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만 해협 위기)] [include(틀:냉전)] ||<-3> {{{+1 '''9.3 포격전'''}}} [br]'''九三砲戰 (9.3포전)'''[br] '''First Taiwan Strait Crisis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 ||<-3> [[파일:510px-Taiwan_Strait.png|width=100%]] || || '''기간''' ||<-2>[[1954년]] [[9월 3일]] ~ [[1955년]] [[5월 1일]] || || '''장소''' ||<-2>[[대만|중화민국]] [[푸젠성(대만)|푸젠성]] 일대 || ||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대만|중화민국]](대만)[br][br]지원국[br][[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미국]] ||[[파일:중국 국기.svg|width=23]] [[중화인민공화국]][br][br]지원국[br][[파일:소련 국기.svg|width=23]] [[소련]] || ||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장제스]] [br] [[파일:대만 국기.svg|width=23]] [[류유장]] [br]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23]]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파일:중국 국기.svg|width=23]] [[마오쩌둥]] [br] [[파일:중국 국기.svg|width=23]] [[저우언라이]] [br] [[파일:중국 국기.svg|width=23]] [[펑더화이]] [br] [[파일:중국 국기.svg|width=23]] [[쉬샹첸]] || || '''피해규모''' ||521명 전사[* 대만군 519명, 미국 고문 2명] ||393명 전사 || || '''결과''' ||<-2>'''중화민국의 다천 군도와 이장산섬 철수 및 민간인 대피[br]중화인민공화국의 진먼, 마쭈 등 점령 좌절''' || || '''영향''' ||<-2>'''[[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 체결'''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차 대만 해협 위기는 1954년에서 1955년간 있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대만)]] 간의 충돌 사태를 일컫는다. == 상세 == [[국부천대]] 이후 미국은 [[타이완 섬]]의 [[중국국민당|국민당]] 정권을 중국의 유일 정권으로 인정하였으나 [[대만 해협]]에서의 충돌 사태 발생 시 불개입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후 대만 해협의 중립화를 주장하며 미합중국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파견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양쪽 모두의 군사활동을 억제했다. 1953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새로 당선되면서 아이젠하워는 국내 [[반공주의]]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장제스]]를 풀어준다"라는 미명으로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서 철수시켰다. 제7함대의 철수 이후 중화민국은 진먼과 마쭈 섬들에 각각 58,000명과 15,000명 규모의 군을 주둔시키고 요새화를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는 진먼, 마쭈 요새화에 대답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에 대만을 '해방'시킬 것을 명령하고 [[푸젠성(대만)|마쭈 지구]]에 포격을 시작했다. 이 시기 중화인민공화국의 공격은 미국을 분노하게 했는데 진먼에 있었던 미국의 고문 2명이 중국의 포격으로 사망한 데다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를 출범시킬 마닐라 조약 체결 단 5일 전에 이어났다. 포격은 미국의 [[봉쇄정책]]에 대한 도전이었고 미국은 대응에 나섰다. 9월 12일, 미국 합참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건의했지만 아이젠하워는 핵무기의 사용이나 미군 투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그 대신 미국은 중화민국에 대한 보호 의사를 타진하는 방법으로 중화민국과의 방위조약 체결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1954년 12월 2일에 합의되고 미국 의회에서는 1955년 2월 9일에 통과된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이다. 아이젠하워가 핵무기 사용에 대한 반대 의사를 내비친 것과 별개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다천 군도와 이장산 섬을 1955년 1월에 점거하면서 미국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고조되었는데 이건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1955년 3월에 미국이 핵무기의 사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심화되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NATO 동맹국들도 우려를 표하던 와중에도 미국 제독 로버트 B. 카니는 아이젠하워가 중공의 군사적 여력을 박살날 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알렸다. 하지만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반둥 회의[* [[비동맹운동]]의 효시로 여겨지는 회의다.]에 참석한 저우언라이가 [[평화공존 5원칙]]를 발표하면서 미국과의 대립에 대해서도 대화 의사를 밝히고 1955년 8월 [[제네바]]에서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위기는 종되었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중화민국의 대외 전쟁 · 분쟁)] [include(틀:중국의 대외 전쟁 · 분쟁)] [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 [[분류:마오쩌둥 시대]][[분류:장제스 시대]][[분류:양안관계]][[분류:1954년/사건사고]][[분류:1955년/사건사고]][[분류:동아시아의 전쟁]][[분류:포격전]][[분류:중화인민공화국/전쟁 및 전투]][[분류:푸젠성의 사건사고]][[분류:대만의 사건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