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조용선}}}'''[br]'''趙龍善'''}}}}}} || || '''이명''' ||조승호(趙升琥) || || '''자 / 호''' ||성운(聖雲) / 소정(小亭) || || '''본관''' ||[[순창 조씨]][* 안토당공파 26세 선(善) 항렬. 족보명은 조기선(趙璂善).] || ||<|2> '''출생''' ||[[1894년]] [[2월 11일]][* 순창조씨 인터넷족보에는 2월 12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경상도]] [[문경시|문경현]] 신북면 고요리[br](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 || ||<|2> '''사망''' ||[[1981년]] [[5월 31일]][* 음력 4월 28일.] ||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440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4년 2월 11일 경상도 문경현 신북면 고요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에서 아버지 조원희(趙元曦, 1874. 6. 9 ~ 1947. 12. 14)[* 초명 조원목(趙元睦).]와 어머니 [[안동 권씨]](1872. 7. 19 ~ 1943. 2. 29)[* 권인묵(權寅默)의 딸이다.]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창성동(종로구)|창성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종로구)|창성동]]) 115번지[* 현재 이 지번에는 [[http://naver.me/5Fl8vTJG|서울경찰청 202경비대 청사]]가 들어서 있다.]에 거주했다. 그는 1919년 [[경기도]] [[수원시|수원군]]에서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시위 탄압에 총상을 입고 경기도 [[경성부]]로 피신했다. 이후 계속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7|전협]](全協)·[[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09|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윤인중(尹寅重)·송황규(宋黃奎)·홍인표(洪仁杓) 등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그러한 요지의 호소문 및 각종 선전물을 작성해 경성부 일대에 배포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도 겸해서 활동했다. 이후 1920년 4월에는 윤인중·홍인표 등과 함께 [[충청남도]] [[대전광역시|대전군]]·[[논산시|논산군]]·[[공주시|공주군]]·[[전라북도]] [[전주시|전주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 3,000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영진(金永津)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 내역은 곧 일본 경찰에 탐지되었고, 끝내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1월 21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119&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5084&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공갈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0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0457&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에 불복, 공소했으나 1921년 3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갈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9&evntId=0034970955&evntdowngbn=Y&indpnId=000000339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1981년 5월 21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별세했다. 이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6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문경시 출신 인물]][[분류:옥천(순창) 조씨]][[분류:1894년 출생]][[분류:198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