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분류:1942년 선거]][[분류:쇼와 시대]] [include(틀:일본의 주요선거)] ||<-4><:>{{{#FFFFFF,#DDDDDD {{{+1 '''일본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br]{{{#FFFFFF,#DDDDDD {{{+1 '''第21回衆議院総選挙'''}}}}}}|| ||<-4> {{{#!wiki style="margin: -7px -12px" ||<:>{{{-2 [[1937년]] [[4월 30일]]}}}[br][[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0회 중원선]]||<:>→||<:>{{{-2 [[1942년]] [[4월 30일]]}}}[br]'''21회 중원선'''||<:>→||<:>{{{-2 [[1946년]] [[4월 10일]]}}}[br][[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22회 중원선]]||}}}|| ||<:>{{{#2D3865,#CFA547 '''투표율'''}}}||<-3>83.16%|| ||<-4><:>{{{#FFFFFF,#DDDDDD '''선거 결과'''}}}|| ||<-4><:>{{{#!wiki style="margin: -5px 0px" [[파일:1942중의원.png|width=100%]]}}}|| || '''정당''' || {{{#!wiki style="margin: 0 -10px;" '''중선거구'''}}} || '''총합''' || '''비율''' || || [include(틀:대정익찬회)] || '''381석''' || '''381석''' || '''81.8%''' || || [include(틀:무소속)] || '''85석''' || '''85석''' || '''18.2%''' || == 개요 == 1942년 4월 30일에 치러진 일본 제국 중의원 총선거. [[태평양 전쟁]] 동안 있었던 유일한 중의원 선거이자 [[대정익찬회]]의 유일한 선거였다. 1937년 치러진 선거의 임기가 5년이 끝나면서 새롭게 치러진 선거로, 총리로 임명된 [[도조 히데키]]가 '대동아전쟁을 위한 총선'을 주장하며, 대정익찬회만이 유일 정당으로 참여했다. 좌익 정당은 참여가 금지되었다. 당시 중의원 정원이 466명으로, 대정익찬회 추천 의원(익찬정치체제협의회)이 원내 의석의 '''81.8%'''를 차지했다. 나머지 85석은 무소속 의원들로, 그 중 다수가 우익정당 동방회(東方会) 계열이었다.[* 마찬가지로 우익정당인 입헌양정회(立憲養正會)도 후보를 내기는 했지만 전부 낙선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중 [[천황제 파시즘]]이 만연할 때 동방회와 입헌양정회를 제외한 모든 합법정당이 대정익찬회로 흡수된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비밀투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선거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는데, 전전 일본에서는 선거결과를 뒤집는다거나 투표과정에 부정을 행사하는 등 직집적인 방법이 아니라 연설을 못하게 막는다거나 전단물을 못붙이게 하거나 정부측 후보에 선거자금을 풍부하게 공급하는 등 비교적 간접적인 방법으로 선거에 간섭했으며 1942년의 이른바 익찬선거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