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양서)] [include(틀:남사)] ||<-2> {{{#ece5b6 '''{{{+1 소량의 공신[br]경릉장공(竟陵壯公)[br]{{{+1 曹景宗 | 조경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011758A-4FB0-4C07-8697-36005486C81D.jpg|width=100%]]}}} || || '''{{{#fff 시호}}}''' ||장^^(壯)^^ || || '''{{{#fff 작호}}}''' ||상서현후^^(湘西縣侯)^^ → 경릉현후^^(竟陵縣侯)^^ → 경릉공^^(竟陵公)^^ || || '''{{{#fff 성}}}''' ||조(曹) || || '''{{{#fff 이름}}}''' ||경종(景宗) || || '''{{{#fff 자}}}''' ||자진(子震) || || '''{{{#fff 출신}}}''' ||신야(新野) || || '''{{{#fff 부친}}}''' ||조흔지(曹欣之) || || '''{{{#fff 생몰}}}''' ||[[457년]] ~ [[508년]] [[9월 12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의 인물로 [[양(육조)|소량]]의 개국공신. 자는 자진(子震). == 생애 == 조경종은 신야 출신으로 457년 조흔지(曹欣之)의 아들로 태어났다. 503년, [[북위]]가 사주(司州)를 침공하여 [[채도공]]을 포위하자, 조경종은 구원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단지 사냥을 하는 등 진군하지 않았다. 결국 사주가 함락되자 조경종은 어사중승(御史中丞) 임방(任昉)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무제는 조경종이 공신이었기에 그를 처벌하지 않고 호군(護軍)으로 삼았다. 이후 조경종은 다시 산기상시·우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천감(天監) 3년(三年, 504년) 2월(二月), 임성왕(任城王) 원징(元澄)이 종리(鐘離)를 침공하니 소연은 관군장군(冠軍將軍) 장혜소(張惠紹)에게 명하여 5천의 장병으로 종리를 지키도록 하였다. 장혜소가 원징을 포위하니 평원장군(平遠將軍) 유사조(劉思祖)에게 명해 맞서도록 했다. 2월(二月) 정유(丁酉), 유사조는 소양(邵陽)에서 양나라 군과 맞섰고 이에 적군을 대패시키고 장혜소 및 열명의 장수를 포로로 잡았으며 남은 사졸은 모조리 죽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서장군(平西將軍) 조경종과 후군장군(後軍將軍) 왕승병(王僧炳)에게 장병 3만을 인솔하여 의양(義陽)을 구원하게 했다. 왕승병은 앞서 2만의 군사를 인솔해 착현(鑿峴)을 점령했고 조경종은 1만의 군사로 그 뒤를 따르니 원영(元英)은 관군장군(冠軍將軍) 원령(元逞)을 파견하여 번성(樊城)을 점거하고 그들을 막게 하였다. 3월(三月) 임신(壬申), 원령은 번성에서 왕승병을 크게 깨뜨리니 포로로 잡거나 목을 친 병사가 4천에 이르렀다. [[북위|북위(北魏)]]의 조정에서는 원징에게 칙서를 내려 명하였다. > 「4월(四月)은 회수가 장차 불어나서,배가 통행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하라。또한 남군(南軍)이 때를 얻을 것이니,이익에 어두워 후회할 일을 취하지 마라。」 >---- > 「四月淮水將漲,舟行無礙。南軍得時,勿昧利以取後悔。」 마침 큰 비가 와서 회수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니 원징이 군사를 통솔하여 수양(壽陽)으로 돌아왔다. 이때 위나라 군대는 돌아오는데에 낭패를 겪어 4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506년, 북위가 다시 종리(鐘離)를 침공하여 창의지(昌義之)를 포위하였다. 천감(天監) 7년(七年, 508년) 9월(九月) 12일(癸丑), 시중(侍中)·중위장군(中衛將軍)·강주(江州) 자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러 가던 도중에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경종은 정북장군(征北將軍)·옹주(雍州) 자사·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하고, 장(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57년 출생]][[분류:50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