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귀족)] [include(틀:일본군/장성급 장교)] ||<-2> [[조선귀족|'''{{{#ffffff 조선귀족 남작}}}''']][br]'''{{{#fff {{{+1 조동윤}}}[br]趙東潤 | Cho Tong-yu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6e86cb5693.jpg|width=100%]]}}} || || '''이름''' ||조동윤 (趙東潤) || || '''본관''' ||[[풍양 조씨]] (豐壤) || || '''자''' ||우생(雨生) || || '''호''' ||혜석 (惠石) || || '''출생''' ||[[1871년]] ([[고종(대한제국)|고종]] 8년) || || '''사망''' ||[[1923년]] (향년 52세) || || '''직업''' ||[[군인]], [[관료]], [[정치가]] || || '''종교''' ||[[유교]](성리학) || || '''작위''' ||[[조선귀족]] [[남작]] || ||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군인]]이자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대한제국군]] [[부장]]([[중장]]), [[일본군]] 중장.[* 일본군으로 계급은 실질적인 [[지휘관]]이나 [[참모]]로써 계급은 아니었고 일괄적으로 받은 [[명예계급]]에 가까웠다.] == 생애 == 1871년 태어났다. 집안은 [[풍양 조씨]]였고 아버지 [[조영하]]는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게 살해되었다. 1887년(고종 24) 정시(庭試) [[과거 제도#문과|문과]]에 병과 1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7_014513|급제했고]]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조선군]]이 대한제국군으로 근대화되자 1897년 참령(소령)으로 진급했다. 육군법원장과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군주의 군사참모] 등을 지냈다. 1899년에는 부장(중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여러 무관직을 겸임하며 고종의 측근 중 한명이 되었다. 그는 [[을사늑약]] 당시 [[을사오적]]의 처벌 상소를 올리는 등 나름 항일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날로 거세지자, 친일파로 변질하여 한일병합에 적극 협조했고 [[일진회]]에서도 활동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남작]]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고종의 장례 때 치러진 일식 장례에서 부제관(제관 다음의 장례책임자)을 지냈다. 아들인 [[조중구]]가 작위를 [[습작]]했으며 자녀들이 사치를 일삼다 집안이 패가망신했다. 당시 부채가 무려 '''1만 4천엔'''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돈이다. [[파일:조동윤 남작.png]] [각주] [[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조선귀족 남작]][[분류:1871년 출생]][[분류:풍양 조씨]][[분류:수구파]][[분류:일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