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민족대표 33인)] [include(틀: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 0%, #000 20%, #000000 80%, #000000)" '''{{{+1 정춘수}}}[br][ruby(禾谷春洙, ruby=かたに しゅんじゅ)] | 카타니 슌쥬'''}}}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카타니 슌쥬.jpg|width=100%]]}}} || || '''자 / 호''' ||명옥(明玉) / 청오(靑吾) || || '''본관''' ||[[광주 정씨]](光州 鄭氏)[*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013|#]]. 동백공종(東伯公宗)-성재공파(醒齋公派) 18세 수(洙) 항렬.] || ||<|2> '''출생''' ||[[1875년]] [[2월 11일]] || ||[[충청도]] [[청주시|청주목]] 남일상면 두산리[* [[http://db.history.go.kr/id/hd_012r_0010_0280|1919년 8월 26일 고등법원 예심계 판사 신문조서]]][br](現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청주)|남일면]] 두산리) || ||<|2> '''사망''' ||[[1951년]] [[10월 27일]][* 정춘수의 [[제적등본]]에는 1953년 1월 10일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511923|별세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향년 76세) ||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br](現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 || || '''종교''' ||[[개신교]]([[감리회]]) → [[가톨릭]] {{{-2 (세례명: [[바오로]])}}} || || '''묘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저산리 은적산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종교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대표적인 [[흑역사]].''' == 생애 == 1875년 2월 11일 [[충청도]] [[청주시|청주목]] 남일상면 두산리(現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청주)|남일면]] 두산리)에서 아버지 소릉(巢陵) 정석준(鄭錫駿, 1829. 1. 3 ~ 1885. 6. 13)의 3형제 중 차남으로 [[http://db.history.go.kr/id/hd_012r_0010_0280|태어났다]].[* 아버지 정석준은 첫 부인 [[황(성씨)|평해 황씨]](平海 黃氏)와 두 번째 부인 [[고성 이씨]] 이태(李泰)의 딸 등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정춘수는 누구의 소생인지 알 수 없다.] 이후 11살 되던 1885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인근의 [[청주시|문의현]] 동면 인차리·계산리(現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계산리)에서 살다가 작은아버지 석릉(石陵) 정석영(鄭錫永, 1840. 6. 29 ~ 1911. 11. 5)을 따라 청주목 서강내이상면 궁현리(現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궁현리)로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511923|이주했다]]. 1882년부터 1897년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1904년 [[감리회]]에 입교하였다. [[감리교신학대학교|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목사가 되었다. 이후 [[함경남도]] [[원산시|원산부]] 남촌동 128번지(現 [[강원도(북한)|강원도]] [[원산시]] 신흥동)로 이주해 [[http://db.history.go.kr/id/hd_012r_0010_0280|본적을 두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정춘수(1919년).jpg|width=100%]]}}} || ||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19년 2월 16일 박희도(朴熙道)의 권유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에 참여했고, 2월 26일 원산부에서 김성국(金成國)으로부터 3월 1일에 [[천도교]]측 대표들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오화영]]의 편지를 통해 외국에도 서면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3월 1일 당일, 아침 9, 10시에 원산부를 떠나 [[경기도]] [[경성부]]에 도착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를 세 번 불렀다.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에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399&evntdowngbn=Y&indpnId=000002519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본 건을 담당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이른 바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842&evntId=0034980101&evntdowngbn=Y&indpnId=000001189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본 건의 관할 재판소로 지정했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소요죄|소요]]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762&evntdowngbn=Y&indpnId=000000789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본 건에 대한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이에 공소하여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6066&evntdowngbn=Y&indpnId=000000818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http://db.history.go.kr/id/ia_4990_3876|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대 중후반 [[신간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경기도]] [[포천시|포천군]](現 [[포천시]])으로 이주했으며, 1949년 1월 16일 포천군 [[농업협동조합]]이 창설되자 부회장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012500329202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1-25&officeId=00032&pageNo=2&printNo=715&publishType=00020|선출되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수배를 받았고, 3월 12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중앙사무국 제3조사부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0315002391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3-15&officeId=00023&pageNo=2&printNo=7928&publishType=00010|자수한 뒤]]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4월 28일에 검찰부회의의 결의에 따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050400209202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5-04&officeId=00020&pageNo=2&printNo=7893&publishType=00020|불구속 기소되었으나]]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이 파면되고 출교되었고, 이에 11월 21일 오후 3시 [[명동성당]]에서 아내 임눌리(林訥利)와 함께 각각 바오로, 데레사로 영세를 받고 [[가톨릭]]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11220032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11-22&officeId=00032&pageNo=2&printNo=1002&publishType=00020|개종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특별시]]에서 은거하다가, [[1.4 후퇴]] 때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現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에 있던 족손(族孫) 정인환(鄭仁煥)의 집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병석에 눕게 되었고, 1951년 10월 27일 그곳에서 [[지병]]으로 [[https://m.cafe.daum.net/gwangbok815/JCwr/1579|별세했다]]. 청주 우암산 중턱에 조성된 삼일공원에 민족대표 33인 중 정춘수를 포함한 충북 출신 6인의 동상이 있었는데 정춘수의 친일 행적이 알려진 뒤 시민단체에 의해 정춘수의 동상이 철거되고 좌대만 남아 있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횃불 조형물이 대신 세워져 있다. [[분류:감리회 목사]][[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분류:광주 정씨]][[분류:1874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상당구 출신 인물]][[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감리교신학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