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조기섭}}}'''[br]'''趙璣燮'''}}}}}} || || '''초명''' ||조세권(趙世權) || || '''이명''' ||조선(趙璿), 조준(趙濬) || || '''자 / 호''' ||상중(尙中) / 운사(雲史) || || '''본관''' ||[[옥천 조씨]][* 부정공-절민공파 22세. 족보명 조준(趙濬).] || ||<|2> '''출생''' ||[[1858년]] [[8월 20일]][* 옥천(순창)조씨 전자족보에는 1868년 8월 30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전라도]] [[순천시|순천도호부]] [[주암면]] 죽림리[br](현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 [[옥천 조씨]] 집성촌이다. 인근의 오산리, 복다리, 문길리, 구산리, 주암리, 어왕리, 백록리, 대구리, 궁각리, 요곡리, 대광리, 한곡리에도 옥천 조씨가 많이 살고 있다.] || ||<|2> '''사망''' ||[[1958년]] [[10월 15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52년 5월 12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향년 100세) || ||[[전라남도]] [[곡성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91호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58년 8월 20일 전라도 순천도호부 주암면 죽림리(현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조병선(趙秉善, 1826. 11. 12 ~ 1893. 11. 17)[* 초명 조준성(趙浚成).]과 어머니 [[제주 양씨]](1826. 8. 7 ~ 1905. 9. 23)[* 양성해(梁聖海)의 딸이다.]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개한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이듬해인 1906년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는 [[임병찬]]과 합세하여 전군장(前軍將) 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전라북도]] [[태인군]]·[[정읍시|정읍군]]·[[순창군]], [[전라남도]] [[담양군]]·[[곡성군]] 등지에서 활약하며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얼마 후 [[대한제국군 진위대]]에 패전하고 최익현, 임병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98|고석진]](高石鎭) 등이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자 [[한성부]]와 각 지방을 배회하며 동지를 규합해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이어 그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149|박이환]](朴駬桓)·[[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22|문형모]](文亨模) 등 동지들과 의병을 다시 조직해 전라북도 태인군·정읍군·순창군, 전라남도 담양군·곡성군, [[지리산]] 일대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1908년에는 군자금 부족으로 잠시 귀향했고, 자신의 소유하던 순천군 주암면 일대 논밭 30여 마지기를 처분하고 [[군마]]를 이용해 의병진에 헌납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논밭과 가옥 등 재산 일체를 은밀히 의병진 군자금으로 처분했고, 끝내 가산을 완전히 탕진했다. [[경술국치]]를 당한 뒤 1913년 임병찬이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자 이듬해인 1914년 독립의군부에 기꺼이 동참할 것을 표하고 전라남도 순천군 대표에 선임되어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감시와 견제가 더욱 삼엄, 격렬해지자 1915년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까지 갔으나 일본군이 국경을 폐쇄하고 이들을 탄압하면서 그 사이 많은 의병 동지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1918년부터 [[충청남도]] [[공주시|공주군]] 반포면 학봉리의 [[동학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은둔생활을 영위하다가 일본군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농평마을 인근 석굴에 은거했다. 은거 생활 동안 금식으로 자결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 뒤 쇠약해진 몸으로 귀향했고, 고향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이후 객지생활에서 얻은 [[천식]]과 기관지염 등 여러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1958년 10월 15일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별세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옥천(순창) 조씨]][[분류:순천시 출신 인물]][[분류:1858년 출생]][[분류:1958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