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정진호}}}'''[br]'''鄭鎭浩'''}}}}}}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정진호(독립운동가)2.png|width=100%]]}}} || || '''창씨명''' ||하루모토 진코우(東本鎭浩) || || '''본관''' ||[[동래 정씨]][* 안산공파(安山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 31세 진(鎭) 항렬.] || ||<|2> '''출생''' ||[[1927년]][*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410100038|월간조선 뉴스룸 2004년 10월 기사]]에는 1926년생으로 언급되었다.] [[2월 14일]]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구암면]] 율북리 544번지[* [[동래 정씨]] 안산공파 원조공(願朝公) 종중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정원조(鄭願朝, 1834 ~ 1896. 6. 3)는 정진호의 증조부이며, [[정동영]] 전 국회의원이 정원조의 장현손자이다.][br](現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 [[정동영]]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 || ||<|2> '''사망''' ||[[1950년]] [[10월 3일]][* 동래정씨안산공파보(2012년 간행) 567쪽에는 9월 2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향년 23세) || ||[[전라북도]] [[순창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43호 || ||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정동영]] 전 국회의원은 그의 5촌 당질(堂姪)이다. == 생애 == 1927년 2월 14일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율북리(現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 544번지에서 아버지 초운(樵雲) 정정모(鄭政謨, 1903. 9. 2 ~ 1946. 5. 20)와 어머니 [[연안 이씨]](1900. 12. 2 ~ ?)[* 이원수(李願秀)의 딸이다.] 사이의 7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410100038|#]] 이후 전라북도 [[전주시|전주부]] 노송정(現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525번지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57&evntId=0034990788&evntdowngbn=Y&indpnId=000002187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이주했다]].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전주공립농업학교]] [[토목공학과|토목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안성(독립운동가)|안성]] 등과 함께 조선어 말살, [[창씨개명]], [[강제징용]] 등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민족말살정책|민족말살]]과 강제 수탈이 심화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장차 일제의 패망과 조국독립에 대비할 것을 맹세하며 혈서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여수군]]에서 화약, 탄약 등 [[일본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가 전주부 청수정(現 전주시 완산구 교동)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193741&categoryId=33084|한벽당]](寒碧堂) 옆 [[https://naver.me/xeUKrMuc|한벽터널]]을 통과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1945년 2월 5일 전주부 노송정에 있던 자신의 하숙집에서 이를 폭파할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하던 중 동지 한 명의 밀고로 곧 일본군 헌병대에 항일학생운동의 주동자로서 체포되었다. 그는 곧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폭발물 취체규칙 위반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받아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미결수 신분으로 손톱과 발톱을 뽑히는 등의 갖은 고문을 당하며 약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검사 측의 공소 취소로 인해 위 혐의들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57&evntId=0034990788&evntdowngbn=Y&indpnId=000002187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었고]], 곧 [[불기소처분]]을 받아 비로소 석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방위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은 후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순창군에 들렀다가, 그해 9월 좌익 분자들에 의해 '우익 활동을 했다'는 명목으로 연행되어 구림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었다. 처형 직전, 밧줄을 풀고 인근 야산으로 도주했으나 산 중턱에서 좌익들에게 재차 붙잡혔고 결국 1950년 10월 3일 처형당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에 안장되었다가 2002년 11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 여담 == * 2016년 7월 4일, [[제20대 국회의원]]으로 있던 정동영이 7촌 재종질(再從姪) 정석훈(鄭碩勳, 1982. 6. 30 ~ )[* 족보명 정상훈(鄭相勳).]을 운전 겸임의 7급 비서로 [[http://www.jj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7242|두고 있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8517942|친인척 보좌진 채용 논란이 있었는데]], 이때 정동영 의원이 "독립운동가의 손자로서 국가보훈처의 취업알선 대상자"라고 해명했던 이 정석훈 7급 비서가 바로 정진호의 손자이며, 정진호의 차남 정학영(鄭學泳, 1950. 5. 2 ~ )의 아들이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래 정씨]][[분류:순창군 출신 인물]][[분류:1927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6.25 전쟁/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