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명사)] 趙率敎 (1569 ~ 1629) [목차] == 개요 == [[명나라]]의 장수. == 행적 == === 초기 일생 === 산서 사람으로 [[만력제|만력]] 연간에 연수참장으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고 탄핵당했다가 요동을 수복하는 일이 급해 조서를 폐하고 가정(家丁)으로 보내 공을 세우게 했으며, 원응태 휘하에서 부총병이 되었다. 1620년에 요양이 함락되자 군사를 이끌고 도주했으며, 1621년에 왕화정이 광녕을 버리고 관외의 모든 성이 비었고 조솔교는 총병 왕재진에게 가정 38명을 거느리고 전둔을 탈환하러 가는 것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다. === 손승종이 눈여겨 보다 === 당시 몽고의 병사들이 차지해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중전소에 이르러 멈췄는데, 노의갑이 손승종의 명에 따라 6천 명의 난민을 구하고 전둔에 배치해 몽고 사람들을 모두 교외로 추방했다. 조솔교가 들어가서 난민들을 불러모으고 장정들을 군으로 편입하면서 약한 사람들은 개간하도록 하니 군대의 세력이 회복되었으며, 손승종은 기뻐해 자신의 수레를 조솔교에게 줬다. 몽골의 링단 칸은 총독 왕상건의 다스림을 받았고 그의 부하가 도둑질을 하자 조솔교는 4명을 죽였으며, 조솔교는 초무첨사 만유부와 틈이 생겨 만유부가 왕상건에게 과거에 조솔교가 전투에 패해 도주한 일을 알렸다. 왕상건은 병부상서 동한유에게 알려 조솔교를 참수하려 하자 손승종이 동한유에게 편지를 써서 조솔교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손승종이 관을 5부로 분할해 마세룡, 왕세흠, 우세록을 중앙, 조솔교를 전, 손간을 후부로 해서 1만 5천명씩 거느리게 했으며, 조솔교는 전둔에 주둔했고 1624년 9월에 조솔교의 공을 손승종이 조정에 알려 도독첨사로 선발되었다가 총병이 되었다. === [[영원성 전투]]와 금주대첩 === 1626년에 영원성이 후금의 군대에게 포위된 것을 틈타 몽고에서 평천, 삼산보를 침범하자 조솔교는 백여 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빼앗아 고대보까지 추격하고 돌아갔다. 도독동지로 승리하고 양기를 대신해 산해관을 지키도록 했다가 공을 논의해 우도독이 되었고 부천호 자리를 세습할 수 있도록 했으며, [[만계]]가 영원을 지킬 당시에 명망이 높고 서로 깊이 이해했다. 영원이 포위된 것을 알고 독사 1명, 수비 4명을 보내 지원했다. 만계가 그들이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싫어서 성 안으로 들여보내기를 거절했다가 [[원숭환]]이 달래서 들여보냈으며, 영원의 포위가 풀리고 전공을 나누려 하자 만계는 응하지 않고 직접 와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꾸짖으면서 서로 다투게 되었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조서를 내렸고 만계가 원숭환과 불화를 겪자 조정에서 만계를 불러들였으며, 다른 병진과 관외의 일을 조솔교에게 맡겼다. 1627년에 후금이 [[정묘호란|조선을 공격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삼차하에 진입해 견제했고 3월에 원숭환이 금주, 대릉하, 중좌소 등 3개의 성을 축조하려고 하자 조솔교는 금주의 공사를 지휘하고 좌도독에 임명되었다. 5월에 후금의 군사가 금주를 포위하자 부장 좌보, 주매 등과 함께 24일을 버텼고 후금군이 영원도 공격했다가 패하고 다시 금주로 온 후금군을 상대로 버텨내면서 후금군을 물러나게 하자 태자소부가 더해지고 자손을 금의천호로 봉해 세습할 수 있게 했다. === 후금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다 === 1628년 8월에 영평으로 자리를 옮겨 계진 8로를 다스리는 것을 겸임했고 9월에는 평료장군의 인수를 받고 관문으로 옮겼다가 1629년에 후금의 군사가 대안구에서 남하하자 조솔교는 급히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우러 달려가 도착했다. 총병 주국언이 들여보내려고 하지 않자 서쪽으로 급히 갔고 준화로 가다가 11월 4일에 후금의 복병을 만나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숭정제가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장례를 거행하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분류:1569년 출생]][[분류:1629년 사망]][[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산시성(산서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