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표절, version=1~2, source=한국어 위키백과)] [목차] == 개요 ==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은 1881년([[고종(대한제국)|고종]] 18년) (양력) 5월 7일부터 8월 26일까지[* 음력으로는 4월 10일부터 윤7월 2일까지] 1876년의 수신사에 이어 [[일본 제국]]에 파견되었던 '''조선의 문물 시찰단'''이다. 과거에는 근대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영향을 받은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는 명칭으로 위장하여 불린 것이 고착화되었으나, 한국사 용어 수정안에 따라 "조사 시찰단"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다. 시찰단의 단원들은 동래부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 실제로 조사시찰단중 이헌영 등 10명은 동래부암행어사로 정식적으로 임명되었고, 귀국 후 문견사건이라는 비밀 보고서를 고종에게 전달했다.]로도 불렸다. 개화파로 구성된 박정양을 포함한 60명이 파견되었으며, 비밀리에 파견되었기에 [[암행어사]]의 신분으로서 [[부산]]을 통해 뱃길로 [[도쿄]]로 향했다. == 배경 == 그 이전부터 일본의 시찰단 파견 권유(내지는 요구)는 계속 있어왔지만, [[강화도 조약]](1876)과 [[통리기무아문]](1880)의 설치, [[조선책략]]의 반향과 [[영남 만인소]]사건등으로 서구식 개혁에 대한 조선 국내 여론이 나빠지자 조선 정부는 1881년이 되어서야 '''비밀리에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게 된다. 조선측의 [[김홍집]]과[* 이후 김홍집은 같은 해인 1881년 11월,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된다.],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교섭하에 이루어졌다. 조사 시찰단의 파견비용은 조선정부가 전적으로 부담했다. == 여담 == 연표에 세심한 관심을 가진 역사학도들과 수험생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조선에서 태양력이 공인된 것은 1895년으로, 당시에는 태양력이 공인되지 않았으며, 1897년 이전의 일이므로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감때문에도, 시찰단의 성격 때문에도 조사 시찰단의 "조사"가 "조사하다"의 조사(調査)라 생각하지만, 아침 '조(朝[* '조선시대' 할때 조.])'자에 선비 '사(士)'자 쓰는, '조정 관료'라는 의미의 조사([[朝]][[士]])이다. == 관련 문서 == * [[수신사]] * [[영선사]] * [[보빙사]] [[분류:1881년/사건사고]][[분류:고종 시대/사건 사고]][[분류:조일관계]][[분류:근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