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008b>'''{{{+1 제갈탄의 난 | 諸葛誕之亂}}}'''|| ||<-6><:><#00008b>'''[[수춘삼반|{{{#fff 수춘삼반}}}]]의 일부'''|| ||<-6><:><#00008b>'''시기'''|| ||<-6> 257년 ~ 258년 || ||<-6><#00008b> '''장소''' || ||<-6> 양주 구강군 수춘현 || ||<-6><:><#00008b>'''교전세력'''|| ||<-3><:>[[사마소]] 일파||<-3><:>[[제갈탄]] 일파|| ||<-6><:><#00008b>'''군주'''|| ||<-3><:>[[조모(삼국지)|조모]]||<-3><:> || ||<-6><:><#00008b>'''지휘관'''|| ||<^|1><-3><:>[[사마소]][br][[진건]][br][[석포]][br][[주태(조위)|주태]][br][[호분]][br][[왕기(삼국지)|왕기]][br][[종회]][br][[가충]][br][[배수]][br][[악침]]†||<^|1><-3><:>[[제갈탄]]†[br][[장반]][[항복|←]][br][[초이]][[항복|←]][br][[문흠]]†[* 제갈탄에게 살해당함][br][[손침]][br][[주이(삼국지)|주이]]†[* 손침에게 처형당함][br][[전역(삼국지)|전역]][[항복|←]][br][[전정]][[항복|←]][br][[우전]]†[br][[문앙]][[항복|←]][br][[문호]][[항복|←]][br][[당자]][[항복|←]][br][[방회]][[항복|←]]|| ||<-6><:><#00008b>'''지원세력'''|| ||<^|1><-3><:>||<^|1><-3><:>[[오(삼국시대)|손오]]|| ||<:><-6><#00008b>'''결과'''|| ||<:><-6>제갈탄의 패배|| ||<:><-6><#00008b>'''영향'''|| ||<:><-6>반사마씨의 세력 약화[br]260년 사마소의 조모 시해에 영향||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조위]] 후기 [[수춘삼반]]의 세번째 [[반란]]. [[조위]]의 무장 [[제갈탄]]이 [[조위]]의 [[양주(중국)|양주]][[자사(관직)|자사]] [[악침]]을 죽이고 ~~[[반역향]]~~ [[수춘]]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손오]]에 투항했던 [[문흠]]이 원병으로 참전했기에 [[제갈탄-문흠의 난]]이라고도 한다. == 배경 == [[사마의]]가 일으킨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제거되고 [[사마(성씨)|사마씨]]가 권력을 차지하자 [[왕릉]]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으며([[왕릉의 난]]) 사마의 사후 이어 [[사마사]]가 세습하여 황제 [[조방]]을 폐위하고 고귀향공 [[조모]]를 옹립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양주자사 [[관구검]]이 [[회남]]에서 약 6만의 군대를 이끌고 문흠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다.([[관구검의 난]]) 이후 전에 친하게 지내던 [[하후현]], [[등양]] 등이 조상과 가까운 사이라 이들을 제거한 사마씨 일족을 늘 두려워한 나머지 양주 일대에서 민심을 모으며 근거를 확보하려 했으며,[* 제갈탄은 하후현과 친했을 뿐 아니라 비슷한 경우의 왕릉이나 [[관구검]]이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불안해했다. 그 때문에 재물을 풀어 민심을 얻고, 일가나 양주의 [[협객]] 수천명을 먹이며 자신을 지키게 했다.] 이 낌새를 눈치챈 사마사 사후 집권자 [[사마소]]는 후환을 제거할 생각으로 심복 [[가충]]을 파견해 소환령을 전했다. [[세어]]에 따르면 사마소가 이미 조정을 장악했을 무렵, 장사 가충은 이로써 참좌를 마땅히 보내어 사정장군들을 위로해야 한다 하였는데, 사마소는 이를 올바르게 여겨서 가충을 [[수춘]]으로 보냈다. 가충은 돌아와 사마소에게 말하길 "제갈탄이 양주에 주둔하여, 위명이 있으니, 백성들은 제갈탄에게 의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소환한다면, 필히 돌아오지 않고, 반란을 미숙하게 일으켜 화가 적을테지만 불러오지 않는다면 반란이 지체되어 화가 더욱 클 것입니다." 가충의 조언을 들은 사마소는 제갈탄을 [[사공(관직)|사공]]으로 삼았다. 제갈탄전에 인용된 《위말전》에 따르면 가충이 [[선양]] 얘기로 제갈탄을 떠보자 제갈탕은 얼굴색을 바꾸고 "경은 가예주([[가규]])의 아들이 아니오? [[위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나라를 저버리고 [[황실]]을 다른 사람에 줄 수 있겠소? 듣고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위 황실에 목숨을 바치겠소."라고 대답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위 조정에 신명을 다하겠다며 속을 떠보는 가충을 꾸짖는 장면으로 나온다. 위말전의 일화를 가지고 충심 깊은 [[제갈|제갈씨]] 일족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각색한 듯.~~믿고 쓰는 제갈씨~~] 가충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내로남불|그런데 관구검의 반란 당시에는 오히려 제갈탄은 이를 진압하는 역할이었으며]], 고귀향공을 핍박한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마소와의 권력 투쟁에서 소외된 것도 배경으로 보인다. == 전개 == [[파일:제갈탄의 난1.png]] 257년 5월, 조정으로부터 사공에 임명되어 [[낙양]]으로 영전하라는 명을 받자 자신을 제거할 계획이라 여긴 제갈탄은 사마소의 전횡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궐기해 양주자사 [[악침]][* [[악진]]의 아들.]을 급습해 죽이고 수춘에 주둔하며, [[제갈정]]과 부하인 장사 [[오강]]을 [[손오|오]]로 인질로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제갈탄은 [[회남]]과 [[화이베이|회북]]에서 [[둔전(삼국지)|둔전]]하고 있던 십수만의 병사와 [[양주(중국)|양주]]에서 새로 4~5만의 정병을 모으고 1년분의 식량을 비축한 후 성문을 닫고 수비에 임했다. 6월, 위 황제 조모는 제갈탄을 토벌하기 위해 항에 도착했고 [[대장군]] 사마소는 [[종회]], [[왕기(삼국지)#s-1|왕기]], [[진건]], [[석포]], [[배수]] 등을 데리고 26만 대군을 이끌고 구두에 주둔해 토벌에 나섰으며, 왕기와 진건이 사방에서 수춘을 [[포위]]하고 석포와 [[주태]]가 공격에 나섰다. [[오나라|오]]는 [[손침]]의 명령으로 오에 투항했던 문흠과 [[전단(삼국지)|전단]], [[전역]], [[당자]], [[주이(삼국지)|주이]] 등을 장수로 여강에서 3만 원군을 보냈으며 제갈탄에게 좌도호 가절 대사도 표기장군 청주목 수춘후에 봉했다. 8월 주이의 구원군을 격파하고 제갈탄이 오나라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병력이 약한 것처럼 속이고 구원군이 곧 도착한다는 거짓 정보를 제갈탄의 군중에 풀어 제갈탄군이 방심하고 ~~낚여~~ 식량을 모두 소모하게끔 유도하였다. 석포와 왕기가 이 틈에 공격할 것을 청했지만 듣지 않고 장기전을 펼쳤다. [[파일:제갈탄의 난2.png]] 문흠이 미리 합류한 뒤 위군이 수춘을 포위하자 수차례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으며, 오의 원군 중 주이는 위군에 몇번 패한 죄로 손침에게 참수당했다. 식량도 부족해지고 구원받을 희망이 없어지자 성안에서는 투항자가 속출했다. 전단과 전역은 종회의 계책에 말려 위에 투항했다. [[종회]]는 이전에 오에서 위로 망명해 와있던 [[전휘달]]을 오의 구원군으로 온 일족인 전역에게 보내 오는 수춘을 구할 수 없기에 전역을 죽일 예정이라고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다. 또 [[전정]] 5형제가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하게끔 유도하였다. 해를 넘겨 1월 6일 제갈탄과 문흠이 성에서 나와 포위망을 공격할 때 이를 패퇴시켰다. 포위망이 지속되고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투항자가 속출했고, 문흠과 향후의 전략에 대해 의견 차이가 생기자 결국 제갈탄은 문흠과 다투다가 문흠까지 죽였다.[* 정사에 따르면 문흠이 양주자사로 있던 시절부터 서로 사이가 나빴다.] 그 때문에 [[문앙]], [[문호]] 형제까지 위군에 투항했고 사마소는 이를 이용해 그들에게 벼슬을 준 뒤 수십기를 이끌고 성 주변을 돌면서 심리전을 펴게 했다. 제갈탄 측의 사기는 이를 계기로 급락해 기회를 틈탄 위군이 맹공을 퍼부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제갈탄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싸웠으나 이내 [[호분]]이 이끄는 군세에 궤멸당하면서 전사했다. 258년 2월에 수춘이 함락당하며 당자 등 오의 장수들 대다수가 사마소 군에게 항복했고 오직 [[우전]]만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 이후 == 제갈탄의 삼족은 [[멸족]]당했으며, 참수된 머리는 [[낙양]]에 보내졌다. 오로 건너간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 [[제갈정]]은 어차피 돌아가봐야 역적의 자손이 될 것이 뻔해 그대로 오에 항복해 눌러앉아 오가 망할 때까지 장수로 지냈다가 [[서진]] 건국 이후 훗날 [[오멸망전|오까지 진에게 멸망하자]] 망국의 신하를 자칭하고 초야에 묻혀서 삶을 마쳤다. [[사마주]]와 혼인한 제갈탄의 딸 [[제갈태비]]는 제갈탄의 난에도 연좌되지 않았는데, 팔왕의 난이 벌어지고 있던 [[304년]]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수춘삼반, version=25)] [[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분류:삼국시대(중국)/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