씨 26세손 '容' 항렬이다.] || || '''신체''' ||165cm, 56kg, [[O형]] || || '''가족''' ||배우자 안진현^^(1994년 ~ 2003년)^^ || || '''학력''' ||송산초등학교 {{{-2 (졸업)}}} [br]송산중학교 {{{-2 (전학)}}}[* 중학교 2학년 때 전학.][br]경동중학교 {{{-2 (졸업)}}}[br][[경동고등학교]] {{{-2 (졸업)}}} || || '''종교''' ||[[불교]] || || '''소속사''' ||YPC프로덕션 || || '''장르''' ||[[팝 록]], [[프로그레시브 록]], [[뉴웨이브(음악)|뉴웨이브]], [[신스팝]], [[트로트]], [[얼터너티브 록]], [[전자음악]], [[Funk]], [[하드 록]], [[R&B]], [[퓨전 재즈]], [[사이키델릭 록]], [[오페라]], [[펑크 록]], [[민요]], [[동요]], [[가곡]] || || '''별명''' ||'''가왕'''[* 다만, 후술되어있듯이 본인은 가왕이란 표현이 민망하다고 겸손을 표하기도 했다.], 작은거인, 풀빵, 조방범 || || '''취미''' ||[[골프]] || || '''특징'''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 || '''SNS''' ||[[http://www.choyongpil.com|[[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0]]]] | [[https://twitter.com/hello_ypc|[[파일:트위터 아이콘.svg|width=20]]]] | [[https://www.facebook.com/helloypc|[[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width=20]]]] | [[https://www.youtube.com/user/Choyongpilofficial|[[파일:유튜브 아이콘.svg|width=20]]]] || [목차] [clearfix] == 개요 == 가왕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레전드 가수이다. 데뷔 50년동안 꾸준하게 현역가수로 활동하고 있고 아직도 거의 매년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중이다. == 인물 소개 ==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화성)|송산면]] 태생이다. [[경동고등학교]][* 고교 비평준화 시절 서울시내 5대 공립고교 중 하나로 꼽히던 명문학교였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가 5대 공립고교다.] 1969년 25회 졸업생이다.[* 중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경동고등학교 동창회 등에서 졸업생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http://blog.daum.net/babyorganics/8522278|#]] 중퇴건 졸업이건 경동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졸업생으로 인정하는 듯 하다. 졸업식날 가출해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얘기도 있는걸 보면 졸업은 한 듯 하다.]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본래는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정확히는 기타리스트 겸 보컬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를 무려 7번이나 매진시켰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과거부터 국내 음악계에선 [[서울종합운동장|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뮤지션으로 국내에선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여겨졌다. 참고로 [[이문세]], [[이승환]], [[싸이]] 등도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지만, 이들은 매진에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은 그런 주경기장 콘서트를 순식간에 매진시킬 정도의 티켓파워를 가지고 있다. 무려 7번을 했다.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은, 잠실 주경기장: 2010 Love In Love 이틀 10만 명, 1993 해운대 콘서트 단일 10만 명이 있다.]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카세트테이프|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수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 명이자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전설급의 자타공인 타종불허 '''가요계의 제왕'''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의 위치를 미국에 비유한다면 [[프랭크 시나트라]], 영국에 비유한다면 [[폴 매카트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 모두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인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슈스케에서 [[김태우(god)|김태우]]가 [[이승철]]을 가왕이라고 호칭하자 이승철 曰 '''"그건 용필이 형이지."'''라면서 스스로 부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이 장면을 두고 '''이승철의 위엄'''을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같은 가수 입장에서 대선배이자 거장인 조용필을 선배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형이라 부를 만한 사람마저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이승철은 조용필이 술 한잔 하거나 피곤할 때, 운전 기사 역할도 많이 해 드렸다고 한다. 조용필 또한 이승철을 상당히 좋게 평가하는데, 90년대 쯤 "조용필의 뒤를 이어서 누가 공연계의 제왕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승철이가 느낌을 좀 살리지 아마?"'''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왜 최정상급 가수들도 조용필은 소위 '논외'로 해둘만큼 치켜세울까? 그저 선배라서? 선배 가수가 한둘이 아닐텐데? 아래 영상을 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다른 기성 가수들이 현재 아이돌들에 대해 음악도 아닌 이상한 것을 한다며 혹평하는 반면 조용필은 "세대가 다르고 추구하는 음악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평가를 내릴 입장은 아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후배들이 자신의 노래를 번안해 부른 후에도 누가 제대로 잘 불렀냐는 질문에는 "각자가 곡을 해석하는 부분이 다르고 창법도 다르기에 누가 더 잘 불렀다고 판단내릴 순 없다. 자신만의 해석과 창법으로 잘 살려 불렀다고 본다."라고 할 정도.] 조용필은 저런 멘션을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이돌들이 장악한 현재에도 이 노래는 젊은 세대들이 부를 정도다.]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201835305&code=210000&s_code=af090|2011년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물론 자신은 겸허함을 담아 한 말이지만 사실 일반인에게는 가왕같은 수식어보다 오히려 조용필이라는 이름 자체가 더 큰 무게를 갖는다.] [[빠순이|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사실 오빠부대라는 용어 자체는 1960년대에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당시 처음 생겨난 용어며 국내가수로는 70년대 [[남진]]/[[나훈아]] 시대부터 있긴 있었다. 그 오빠부대가 짜임새 있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조용필쯤부터인 것이다.]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조용필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실화 하나를 공개한다. 부산의 한 여고에 어느 교사가 수업 중, 조용필에 관해 얘기를 하면서 "그 친구,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 매면 영락없는 하우스보이지"라고 했더니 수업 중이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그 발언 취소하라"고 들고 일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해당 교사가 지도하는 수업도 거부하는 사태까지 있었을 정도다.] >'''여러분, 기도하는~[* <[[비련#s-2.1]]>의 도입부다.]의 다음 가사를 아십니까? 바로 꺄악~입니다.'''[* 음원사이트에서 라이브 공연 버전을 들어보면 관중들의 저 반응이 그대로 나온다. [[https://youtu.be/PKe1812FTh4?t=41|대표적인 예시로 43초부터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미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 [[이종환(방송인)|이종환]]이 라디오에서 '''지금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벚꽃]]마냥 부산에서 대구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주요 영상 === || [youtube(XpO-t_meYIQ, width=560, height=315)] || || <아하! 그렇지> 1990년 추억속의 재회 콘서트 || || [youtube(5qhwlAJf8Aw, width=560, height=315)] || || <추억속의 재회> 1990년 추억속의 재회 콘서트 || || [youtube(KL2QR-uqnaA, width=560, height=315)] || || 1996년 열린 강원 수요예술무대 콘서트 1부 영상 || || [youtube(hS0xEbPgyo4, width=560, height=315)] || || 1996년 열린 강원 수요예술무대 콘서트 2부 영상 || || [youtube(ZlOEnSBMpDE, width=560, height=315)] || || 1997년 열린 "97 자유 콘서트" 中 마지막날 피날레, 조용필 공연 40분 영상 || || [youtube(IKuVt_83dXc, width=560, height=315)] || || 2008년 열린 "조용필 40주년 기념 콘서트" 콘서트 中 || || [youtube(yqwR0IBLb-c, width=560, height=315)] || || 2013년 슈퍼소닉 출연 영상 || == 경력 ==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굉장히 권위적이고 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들들을 데리고 야외에서 사냥을 다니기도 했는데, 조용필은 피 묻은 동물 사체를 보는게 너무 싫었다고 한다. 음악 반대 이유 외에도 부자의 성향이 무척 안 맞았던 듯하다. 맏형이 가장 부친의 성격과 닮아서 사냥을 자주 같이 했고, 모든 형제 중 가장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부친의 사업도 그가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후 1968년에 [[주한미군|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미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 "[[연안부두]]"를 부른 밴드 "김트리오"와는 다른 그룹이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 대한민국 1세대 재즈 뮤지션으로 유명한 재즈 드러머다.],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 이 당시에는 최이철이 나가고 '울고 싶어라'로 유명한 [[이남이]]가 베이스를 맡게 된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파일:external/www.choyongpil.net/1212826495.jpg|width=500]]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 응원가로 쓰이고 있다.[* [[부산 갈매기]]도 그렇다.]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조용필 본인은 대마초 파동 이전 활동 및 음반에 대해서 습작 성향이 짙고 부족한게 많아서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용필은 고문까지 당하고 채혈까지 했지만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 무혐의로 풀려났다. 애초에 잡혀간 이유가 이때로부터 거의 10년전에 미군 공연 초창기 시절에 조용필이 친해진 미군의 권유로 대마초를 한번 피웠다가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피웠다는 이야기를 과거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이, 당시 연예계를 조지려들던 검사와 형사들의 조사로 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인데, 태어나서 딱 한번 피우고 몇년동안 안 피운 대마초성분이 몸에 있을 리가 없었다. --10년이면 중금속도 검출이 안된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 [[조용필/음반 목록|음반]]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용필/음반 목록)] [include(틀:조용필의 음반 목록)] 정규 앨범만 무려 19개, 비정규앨범까지 포함하면 50개가 넘어간다. === 대표곡 === 대표곡은 "[[걷고 싶다]][* 이 곡은 2021년에 [[김종국]]에 의해 리메이크 된 곡이다]",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조용필)|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꿈(동음이의어)#s-5.1|꿈]]",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내 이름은 구름이여", "님이여"[* 1961년에 바비 블루 블랜드(Bobby blue bland)가 부른 '''Lead Me on'''을 번안한 노래이다.], "[[단발머리(조용필)|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s-2]]", "[[모나리자(조용필)|모나리자]]", "[[못찾겠다 꾀꼬리#s-2]]", "물망초", "미워 미워 미워", "미지의 세계",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의 노래]]", "[[Hello(조용필 음반)#s-3.1|Bounce]]", "[[비련#s-2.1]]", "빛"[* 드라마 [[영웅시대]] OST], "상처"[* 처음에는 덜 알려졌지만 주부 가요 프로그램에서 불려져서 나중에 히트친 노래이다.] , "서울 서울 서울", "[[선구자#s-2]]", "슬픈 미소", "슬픈 베아트리체", "어제, 오늘, 그리고", "여와 남", "[[여행을 떠나요]]"[* 요즘 사람들은 이승기의 노래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 조용필의 곡이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박정현이 이 노래를 [[나는 가수다]]에서 부른 적이 있다.], "[[일편단심 민들레야]]"[* [[임영웅]]이 이 노래를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불렀다.] , "정의 마음", "[[창밖의 여자]]", "촛불", "추억속의 재회", "[[친구여#s-1]]"[* 한때 운동권에서 불려지기도 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교과서에 실린 대중가요다. 이 외에도 돌아와요 부산항에, 한오백년, 여행을 떠나요가 교과서에 실렸다.], "[[Q#s-4.2]]", "[[킬리만자로의 표범]]", "태양의 눈", "[[한강(동음이의어)#s-11|한강]]", "한오백년", "[[허공(조용필)|허공]]", "Hello" 등 매우 많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실제로 본인도 콘서트 멘션 중 발표한 곡이 너무 많아서 다 하려면 며칠을 해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조용필의 콘서트가 끝난 뒤 콘서트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oo가 듣고 싶었는데"''' 하는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멘션도 거의 없이 노래로 모든 공연을 꾸며서 타 가수들에 비해 콘서트에서 부르는 곡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이 정도니 히트곡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 [[/콘서트|콘서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용필/콘서트)] === 출연 광고 === * [[하이트진로]] 크라운맥주 * [[롯데제과]] * [[LG전자]] 하이테크 스테레오, 하이파이VTR, 금성미라클TV * [[일화]] 맥콜 * 부일이동통신 == 평가 == ||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l_2016081502000748900158371.jpg|width=100%]]}}} || > "한국 대중음악의 상징" >---- > -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의 소개 문구 > 한국 대중음악의 상징 조용필 > > [youtube(5adJ5Dn11AA, width=400, height=300)] > [youtube(RkCpkhFFhlU, width=400, height=300)] > [youtube(z1CLh8gfLxE, width=400, height=300)] > [youtube(MyToZsROfN8, width=400, height=300)] > [youtube(4FEcuhZ76pk, width=400, height=300)] > [youtube(5ZNit43P1mw, width=400, height=300)] > ---- > [[엠넷]] 레전드 100 >영미권 음악을 [[비틀즈]]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 [[대한민국|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 평론가 [[임진모]] >아이돌적인 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위상을 거의 처음으로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실 한국에서 가능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의 다 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조용필 씨의 영향이 대중음악계 곳곳에 남아있고요. >- 평론가 이무원[* [[http://www.dailymusic.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출처]].]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쓴 가수, 현재 모든 가수들이 바라는 진정한 표상[* 후술하겠지만 [[판소리]], [[오페라]], [[발라드]]부터 [[Rap|랩]], [[록 음악]]까지 음악장르를 가장 다양하게 시도하고, 가장 많이 성공한 가수다.] >가왕(歌王)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며, 후배 가수들의 꿈 같은 존재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마왕 [[신해철]]이 공손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 이건 지극히 당연하다. 신해철이 무한궤도로 데뷔한 대학가요제에서 당시 심사위원이던 조용필이 후한 평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은인인 셈이다. 또 신해철이 마왕이란 별명에서 느껴지듯 독설가, 카리스마 이미지이긴 했어도 안하무인은 아니었다.] 과거 '[[김혜수]]의 플러스 유'라는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마왕]]으로 불리던 후배 신해철을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에 귀여운 후배로 평가해서 진행자 김혜수를 비롯해서 관객들이 뜨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스트스테이션]]에선 신해철이 조용필의 [[히트곡]]들을 직접 리마스터해서 특집으로 튼 적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혼날까봐 조용필이 곯아 떨어질 것이 확실한 공연날 밤을 골라서 방송을 했다. 그 외 [[이승철]]이나 [[이은미]]조차도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를 못 든다고 한다. 물론 조용필이 군기반장이란 소리는 아니고[* 단, 이승철이나 당대 가수들이 조용필이 자기 밴드 멤버들을 불러 무섭게 혼내는 건 몇번 봤다고 했고, 후배들에게 직접 뭐라 하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되게 무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1980년대 당시는 음악방송 PD들이 권위와 권력이 엄청 커서 방송국에서 20대 가수들이 담배를 피우면(당시는 건물복도나 대기실 등 실내흡연이 가능했다.) 말단 PD조차 다가 와서 뺨을 때리던 시기였는데, 조용필만 예외라 조용필은 간부급 PD와도 맞담배를 하며 방송을 의논했다고 한다. 조용필이 방송국에 오면 국장급이 와서 '조가수 왔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존경심에서 하는 소리다. || [[파일:attachment/조용필/yongpil_and_taiji.jpg|width=100%]] || || 조용필과 [[서태지]].jpg || 조용필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시절의 수많은 음악적 시도의 성공 덕에 대중성과 다양성을 오랜 기간 동안 잡아낸 보기 드문 가수이기 때문. 조선일보의 대한민국의 최고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이미자]], 3위는 [[나훈아]], 4위는 [[서태지]]가 되었다. 조용필이 2위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더불어, 방송국이 굽혀주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로 가요계 배분과 위상이 높은 점에 기인한다.[* 언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가수는 없다.] 보통 PD들이 가수를 지칭할 때 '~씨'라는 호칭으로 큐시트를 주는데 조용필은 방송국에 떴다 하면 최고위급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사실 조용필만 선생님이라 불리는 건 아니고 이 정도 연배의 배우나 가수들은 모두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패티 김이 방송국에 떴는데 패티 김 씨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실제로, 2013년 각 방송국 예능국장급은 다 조용필과 같은 시대 인물이거나 그 아랫세대다. 이승철이 회상하기로는, 자신의 신인 시절은 PD들의 힘이 워낙 세던 때라 어린 가수들이 지각을 하거나 하면 '저기 가서 손 들고 서 있어!' 라고 윽박지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임에도 조용필이 오면 반드시 국장급 이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이승철의 신인 시절이면 조용필이 중견가수긴 해도 30대 후반일텐데 이미 그 때도 엄청났다는 얘기가 된다. 국내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가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가수이기도 하다. 80년대는 음악 평론이란 것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조용필의 [[크로스오버]]적인 실험들이 90년대 중반 들어서야 겨우 조금씩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단독 공연으로는 2003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콘서트를 하였으며, 자신의 데뷔 00주년 공연 중 마지막으로 게스트를 초청한 35주년 콘서트에는 [[신승훈]], [[신해철]], [[god(아이돌)|god]], [[이은미]], [[장나라]], [[유열(가수)|유열]]이 출연하였다.[* [[조PD]]는 신해철 차례 때 보이지도 않는 뒤에서 랩을 했다.(...)]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그 중 2003, 2005년, 2018년 공연은 우천 속에서도 매진된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이후 잠실 공연에 도전한 [[이승환]]도 우천을 만나며 객석이 비게 되었고, 이후 [[이문세]], [[싸이]] 등도 도전했지만 잠실 주경기장은 쉽사리 만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필은 괜히 가왕이 아니다.[* 잠실 주경기장 즉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은 69,950석에 더해 [[가변석]] 5216석이다. 상암동의 월드컵 경기장(66,704석)보다 더 크다.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 또한 1999년 말 대중가수 중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였으며 향후 몇 년간 연말 투어로 그곳에서 마무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국내 공연문화(콘서트)에 있어서도 선구자이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계속 이끌어오고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해외 아티스트들도 아무나 시도하지 못하는 무빙스테이지를 2010년 국내에 도입했다. 너비 120m, 높이 33m의 초대형 무대는 잠실 주경기장을 80m나 움직였다. 이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때 이틀간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8 50주년 콘서트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규모, 조명, 폭죽 모든 게 넘사벽이다. 모든 활동은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같이 하고 있는데 그의 위상과 걸맞는, 대한민국에서는 전설급이라 할 수 있는 세션들만 거쳐갔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민(음악가)|김광민]], [[송홍섭]], [[정원영(음악가)|정원영]], [[유재하]],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 전태관]] 등이 있다. 2018년 4월 1일과 3일 평양에서 공연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에도 합류했고, 1차 공연에선 출연자 중 가장 많은 4곡을 불렀다.[* 모든 출연자가 합창한 친구여까지 합치면 5곡이 자신의 노래이다. 다만 2차 공연 땐 2곡만 불렀다. 몸이 안 좋기도 했을 뿐더러 다른 출연자들 공연도 많아 여건상 2곡만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순서는 솔로 공연 중에선 마지막 무대였다.] === 창법/예술력 === 한창 활동할 당시엔 노래부터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이었다. 사운드, 공연 퀄리티도 당시 기준으론 압도적이었다.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쓱싹 써낸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 물론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완벽하게 연주가 가능한 곡을 만들어냈다는 뜻은 아니다. 멜로디 라인을 만드는 것을 작곡이라고 하고 그 멜로디에 맞춰서 세션들이 어떻게 연주할 지 만들어내는 것을 편곡이라고 하는데, 편곡은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곡을 받는 장면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볼 수 있다.] 창법의 경우 현시대의 (믹스보이스적인) 발성과 창법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창법에 우위 논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거고[* 대중가요는 결국 듣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그의 콘서트에 몰려들면 그게 노래를 잘하는 거다. 게다가 조용필의 판소리 비슷한 [[벨팅]]스러운 창법도 지금 가수들이 많이 구사하는 믹스보이스적 창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일뿐 성대를 노래 못할 정도로 상하게 하는 창법이 아닌 한 잘못된 게 아니다. 대중가요 창법에 정답은 없다.] 발성이나 창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 못하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조용필을 성대모사하는 연예인들이 웃음을 목적으로 과장되게 따라해서 그렇지, 조용필의 가창력은 최정상의 실력이다. 심지어 50주년 콘서트에서 2시간 내내 20여 곡[* 심지어 50주년 마지막 공연인 서울 앵콜에서는 30곡을 불렀다.]을 라이브로 소화했을만큼 그의 목 내구도는 수준급이다.[* 조용필 콘서트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콘서트 때 멘션이 굉장히 짧고 공연시간을 모두 노래로 채워서 한다. 잡다한 것들은 빼고 순수하게 공연에만 집중하겠다는 프로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원래 데뷔 초기[* 미군부대 밴드에서 기타를 담당하다가 보컬이 갑자기 입대하게 되어(...)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 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의 음악도 참고하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 실제로 로드 스튜어트의 평소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하이톤이라는 점을 캐치해, 금관 악기를 하나 주문하고 성대의 떨림판과 비교해가면서 허스키한 보이스를 연마했다고 자신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다. 피를 토한 것은 언론의 과장된 부풀리기였다고 부정했고, 대신 성대가 피로를 느끼면 소금물을 마셔가면서 붓기를 약간 가라앉히고 다시 연습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대 자체의 내구력을 연마해 온 셈. 실제로 이런 발성은 서편제에서 말하는 '수리성' 단련 방식과 상당히 비슷하다.]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듣기 불편할 수도 있으나, 그게 조용필만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청중도 있으니 아이러니. 애초에 대중창법에 정답은 없다. 한편으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상당히 두터운 탁성을 구사한 바도 있는데 이때의 가창스타일이 조용필 커리어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스러운 창법을 활용하는데, 특유의 개성있는 톤과 어울려 댐핑감을 선사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 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 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 중, 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 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 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 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펑키하거나 재즈풍 리듬의 곡(10집-I Love you/모나리자, 12집-내 모습, 13집-어젯밤 꿈속에서, 14집-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13집-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웍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다만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 차이가 분명히 있기는 한데, 이는 더블링[* 한 선율을 부를 때 오버더빙을 하는 방법이다. 똑같은 멜로디를 똑같은 음색으로 노래를 한 번 더 부르기 때문에 청자가 들을 시에 소리가 좀 더 풍성하게 들린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에 라이브를 할 때도 원래 가진 소리 자체는 가는 음색이었으나, 앨범에서 들리는 소리는 약간 굵게 들린다. 다만 라이브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노래할 때 성량 자체가 상당히 커서 어느정도 커버된다고 한다.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본인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가늘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 데에 있어서 초고수다.[* [[https://www.youtube.com/watch?v=RySAATlcsWI]]이 곡이라든가 아니면 이 곡에서처럼[[https://www.youtube.com/watch?v=WINAu3tJXBo]] 후렴구에서 잠시 등장하는 스캣 부분에서 들을 수 있다.]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통 가수 스스로가 코러스를 만들기 보다는 주로 외부 객원 보컬들을 활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팝 계에서 코러스를 잘 넣기로 유명한 가수로는 [[프레디 머큐리]], [[마이클 잭슨]], 알 지아로 등이 있다.] 다만 초기에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은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미8군 시절 대세가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창법이 노래 잘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1980년대 음반 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 레코드 사와의 갈등 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 '기도하는~~꺄~~~~'으로 유명한 초기 조용필의 대표곡 '비련'의 후렴구를 들어보면 풍부한 성량을 터트리듯이 노래하는 당시 조용필의 창법을 들을 수 있다.]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못한 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 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것만 믿고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득음을 하기 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 실제로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3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내부장기 손상으로 이건 얄짤없는 사망 루트(...)고, 그 다음은 폐를 포함한 호흡기 손상인데 이것도 노래에 치명적이다. 마지막으로 득음이라고 칭하는 판소리쪽인데, 이쪽에서 피가 난다는 건 이렇게 피가 난다는 소리가 아니다. 애초에 현대 가요쪽 창법과 판소리 창법은 상당히 달라서, 이런 식으로 피를 보면 [[성대]]가 변형되기 때문에 평상시 목소리가 쇳소리가 난다. 목을 험하게 굴려서가 아니라, 자기 노력으로 목소리를 이정도로 바꾼 가수는 현대 가수중에서는 거의 없다시피한 수준. 나무위키에 적힌 인물 중에선 [[야마가타 유키오]] 정도가 있는데 이쪽도 다소 애매하다. 애초에 판소리도 세부적인 창법으로 들어가면 다양하다.] 재능과 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록 음악]](미지의 세계), [[대중음악|팝]](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재즈]](단발머리), [[일렉트로니카]](아하! 그렇지),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이상 각주는 모두 대표적으로 한곡들만 기재하였음.]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Over The Rainbow(조용필 음반)|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Hello(조용필 음반)|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Rap]]까지 섭렵했다.[* 버벌진트는 처음 제의 받았을 때 [[몰래카메라]]나, 혹은 벌써 만우절이 왔나 싶었다고.]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60대의 나이라는 말에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 의외의 친분으로 빅뱅의 태양이 있는데 태양이 RISE 앨범을 준비하면서 신곡 '버리고'를 직접 조용필에게 찾아가 들려주었다고 한다. ~~거장과 독대하는 아이돌 정점의 위엄을 볼 수 있다.~~ 그 자리에서 같이 백 번도 넘게 들었다고 한다.],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 [[Imagine Dragons]]와 같은 음악도 즐겨 듣고[* 인터뷰에서 어떤 음악을 즐기시냐는 질문에 빌보드 차트에 있는 음악을 주로 듣는다고 답변한 바 있다. 물론 옛날 노래도 많이 듣는다고 덧붙였다.]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또한 진짜 립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가수 중 조용필을 언급했다는 데서 그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게 된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110501031830030004|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다. == 여담 == *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981년에 [[http://blog.daum.net/634756/17203847|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로맨스 영화[* 내용에 로맨스가 들어가긴 하는데, 실상은 조용필의 노래를 소재로 만든 음악 영화이다.]에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 상대역은 [[유지인]]이고, 위대한 탄생 멤버들도 출연했다. 훗날 조용필은 이때의 경험이 너무나 쑥스러워서 두 번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http://blog.naver.com/grappler39/10025604352|다른 포스터]] 이 영화는 이후로 묻혀져서 그야말로 보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다가 2009년에 팬들이 소규모 재상영을 가졌다. 그래도 [[한국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보관하고 있어 이따금 틀어주기도 한다. 근래 상영은 2017년 10월 18일과 20일로 되어있다.[[https://www.koreafilm.or.kr/movie/PM_007081|#]] * 트로트 가수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원래 락 밴드로 시작했고 지금도 본인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이다. 포지션은 리드 기타는 아니고 세컨드, 리듬 기타이다. 반 세기를 해 온 만큼 기타 실력 또한 뛰어나며, 2000년대 이후에는 기타라스트임을 강조하지 않고 있지만, 기타 연주(특히 [[전기 기타]]) 잘 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던 80-90년대 앨범이나 위대한 탄생 공연 포스터에는 대부분 기타를 들고 있다. 물론 현재도 공연 중에 자주 기타를 든다. * 조용필의 노래 허공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래'''며 이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혜수]]가 출연'''했다.[[http://www.youtube.com/watch?v=NC1OrPvK7us|#]][* 상대역은 조용필 본인이다. ~~그 사랑, 한이 되어에 이은 두 번째 연기다.~~] *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 때 [[신해철]]이 속해있던 [[무한궤도(밴드)|무한궤도]]의 곡 '[[그대에게]]'의 강렬한 전주에 꽂혀 바로 대상감으로 점찍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실제로 무한궤도가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대에게]]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그대에게'의 전주는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신해철]]의 전략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왕'''에게 먹혔으니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youtube(SaSK2pEbkgY, width=400, height=300)] *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용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서울 서울 서울'을 만들었으며 본인이 직접 88올림픽 D-100기념 축제에서 밝혔다. 다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곡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곡 자체는 주제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 구성되어있다. [youtube(zNXctKc4gkA, width=400, height=300)] * 한때 일본에서도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1990년대]] 초, [[한류]]라는 단어조차 형성이 안 됐을 때, 이미 조용필은 일본인에게도 잘 알려진 한국의 가수였다. [[엔카]], [[록 음악]], [[발라드]] 등의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엔카 가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想いで迷子(오모이데마이고, 추억의 미아)'[* 이 곡의 작사가와 작곡가는 [[めだかの兄妹]]로 유명한 아라키 토요히사(荒木豊久)와 미키 타카시(三木たかし, 본명 渡邊匡)다. 이 곡 외에도 조용필이 일본에서 발표한 곡들의 작사와 작곡을 맡았다.]는 전국적으로 대히트, 일본 내에서 100만장 이상을 판 플래티넘이 되었다. [[1994년]] 기준으로 일본 내 조용필의 음반 누적 판매량은 공식적으로 600만장, 비공식적으로는 800만장이라고 하나, 이는 과장된 면이 많다. 우선 조용필의 일본 내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는 1986년에 발표된 후 1987~1988년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은 히트곡은 맞다. 오리콘 주간 최고 순위는 13위이지만 1988년까지 꾸준히 팔려 1988년 오리콘 싱글 연간 차트 35위를 차지하였다.[* 1980년대 당시는 오늘날처럼 온라인 예약이 활성화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간 최고 순위는 그저 그렇지만 꾸준히 팔려서 연간에 드는 경우도 흔했다. 엔카 음반은 오늘날에도 비슷한 추이를 보이는 음반들이 꽤 된다.] 그러나 100만 장이 팔렸다는 것은 과장이 심하게 들어간 것이다. 일단 1988년 연간 차트에서 '想いで迷子'가 기록한 판매량은 [[http://the-musicbox.net/japan_singles_1988.html|21.8만 장]]이다. 그런데 '想いで迷子'는 1986~1987년 연간 차트에는 못 들어갔고, 1986년, 1987년 연간 차트의 50위 작품 판매량은 19.3만 장과 15.3만 장이다. 즉 '想いで迷子'가 1986~1987년에 연간 50위권에 아슬아슬하게 못 들어갔다고 가정해도 총 판매량이 19.3+15.3+21.8=56.4만 장을 넘을 수가 없다.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가 이 정도고, 또다른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26만 장 정도가 팔렸다고 하니, 조용필의 총 음반 판매량이 600만 장을 넘었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조용필의 소속사 측이 일본 내 인기를 과장/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본에서의 음반 판매 기록으로는 [[김연자]]가 더 많이 팔았다. 1980년대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잘 알려진 남성 트로트 장르 가요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는데, 조용필 이후 일본에서의 인지도 1위 남성 트로트 가요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김정구 사후 '눈물 젖은 두만강'이 점점 잊혀 가고 있는 데 비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아직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 그 외에 조용필은 '想いで迷子' 외에도 '夢夜舟(꿈의 밤배)', '愛の共犯者(사랑의 공범자)', '紅い落葉(붉은 낙엽)', '悲しみのゆくえ(슬픔의 행방)' 등의 여러 곡을 발표했다. || [[파일:DdymRZGVQAA-qZ2.jpg|width=100%]] || || 일본 활동 당시 1987년 KBS 가요대상에서 [[마츠다 세이코]]와 인터뷰하는 조용필 || * 다만 일본 활동 당시 판매량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을 대표하는 인기 가수로서 사실상 국가대표급 대우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한국 쪽의 푸시도 엄청났는데, 당시 일본 인기 엔카 가수들을 한국에 초청해 합동 공연을 열기도 했고 한국 지상파에도 나왔다. 그리고 인기 엔카 가수들이라고 보기도 무리도 많은게 가장 친했던 다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나카지마 미유키와 같은 장르를 하는 뮤지션이다. 본의 아니게 엔카 느낌의 노래를 만들기는 했지만, 본질은 사다 마사시와 나카지마 미유키처럼 포크 가수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당시 일본 가수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라 임팩트가 컸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임팩트가 컸는지 반대로 일본 문화가 다시 한국을 파고든다며 이를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필이 초청한 일본 가수들과 친분이 있는 일본 가수들은 일본 내에서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고 또한 추억의 가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절친인 다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いい日旅立ち(좋은 날의 여행)', '昴(묘성)'과 같은 세기의 명곡들을 남겼으며, 특히 'いい日旅立ち'는 불세출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꼽히며[* 1979년 [[일본국유철도]]의 DISCOVER JAPAN 캠페인의 BGM으로 쓴 노래로 유명하다.], 그 작사 작곡을 맡은 게 다름아닌 다니무라 신지였었고 또한 조용필도 'いい日旅立ち'를 불렀다. 또한 호리우치 타카오, 모리 신이치, 후세 아키라[* [[올리비아 핫세]]의 두 번째 남편으로 유명하고, 재일교포설도 있던 가수다. 'カルチェラタンの雪(카르체라탕의 눈)'을 부른 가수로 조용필이 음반으로 발매한 적이 있다.] 등과도 친했으며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가창력을 보인 가수들이었다. 그로 인해 조용필을 좋아하는 노인들 중에서 조용필로 인하여 일본 노래를 접한 사람들도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도 한류가수들의 인기의 척도로 종종 거론되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1987~1990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최후의 출연이던 1990년 같은 경우 서울 [[롯데월드]] 현지 중계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부른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참고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 [[기네스북]]에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외국 가수의 노래'로 등재되었으며(약 30회 이상) 일본 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에 진출한 한국배우/한국가수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2002년 20대를 겨냥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위) ~~허나 직후 [[배용준|욘사마]]가 센세이션하게 뜨고 이후엔 K팝이 일본을 강타하면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 [[천재]]라고 불리는 비운의 가수 [[유재하]]의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 음반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당시 새파란 20대의 청년이던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너 곡 좀 써봐라'''라고 이야기 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유재하가 참여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혼자서 있는 곡 다 가져다줬는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어서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겨울을 나갔다고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밝혔다. 이때 김현식에게 가져다준 곡은 명곡인 '가리워진 길'이다. 그 10곡은 이후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이자 그의 유작 음반이 된다. * 조용필은 대중문화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들이 보는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조차도 조용필의 '[[친구여]]'라는 노래가 나온다.[* 2화 초반에 나오며 극 상에는 '조용팔'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리고, 친구여 이후에 [[전영록]]의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도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 노래도 한 시대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했던 대히트곡이었다.] 그 노래를 들은 둘리는 감격하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눈물을 쏟는다.(...) ~~허나 이 곡을 [[마이콜]]이 부른다면?~~ * 1980년대 엄청난 인기 가수였지만 당시 연예인을 무시하던 사회풍조 탓에 황당한 시비도 많이 당했다.[* 지금은 작고한 중견가수였던 고 박상규 역시 경험했던 적이 있다. 공연이 끝나고 한적한 곳에서 식사중 그 지역 불량배가 와서는 너 혼자 쳐먹냐는 식으로 반말짓거리로 시비를 걸길래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는데 그래도 시비를 계속걸자 홧김에 주먹을 날렸더니 마치 고목나무 쓰러지듯 넘어졌다고 한다. 후일 후배들이 이 사건을 얘기하면서 '대단하다'고 하니 박상규 왈, "그 친구가 약하니까 단방에 간거지 뭐."라고 했다. 지금이야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연예인이란 직업은 그야말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 풍토가 만연했었다. 만에 하나 자녀들이 장래희망을 연예인이라고 했다가는 '미쳤냐!?' 아니면 [[뿌리깊은 나무(드라마)|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이 일갈할 때 쓴 표현이 나올정도로 험악한 반응을 각오해야 했다. 연예인을 일컫는 멸칭이 '딴따라'였고 오죽하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주일]]이 '딴따라가 무슨 정치를 한다고'란 세간의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서 의정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1985년에는 카페에서 함께 술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72900209211006&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7-29&officeId=00020&pageNo=11&printNo=19637&publishType=00020|#]][* 바로 위에서 설명한 영화에도 이런 장면이 등장했다.] * 1991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KBO 리그]] 개막전에 초청되어 [[애국가]]를 열창하다가, 마지막의 '길이 보전하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잘못 부른 적이 있다. 본인은 '카메라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서'라고 해명했지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어쨌는지 이후 애국가를 부르는 초청 자리에는 가지 않고 있다. * 1993년 해운대 콘서트에서 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나, 1992년 서태지의 등장과 더불어 "슬픈 베아트리체", "고독한 러너" 등이 실린 14집과 "남겨진 자의 고독"의 15집이 흥행 실패하며 일시적인 침체기에 돌입했었다. 조용필 본인도 신해철의 음악도시에 출연해 이 시기를 가장 아쉬운 시기로 언급하기도 했다. 94년 안진현과 재혼 및 전담 밴드인 위대한 탄생과 재결합하며 비로소 방송 활동을 재개하며 16집 "바람의 노래"로 모처럼 대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후 1998년 올림픽공원에서 30주년 공연 콘서트 및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 공연이 흥행하며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1999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 공연(대중가수로는 처음)을 치르며 "가왕" 이미지를 굳혀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연말 마무리 콘서트장으로 삼았다. * 2003년 데뷔 35주년 공연부터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즐겨(?) 개최하기 시작한다. 2005년에 북한 공연 이후 다시 잠실 공연을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 2003년과 2005년 모두 제대로 비를 만나는 바람에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스탠딩으로 물 반 땀 반 야광봉을 흔들었다. 조용필 본인도 05년 공연은 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중간에는 스스로 신난 나머지 "비 상관없지 않아요??" 드립을 시전하시다 "비가...음... 조금 덜 오네요" 라고 민망해하며 수습하기도 하였다. (팬들에게는 이런 썰렁함이 매력이기도 하다.) 뒤로는 다행히도 비는 피했으나 2018년 5월 12일 50주년 콘서트때 [[http://entertain.naver.com/ranking/read?oid=052&aid=0001144859|하루종일 비가 왔다.(...)]] * 2010년 5월 28~29일 열린 콘서트(Love In Love) 에서 잠실 주경기장에 1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하루에 5만명씩 총 1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60세의 나이에도 라이브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역시나 황제라는 것을 보여줬다. 관객들은 대부분이 4~50대였지만, 노래를 부를 때 열광하는 건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고 한다. 특히나 본 공연의 수익금은 소아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기부하여졌다는데, 그 액수만도 수십억원대라고 한다.[[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0&no=310644|#]] * 어쩌다보니 군가 [[진짜 사나이]]를 널리 알린(?) 가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에는 음반 발표시 꼭 [[건전가요]](...)를 넣도록 되어있었는데, 7, 8, 9집에다가 건전가요로 진짜 사나이를 자신이 직접 불러넣어둔 것이다. 다만 재발매본에서는 빠져있다.[*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되지만 당시엔 가요 음반마다 널리 알려진 가곡이나 동요들이 1곡씩은 꼭 들어 있었다. 조용필의 경우에도 [[겨울나무]]가 있었던 적이 있고, [[변진섭]]의 1집에도 [[과수원 길]]이 수록되어있었다.] * 조용필 콘서트에 갔었던 아티 콘펠드의 말로는, 조용필의 [[우드스탁]](미국 오리지널 말고 한국에서 개최된 우드스탁을 말한다)의 참가는 그의 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가수 가운데 이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 락의 대부인 [[신중현]]이나 조용필 스스로도 존경하는 가수라고 밝힌 [[패티 김]] 정도다.[* 한국 스탠더드 팝 최고의 디바로 불린 가수로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 조용필 이후 한국인 두 번째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한 가수로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지만 2012년 2월 15일에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고 6월부터 은퇴 공연을 갖는다. 대표곡만 해도 600곡 이상이 되는 가수.] 재미있는 사실은 패티 김은 자신에게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진정한 국민가수는 조용필과 [[이미자]]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는 것이다. * 1980년대 후반 '''연말 시상식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유는 알다시피 '''조용필의 독주 체제에 제동을 걸만한 가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 MBC의 가수왕자리를 계속 차지했는데[* 당시 KBS는 전년도 대상 수상자가 나와서 발표를 했는데, 3년 연속 대상을 타던 1983년에는 본인도 헛웃음을 지으면서 [[http://youtu.be/ee3RCWSf_X4?t=5m10s|"접니다...조용필"]]이라고 발표했다.], 예외적으로 MBC에서 1982년 [[이용(가수)|이용]][* 이때 이용의 가수왕 수상이 말이 많았다. MBC에서는 팬들의 우편에 의한 투표로 비밀집계로 가수왕을 뽑았는데, 성난 조용필의 팬들이 투표 공개를 요청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MBC는 말도 안되는 해명을 하는데, 그 이유가 조용필은 너무 많은 상을 탔기 때문에 다른 가수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작을 했다는 것을 MBC가 인정했던 셈이다.], KBS에서 1984년에 [[김수철(가수)|김수철]], 1986년에 [[전영록]]이 가수왕을 차지했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기도 했다. *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였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자에게 골든컵을 준 다음 명예 졸업을 시키는 시스템은 조용필의 히트곡이 1위를 너무 독주해서 그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사실상 그 이유가 맞다고 봐야 한다. 골든컵이 처음 도입될 때는 5주가 아니라 10주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 2011년 4월 15일엔 작년에 한 약속[* 영국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소록도에 방문 공연을 했었다. 조용필은 약속된대로 그 연주에 맞춰 본인의 잔잔한 대표곡 2곡만을 불렀는데, 노인들이 너무 아쉬워하자 곧 다시 공연을 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을 지키기 위해서 '''[[소록도]]'''를 방문해 공연을 했다. 2009년 전남 고흥과 소록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위문차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개드립|약속]]을 했는데, 진짜 다시 방문한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소규모 강당에서 즉석에서 요청곡을 받고 중간에는 무대에서 내려와 같이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노래를 부르는 등 주민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416031525565&p=chosun&scrollTo=writeForm|#]] * 2011년 5월 7일 서울 [[올림픽공원(서울)|올림픽공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2개월간 전국 투어를 열었다. 이번에는 관객 앞으로 움직이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1년 [[http://sports.donga.com/Feed/EnterKisa/3/02/20111228/42933940/3|올해의 콘서트 티켓 최다 판매 가수]]의 기록을 세웠다. 2위는 [[이승철]]인데 이승철이 29회 공연한 반면 조용필은 이에 절반인 14회 공연만으로 티켓 파워에서 앞섰다. * '나는 조용필이다'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생각하면 MBC프로그램들과 인연(?)이 꽤 있는데 결국 2011년 9월 25일 [[나는 가수다]]에 특별출연했다. * 2013년 4월 23일 정규 19집 [[Hello(조용필 음반)|Hello]]의 발매가 확정되었다. 4월 16일 선공개곡 'Bounce'가 발표되었는데 발표되자마자 음원차트 1위를 찍었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가수가 차트 1위를 탈환한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전무하다. 진짜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LP]]로 데뷔하여 [[카세트테이프]]와 [[CD]]를 거쳐 디지털 음원까지 석권한 가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음원 소비 연령대를 분석한 [[http://star.mk.co.kr/new/view.php?mc=ST&no=298911&year=2013|멜론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의 여타 [[히트곡]]과 비교해도 소비자층의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조용필의 [[히트곡]]을 듣고 자란 4~50대에 한정된 호응이 아닌, 음원 차트의 주요 소비자이면서 조용필을 잘 모르는 10~20대가 듣기에도 충분히 먹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인 셈. 말 그대로 국민가수다. * 2013년 4월 23일 19집 전곡을 발표하면서 쇼케이스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오프닝으로 [[국카스텐]]이 '[[모나리자]]'를 불렀고, [[박정현]]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자우림]]은 '[[꿈]]'을 열창하면서 가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특급 가수를 오프닝으로 세우는 가왕의 위엄을 볼 수 있다.~~ * 2013년 5월 3일. 23년 전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로 23년 만에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으로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나이가 2013년 기준으로 '''63세라는 진갑을 넘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돌들이 강세를 보였던 가요프로'''에서 60대 최고령 가수로서는 최초로 1위를 차지하게 된 이례적인 사례다. ~~[[가요무대]]와 [[뮤직뱅크]]를 동시에 섭렵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가수다.~~ ※날짜순 정렬 || 날짜 || 곡명 || 방송사/방송명 || 비고 || || 1981.02.10. ||<|7> '''촛불''' || KBS 가요톱10 || (모든 방송사 통틀어) 순위제 신설 이후 초대 1위 || || 1981.02.17. || KBS 가요톱10 || - || || 1981.02.24. || KBS 가요톱10 || - || || 1981.03.10. || KBS 가요톱10 || - || || 1981.03.17. || KBS 가요톱10 || - || || 1981.03.24. || KBS 가요톱10 || - || || 1981.03.31. || KBS 가요톱10 || 7주 1위 || || 1981.10.13. ||<|6> '''미워 미워 미워''' || KBS 가요톱10 || - || || 1981.10.20. || KBS 가요톱10 || - || || 1981.10.27. || KBS 가요톱10 || - || || 1981.11.03. || KBS 가요톱10 || - || || 1981.12.22. || KBS 가요톱10 || - || || 1982.01.05. || KBS 가요톱10 || 6주 1위 || || 1982.08.18. ||<|10> '''못 찾겠다 꾀꼬리''' || KBS 가요톱10 || - || || 1982.08.25. || KBS 가요톱10 || - || || 1982.09.01. || KBS 가요톱10 || - || || 1982.09.08. || KBS 가요톱10 || - || || 1982.09.15. || KBS 가요톱10 || - || || 1982.09.22. || KBS 가요톱10 || - || || 1982.09.29. || KBS 가요톱10 || - || || 1982.10.06. || KBS 가요톱10 || - || || 1982.10.27. || KBS 가요톱10 || - || || 1982.11.03. || KBS 가요톱10 || 10주 1위 || || 1983.01.12. ||<|5> '''비련''' || KBS 가요톱10 || - || || 1983.01.19. || KBS 가요톱10 || - || || 1983.01.26. || KBS 가요톱10 || - || || 1983.02.02. || KBS 가요톱10 || - || || 1983.02.16.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3.08.28. ||<|5> '''나는 너 좋아''' || KBS 가요톱10 || - || || 1983.09.11. || KBS 가요톱10 || - || || 1983.09.18. || KBS 가요톱10 || - || || 1983.09.25. || KBS 가요톱10 || - || || 1983.10.02.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4.02.12. ||<|5> '''친구여''' || KBS 가요톱10 || - || || 1984.02.19. || KBS 가요톱10 || - || || 1984.02.26. || KBS 가요톱10 || - || || 1984.03.04. || KBS 가요톱10 || - || || 1984.03.11.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4.08.05. ||<|5> '''정의 마음''' || KBS 가요톱10 || - || || 1984.08.12. || KBS 가요톱10 || - || || 1984.08.19. || KBS 가요톱10 || - || || 1984.08.26. || KBS 가요톱10 || - || || 1984.09.02.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4.11.04. ||<|3> '''눈물의 파티''' || KBS 가요톱10 || - || || 1984.11.11. || KBS 가요톱10 || - || || 1984.11.18. || KBS 가요톱10 || 3주 1위 || || 1985.06.19. ||<|5> '''어제 오늘 그리고''' || KBS 가요톱10 || - || || 1985.06.26. || KBS 가요톱10 || - || || 1985.07.10. || KBS 가요톱10 || - || || 1985.07.17. || KBS 가요톱10 || - || || 1985.07.24.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5.10.23. ||<|7> '''그대여''' || KBS 가요톱10 || - || || 1985.10.30. || KBS 가요톱10 || - || || 1985.11.13. || KBS 가요톱10 || - || || 1985.11.20. || KBS 가요톱10 || - || || 1985.11.27. || KBS 가요톱10 || - || || 1985.12.04. || KBS 가요톱10 || - || || 1985.12.11. || KBS 가요톱10 || 7주 1위 || || 1986.03.19. ||<|5> '''허공''' || KBS 가요톱10 || - || || 1986.03.26. || KBS 가요톱10 || - || || 1986.04.02. || KBS 가요톱10 || - || || 1986.04.09. || KBS 가요톱10 || - || || 1986.04.16.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6.11.05. ||<|3> '''바람이 전하는 말''' || KBS 가요톱10 || - || || 1986.11.12. || KBS 가요톱10 || - || || 1986.11.19. || KBS 가요톱10 || 3주 1위 || || 1988.01.20. ||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 KBS 가요톱10 || - || || 1988.10.05. || '''서울 서울 서울''' || KBS 가요톱10 || - || || 1989.05.21. || '''Q''' || KBS 가요톱10 || - || || 1990.08.24. ||<|6> '''추억 속의 재회'''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09.07.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09.14.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09.21.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09.28.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10.05. || MBC 쇼 네트워크 || 6주 1위 || || 2013.05.03. ||<|3> '''Bounce''' || KBS 뮤직뱅크 || 23년 만에 가요프로 순위제 1위 || || 2013.05.04. || MBC 쇼 음악중심 || - || || 2013.05.10. || KBS 뮤직뱅크 || 2주 1위 || * 조용필의 가요프로 1위 횟수는 (지상파 3사 기준[* 참고로 KBS는 1981년 2월 '가요톱10'으로부터 순위제가 시작되었고, MBC는 1989년 10월 말 '쇼 네트워크'로부터, SBS는 대충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음악방송 1위 기록을 모두 포함해 다음과 같이 무려 78회로 모든 가수들중 가장 많은 수상을 하였으며, Hello도 케이블 채널 MBC뮤직 '쇼 챔피언'에서 1위를 차지 했다. 1981년 mbc 밤의 힛트쇼 라는 순위 프로가 있었는데 고추 잠자리가 1위를 했으나 몇 주간 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선 2018년 4월 21일부터 3주 간 그를 직접 전설로 모셔서 특집 방송을 했다. * 특이하게도 노래방에서조차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실제 조용필과 노래방에 가본 연예인들의 말에 의하면 하나같이 조용필은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아예 2시간 동안 노래방에서 본인 노래만 콘서트 수준으로 부른 적도 있다고 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공짜 공연을 들은 셈이다.~~ * 2013년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신경영 20주년 기념만찬 축하무대에 초대되어 올해 나온 신곡을 비롯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노래를 불렀다. 그 후 이건희 회장과 포옹을 하기도 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3&aid=0002604231|#]] * 2013년 Hello 투어는 전반기와 후반기 투어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전반기는 주로 실내 체육관이였고 후반기는 야외 경기장 중심이였다. Hello 투어를 통해 그동안 방문이 뜸했던 지역에서도 엄청난 관객을 모았다. 아마 국내에서의 전국투어 단위로는 역대 최다 규모, 역대 최고령 전국투어 기록을 또다시 조용필이 거머쥐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반기 투어가 끝나고 쉬었다가 연말에 앵콜 투어로 또 공연을 가졌다. * 2014년에는 활동을 쉬었다가 건강회복 이후 2015년 11월부터 전국투어 공연을 다시 가진다. * 배우 [[안성기]]와 중학교 동창으로 서로 집에도 놀러갈 정도로 절친이라고 한다. 조용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때 같이 앉는 짝궁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성기 曰, '그 친구 키가 중학교 때 키 그대로'라고 한다. ~~한쪽은 가왕, 한 쪽은 국민배우 먼치킨 콤비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중학교 동창인 [[안성기]]와 나란히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외 구봉서와 패티 김도 받았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96&aid=0000272343|#]] [[2003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이후 개인 통산 두 번째 훈장이다. [[파일:attachment/dkstjdrlwhdydvlf.jpg|width=500]] * 꽤나 [[동안]]이다. 1950년생으로 곁에 있는 배우 [[안성기]]는 조용필보다 프로필 상 2살 연하다.[* 다만 위에서도 기술되었듯이 실제로는 동갑이다. 출생기록처리가 전산화 되기전에는 호적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꽤 있었는데, ~~꽤가 아니라 '''[[1980년대]]까지도 매우''' 흔했다.~~ 안성기가 1950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고 조용필과 중학교 동창이었으니 안성기의 실제 나이가 1950년생 또는 빠른 1951년생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노안에 가까웠지만[* 조용필 1집의 커버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조용필의 나이는 30살이었다.] 이후 나이를 먹었음에도 얼굴이 거의 안바뀌며 동안이 된 케이스. * [[유카와 마나부]]로 유명한 가수 겸 배우인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한국에서 제일인 가수가 조용필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비산초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이가 바로 조용필이다. 1978년 설립 이래 교가가 없다가 조용필의 조카인 조수지[* 10집의 'I Love 수지'의 모티브다.]가 이 학교에 재학할 당시 학교 측에서 조용필에게 교가의 작곡을 부탁했다고. 작사자는 초대 교장이었던 전정술 교장이다.[[http://anyangbank.tistory.com/393|#]] * 1953년생으로 알려진 가수 [[태진아]]보다도 3살 연상이다. 동안이다보니 태진아보다 아우가 아니냐, 태진아보고 형님이라고 불릴만 하겠다는 일설도 있으나 실제 연년상으로는 '''조용필이 태진아보다 3살 연상'''이고 태진아가 '''조용필 선배'''라고 부른다. 1952년생인 배우 [[이덕화]], [[이계인]]보다도 2살 연상이다. 무엇보다 상술했듯이 조용필과 함께 방송 출연이 뜸하기로 유명한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와 동갑이다. * [[엑소]], [[방탄소년단]], [[BIGBANG]]의 음악은 물론 공연도 [[유튜브]]를 통해 접하고 있고, 외국 뮤지션으로 [[시아 펄러|시아]], [[Alan Walker|앨런 워커]]도 즐겨 듣는다고 했다.[* http://archive.is/JonOT] 운전을 할 때에는 차 안에서 AFKN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고 하는데, 외국의 최신 팝음악을 들으면서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 기존 곡을 O.S.T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잘 허락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용을 허락한 영화들은 전부 천만영화에 등극했다.([[택시운전사]] '단발머리', [[신과 함께 인과 연]] '돌고 도는 인생') 게다가 18집 수록곡 '태양의 눈'을 이미지 송으로 사용했던 [[실미도]]는 한국 최초의 천만영화라는 기록을 남겼다. * 다만 최초로 허락을 받고 O.S.T로 사용된 곡은 단발머리가 아닌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라디오 스타(영화)|라디오 스타]])이다. 사실 천만 대박을 못 쳤을 뿐이지 나름 중박 흥행은 하고 관객 인지도도 높은 영화다. 당장 그 예능 '라디오 스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원전은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맞지만 이걸 다시 대중의 기억 밖으로 끄집어 낸 단초는 여기 서술된 동명의 한국 영화이다.] 게다가 주연배우인 [[박중훈]]과 [[안성기]]는 이 영화로 그 해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회식 때,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가 EDM 풍으로 편곡되어서 선수단 입장곡으로 나오기도 했다. * [[계몽사]]의 '학습만화세계사'에 패러디되어 등장했다. [[카스트 제도]]의 유래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수드라 계급의 할아버지와 손자가 수레를 몰고 가는데, 할아버지가 [[리그베다]]의 노래 한 구절을 부른다. 손자는 그 노래를 듣고 '가수 '''용피르'''가 부른 건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 당시 본인이 이끄는 밴드 인원들의 실수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다고 한다.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 2009년 11월 11일 방송에서 조용필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윤종신]]이 조용필이 본인의 밴드 일원들에게 무서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을 말하자, [[봄여름가을겨울]]과 [[이승철]]이 바로 긍정을 했다.[[https://youtu.be/wIDVeUU9wyg?t=767|#]] 또한, [[한밤의 TV연예]] 2010년 03월 21일 방송에서 조용필 특집으로 출연한 [[유영석]]이 한 일화로 조용필에게 "라이브에서 틀릴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 질문에 대해 조용필은 "그게 무슨 프로야?"라고 답했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thvl3cFDsJc&t=306s|#]] *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8년에 비틀즈 등의 팝 그룹에 빠져 살다시피 했는데[* 멘토 52 책에서 소개된 내용에 의하면 그러하다.], 대학 진학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음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말이 존재한다. * 한때 "기도하는"으로 시작하는 [[비련]]에 관련된 일화가 인터넷에 돌아다녔는데 당시 매니저였던 최동규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조용필의 팬이라는 14살 지체장애아에게 노래를 들려달라는 의사의 의뢰를 받자 일정이란 일정은 전부 캔슬하고 그 지체장애아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 비련을 불러줬다는 일화라고 한다. 이때 노래를 들은 아이는 처음으로 펑펑 울으며 감정을 폭발시켰고, 이에 감명한 부모가 사례비를 주며 감사를 표하자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 보다 더 비쌉니다'라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며 최동규란 매니저와 병원에서 노래를 불러줬다는 이야기는 허구이며, 오히려 병원에 찾아가 앨범을 주거나 팬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주는 등의 실존 일화가 와전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조용필의 소속사 역시, 뒤늦게 이런 과장된 이야기가 퍼진 것에 대해 당황했다고 한다.[[https://dailian.co.kr/news/view/356145s|#]] * 20집은 19집이 발매된 이후 콘서트를 하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하는데 신곡이 6~7개 나온 상태라고 한다. 19집과 달리 자작곡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된데다 [[코로나19]]로 인해 [[베이퍼웨어]]가 되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1542413|#]][[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80412/89571201/1|#]] 이후 2022년 4월 경부터 올해 안에 내는 것을 목표로 20집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온 상황이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20420/112978908/1|#]] * [[가족오락관]]의 MC로 유명한 [[허참]][* 2022년 2월 1일 사망하였다.]이 생전에 [[간암]]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3명 중 1명이었다.[* 나머지는 [[강진(가수)|강진]], [[이홍렬]]이었다.] === 결혼 === || [[파일:external/dimg.donga.com/6882637.1.jpg|width=100%]] || || 지금은 사망한 부인 안진현과 함께 찍은 사진 || 조용필은 1984년 3선 국회의원 [[박찬(1924)|박찬]]의 딸 박지숙과 결혼[* 여담으로 결혼식 장소는 이후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했던 장소로 유명한 [[봉선사]]다.]하지만 결혼기간의 갈등 끝에[* 음악에 지나치게 몰두했던 조용필과 가정에 충실해주길 바랐던 박지숙 간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4년만에 합의 이혼했다. 이혼 당시 대부분 재산을 양도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고 원만하게 이혼을 하여 별 추문 같은 게 없이 조용히 끝났다.[* 단 Q라는 명곡이 이때 나왔는데, 그 당시 조용필의 감정 상태를 유추할 수 있다. 여자에게 차인 남자가 부를 수 있는 끝판의 노래다.] 이후 그는 1994년 미국의 로비스트 출신인 안진현과 재혼했다.[* 이 당시 [[청와대]]에서 결혼식 내내 긴장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안진현과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이 친분이 있었는데 그를 대신해서 그의 사촌동생이 참석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앨 고어]] 부통령의 아내도 참석할 예정이었고 그래서 [[백악관]]에서 [[청와대]]에 정식으로 통보했었다고 한다.] 안진현은 조용필의 음악적 삶을 존중하며 내조하고, 그는 이러한 아내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결혼 5년만에 심장병에 걸린 안진현은 2003년 1월 투병 도중 사망하게 된다. 당시 안진현의 사망소식은 주요 언론매체에 의해 자세히 보도되었는데, 조용필은 장례를 치르는 내내 핼쑥한 모습으로 상주를 서다가 간간히 오열하는 모습 등을 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내의 사망 이후 조용필은 상속액 전액을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으며, 현재까지 수익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조용필은 자녀를 두지 않았다. 첫 번째 결혼에서는 아내와의 불화가 원인으로 보이며, 두 번째 결혼에서는 둘 다 만혼이라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03년 18집에 수록된 노래 '진(珍)'은 바로 아내를 그리며 작곡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용필이 잠실운동장에서 처음 공연을 한 35주년 기념 콘서트날 공교롭게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데 조용필은 이 노래를 부르던 말미 잠시 울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허경영]]이 2004년 10월엔 "[[개소리|가수 조용필의 부인인 안진현에게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면서 조용필을 상대로 50만달러의 매매대금 청구 소송을 냈다. 증인이 없으니 우기면 삥 좀 크게 뜯어낼 거라고 고인을 이용해서 이런 정신나간 소송을 했지만 어차피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어 패소했다. === 기부 === [[파일:external/img.etoday.co.kr/20130401142245_283876_500_184.jpg|width=500]] 그가 운영 중인 YPC프로덕션은 주주배당금 대신 기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덕에 기부금액만 연평균 3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기부를 엄청 많이 했다. 위에서 나와 있듯이 소속사의 주식배당금액의 일정부분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아내였던 안진현의 유산인 24억 원을 심장병 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를 했고 2009년에도 조용필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 원씩 기부하고 있다. 또한 콘서트 수익금 역시 매년 기부를 해 62억 원 상당의 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 영웅 중에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금액은 84억 원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스컴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본인의 성격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영웅적 면모 === 조용필은 지역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필은 음악이 하고 싶어서 가출을 했다. 집을 나왔다가 형한테 잡혀 들어갔다가 또 나오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 환경으로부터 오는 안락함, 안정감, 심지어는 가족과의 관계까지,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건 보통 열정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대중음악 그 자체인, 프로들의 무대인 미8군에 가기까지 독기 또한 보통이 아닌 것이다. 소위 잘 사는 집 자식이면 열정이 있더라도, 어떤 순간에는 열악한 환경, 치열한 경쟁에 지쳐 결국 포기했을법 한데 그런 시련을 그대로 이겨냈다는 게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끈기(독기), 그리고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1집부터(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2집, 3집을 꾸준히 냈다. 이 시기 언제쯤, 조용필 아버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지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거 같다. 기자가 함 알아봐주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말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조용필)은 100을 벌었다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 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고 한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에 그 모든 걸 재투자했다는 점이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1집부터 그런 대히트를 치는 것도 어려운데, 갑작스런 인기에도 묵묵히 재투자, 더 나은 음악을 위한 도전 등 진정 영웅적 면모를 갖춘, 타고난 슈퍼 스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후로도 나왔다하면 1등, 연말 대상이었다. 가요계는 조용필이 과장이 아니라 8할 이상이었다. 그리고 1987년, 공식적으로 연말 시상식 수상을 거부하는 결단을 보였다. 더 이상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미 1987년 이전의 활동과 히트곡만으로도 한국역사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뮤지션이 되었을텐데, 또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기 위해 콘서트로 본인의 주무대를 옮긴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TV는 상당히 열악한 사운드 시스템이었는데 조용필은 이에 대한 갈증과 불만이 상당했다. 뮤지션으로서 더 나은 무대, 더 나은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갈망한 것이다. 방송과 결별하며 그때동안 이뤄놓은 대중적 인기, 명예, 돈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음악적 진화만을 추구한 결단이었다. 조용필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뮤지션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한지 또 한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때부터는 선진화된 해외의 공연무대를 보고 분석하고 공부했다. 이때부터는 가수 조용필을 초월해 무대 총감독 역할까지도 겸하게 된다. 그전까지 국내 무대는 그저 조명 몇개 반짝반짝하고 진부한 폭죽 터뜨리기가 전부였다면 조용필 콘서트는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사운드부터가 달랐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느낄 수 있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 보든 화려한 조명, 그리고 무빙스테이지, 어마어마한 규모. 해외의 일류 공연을 그대로 모방해왔기에 모든 게 달랐다. 음악관계자들은 물론 뮤지컬이나 연극쪽에서도 조용필의 무대를 참고하고 분석했다고 한다. 초기 몇 년은 티비에서 안보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고, 그때만해도 가수를 직접 보러 콘서트에 간다는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다. 그래서 관객이 좀 적었는데 그럴수록 더 돈을 쏟아부으며 무대에 집중, 아니 집착했다. 비로소 점점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당시에 밤무대에 나가서 노래 몇 곡을 부르면 수십 억을 준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현재로 치면 곡당 4~5천만원 선이다. 진정한 음악인으로 어떻게 음악을 대하는지도 알 수 있다. 최근 50주년 공연에도 무대에 3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데뷔 40주년까지 완벽한 정체성을 확립하며 활동해왔고 마침내 2013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다시 한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가 되겠다고 19집을 내놓는다. 'Bounce'는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 곡이 나올 수 있었던건 아직까지도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을 수십년 해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나 감을 잃지 않고 EDM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순히 한국 아이돌을 참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앨런 워커, 시아 등을 즐겨듣는다니 완전히 젊은 뮤지션과 아이돌과 경쟁하는 가수. 이 모든 것은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자세,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돌이켜보면 조용필은 늘 새롭게 배우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민요, 판소리를 접목시킨 곡도 있고, 뮤지컬, 오페라와 접목한 노래도 있다. 한때는 뮤지컬을 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비록 그런 음반이 대히트까지는 치지 못했어도 그런 끊임없는 시도, 도전이 그를 발전시켰다.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변화, 혁신을 추구하는, 더 나은 차원으로 가려는 뮤지션으로서의 순수한 갈망이 엿보인다. 그냥 한마디로 조용필은 한 평생 음악에 미쳐있는 음악 중독자고, 음악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뮤지션이다. 그의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조용필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 승부사적 기질, 그리고 19집 === >'''Hello 티저를 보는 순간 그 감각에 놀랐다.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시도로 대중을 열광시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조용필의 음악으로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고, 후배들에게도 이정표가 돼주셨다. 그런 면에서 존경하고, 부럽고, 배우고 싶다.'''-[[이승철]] 2013년 45주년을 맞아 조용필이 19집을 발표했는데 대한민국 전체에 바운스 열풍을 일으켰다. TV 가요프로에 출연 하지 않고도 1위를 했다. 결국 연말 결산에서 조용필의 'Bounce'가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었는데, 2위가 싸이의 젠틀맨, 3위가 크레용팝의 빠빠빠, 4위가 EXO의 으르렁, 5위가 아이유의 분홍신이었으므로 정말 가요계가 쟁쟁했던 한 해 였다. 심지어 싸이의 젠틀맨으로 말하자면 '''[[강남스타일|그 노래]]'''의 후광으로 발매 이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노래였다.[* 물론 성공한 노래지만 실제로 2013년 최고의 흥행을 거둔 노래라고 하기엔 성적이 아쉬운 편이다. 실제로 멜론과 가온에서의 연간차트에서의 성적은 아쉬운 편이다.] 이런 엄청난 음반을 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음악평론가 강헌은 "19집의 음악성 자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기보다, 최고의 슈퍼 스타지만 또 한번 이런 시도를 했다는거 자체가 '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쓰러지겠다'라는 조용필의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했다. 이미 수많은 세월을 최정상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또 한 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전하고 모험하는 자세를 가진 것이었다. 비록 19집이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비록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어쨌든 본인은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고 쓰러지겠다는 그런 승부사적 기질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본인이 음악적으로 지향하는 가야할 길을 갔기에 뮤지션으로서 상당한 의의를 가지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한 시대에 잘 나가다가, 한 두 번 정도 앨범이 히트를 못치면 그 이후에는 엄청난 음악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그 이후엔 두려워서 앨범 발표를 못하게 되는데 조용필은 언제나 그렇듯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비록 중간중간에 대히트까지는 못 친 앨범들도 있지만 본인의 음악적 진보를 위해서 거침없이 도전했기에 결과론적으론 발전하게 되었고 차후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도가 수십 년 이어져 오면서 19집은 또 한번 어떤 기존의 틀을 다시 한번 완전히 깼고, 10대, 20대에게까지 신선함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조차도 열광하게 만들었다.조용필은 19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그런 자세로 준비했다."라고 했는데 으레 가수들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난 이렇게 전략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다."라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10대, 20대는 조용필이라는 사람을 들어는 봤지만 그 가수가 어떤 노래를 하는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자세히는 모르기 때문이다. 19집을 발표하게 되면 조용필은 베테랑 가수지만 그들에게는 신인으로서 다가가게 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준비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런 점을 긍정적인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요즘 트렌드에 맞는 곡을 하나 낼 뿐인데 자신이 내면 틀을 깨는 게 되고 반전의 효과가 극대화되니까 말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하면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나 판단하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youtube(QXrIvlzu1SQ)] 한편으로, 'Bounce'는 초창기 1980년대보다 더 의의가 있는 우리 가요사의 정말 한 획을 그은 의미있는 곡이다. 예를 들어 1집 당시, LP를 한장 사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아빠, 엄마는 '창밖의 여자'를, 아들, 딸은 '단발머리'를 듣는다 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라 하였는데, 'Bounce'는 단 한 곡으로 세대를 통합했으니 말이다. 2013년에 빌보드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youtube(sCTj3npCipo)] === 가왕의 눈물 === [youtube(zpz4zYFYjZo)] 1993년 세종문화회관 공연 중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부르는데 여러 설이 있다. 당시에 공연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해서라는 말도 있고, 앵콜을 10번 가까이 받아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저 곡 이전에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를 부를 때도 약간 울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자 쪽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냥 마음 편하게 둘 다라고 믿으면 된다. [youtube(nNKMwdLevuY)] 2018년 대구 콘서트 중 '''오로지 음악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가왕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에서 가왕과 팬들의 눈물바다가 된 50주년 투어 [Thanks to you]의 명장면 중 하나다.''' 팬클럽 단관석쪽으로 나와서 관객들과 소통하며 얘기를 주고 받다가 비련을 부르기 시작했다. 1절에서부터 약간 그런 낌새를 보였는데 2절을 통으로 날렸다. 수십 년 한결같이 본인에게 열광해주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과 한편으로는 그 젊었던 소년소녀들이 이제 늙은 중장년층이 되었다는데서 오는 서글픔 등 만감이 교차하여 흘렀던 눈물이 아닐까 싶다. == 기록 == '''음악차트 및 음악 시상식''' * '''역대 가요대상 최다 수상자(총 12회)'''[* 2위는 총 11회 수상의 [[김건모]]며 3위는 총 10회 수상의 [[조성모]]다.][* 이마저도 조용필이 더 이상 가요 대상을 수상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결과다.] * 역대 음악방송 통산 1위 횟수 2위(총 78회)[* 1위는 83회를 수상한 [[방탄소년단]]이다. 물론 당시 지상파 음악방송 순위제가 가요톱10 한 곳 뿐이고 그나마도 1위 횟수에 제한을 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이 한 편이다.] *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 보유''' : 조용필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결과다. [[LP]], [[카세트테이프|테이프]], [[CD]], [[음원]]에서 모두 차트 1위 곡을 가진 유일한 가수다. 아쉽게도 2000년대에는 콘서트에 집중해서 정규앨범은 2003년의 'Over The Rainbow' 음반 단 한 장만 발표했으므로 이렇다 할 차트 기록이 없다. *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곡당 '''1위 횟수 제한의 계기''' 제공(1983년) : [[KBS]] [[가요톱10]]에서 '못찾겠다 꾀꼬리'가 10주 연속의 기록을 세우면서 나타나게 된 제도다. * KBS 라디오 '''24주 1위'''-고추 잠자리 : 6개월 동안 1위 기록 * 인기순위 '''동시 최다곡 진입'''(20위안 TV-4곡, 연예지-6곡) * 라디오 트롯부문/비트롯 부문 1위 동시 차지 : '타인', '마도요' * TV가이드 1985년 12월 '''가요 순위에 1, 2, 3위''' -최다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왕 수상 6회(1980년, 1981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 KBS '가요대상' 최고 인기가수상 수상 4회(1981년, 1982년, 1983년, 1985년) * TBC '방송대상' 최고 가수상(1980년) * 가수최초 [[명예의 전당]]에 등재-MBC(2000년) * 제 1회 골든디스크상 대상(대상과 본상, 인기상을 모두 석권)-(1986년) '''콘서트''' * 국내 최대 인파 동원한 야외 Concert-해운대 '''10만명 이상'''(1993년) * 가수 최초 월드컵 경기장 투어[* 월드컵 경기장을 꽉 차게 만드는 공연을 하려면 최소 2~3만명 정도는 불러모으는 티켓 파워를 가져야 하는데, 서울을 제외하면, 인천, 수원 등 수도권 중에서도 서울과 가까운 지역이 아니고서야 이만큼의 관중을 불러모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특히나 지방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야말로 조용필만이 가능한 공연이다.]-2005년(30여만 명 동원) * 세계최초 7.2서라운드 콘서트-(2007년 12월) * 국내 대중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홀 공연(1980년) * 국내 대중가수 최초 공산국가 중국 '''베이징 공연(냉전시대, 국교 전 1988년)''' * 국내 대중가수 최초 예술의 전당 'Opera hall Concert'(1999년) * 한국가수최초 평양(북한) [[류경정주영체육관|류경체육관]] 단독공연(2005년 8월 23일) * 국내가수 공연 최초 첨단영상 프로젝트 PIGI영상 사용 * 국내최초 모노, 스테레오, 서라운드 형식공연-예술의 전당(1999년) * 예술의전당 개관(1993년) 이후 최고치 기록갱신-'''유료판매율 1위'''(87%) * 예술의전당 개관(1993년) 이후 20년간 가장 높은 '''예매율(104%)''' 기록(2008년) * 한국인 최초 범 아시아 콘서트-팩스뮤직카-(1984년~2004년간 11회) * 국내가수 최초 (조용필) 콘서트 신탁 탄생(2008년) *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콘서트 기록-스태프 5천 200여명, 스피커 300대, 초대형 스크린 등 잠실 주경기장 공연 횟수도 7회로 압도적(2003년 35주년 콘서트, 2005년 필앤피스 콘서트, 2008년 40주년 콘서트, 2009년 평화기원희망콘서트[* 다만 이 공연은 국제평화마라톤대회의 축하 행사로서 무료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단독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6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가왕의 위엄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 2회[*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해 마련한 유료 콘서트로 2010년 5월 28~29일 양일간 총 10만명을 동원하여 대한민국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유료 관객의 기록을 쓴 공연이다.], 2018년 50주년 콘서트 Thanks to you) * 대한민국 유료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관객을 동원한 공연-2010년 LOVE IN LOVE[* 하루에 5만명씩 2010년 5월 28일~29일 양일간 총 10만 명을 동원하였다. 특히나 이 공연의 수익금을 500여 명의 소아암 어린이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했다.][[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0&no=310644|#]] '''수상 및 설문조사 기록''' * '''한국 20세기 최고가수로 선정 및 수상-(설문조사 1위, 1999년)''' * 광복60년 영향력 있었던 인물 1위(연예인 부문)-한국일보 &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 * MBC 선정 정부수립 50년 최고의 스타상 '가수부문' 수상(1998년) *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로 선정-조선일보 & 한국갤럽 조사(1998년) * [[네티즌]] 설문, 통일 후 북한에서도 통할 가수 1위(2000년) * '''[[탄자니아]]로부터 [[문화훈장]]''' 수훈 (2001년)[*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탄자니아를 알린 것이 바로 그 계기다. 킬리만자로 산은 실제로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 지대에 위치해 있다.] *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 수훈(2003년) * 대한민국 역사 움직인 100인에 선정(문화 부문)(2007년) * 한국 브랜드가치 설문조사 가수부문 1위(2003년) * '''과소 평가된 아티스트'''-여론조사 1위(2003년) * 대한민국 100대 명반 두 장 선정-조용필 1집(29위)/조용필 7집(76위) * M.net 레전드100 가수 종합 평가 1위-(2013년) '''앨범 및 싱글''' * 국내 최초 단일앨범 100만장 돌파(기네스 인정, 1991년) * 국내 최초 '''음반 총판매량 1천만장 돌파'''(1994년, 1999년 현재 국내외 2천만 장 판매) * 최초 단일앨범 100만 장 돌파-"추억의 미아"(1986년) '''음악 및 음향''' * 한국 최초 M7(Major Seven) 코드 사용-3집 고추잠자리(1981년) * 한국 최초 Digital 녹음-6집(1984년) '''일본 관련''' * 일본 NHK [[홍백가합전]] 한국가수 최초 및 연속참가(1987~1990년) * 일본 NHK홀 외국가수 최초 Concert(1983년) * 한국인 최초 일본에서 골든디스크상 수상(2회-1984년, 1988년) '''기타''' *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교과서에 수록'''-친구여(5집) *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뮤직비디오 제작'''-허공(8집)[[http://www.pandora.tv/view/happyworld/48027868/#3703460_new|#]] * 대중가수 최초 학문연구회 발족-'''조용필學'''(Choyongpilogy)(1999년) * 1인 1기업 최초의 가수-필기획, YPC 설립 *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의 국내가수 팬클럽 '오빠부대' 탄생(자생적인 팬클럽) * 국내 방송 CF-최초 개런티 1억원 돌파(1987년) == 관련 문서 == * [[조용필/음반 목록]] * [[위대한 탄생]] [[분류:조용필]] [include(틀:포크됨2, title=조용필, d=2022-07-01 20:3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