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정조(조선))]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관련 문서)] [목차] == 가계 == * 증조할아버지 : [[숙종(조선)|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 * 증조할머니 : ^^(후궁, 영조의 생모)^^[[숙빈 최씨|화경숙빈]] [[해주 최씨|최씨]](和敬淑嬪 崔氏, 1670년 11월 6일 ~ 1718년 3월 9일) * 할아버지 : [[영조]](英祖,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 할머니 : ^^(후궁, 사도세자의 생모)^^[[영빈 이씨|소유영빈]] [[전의 이씨|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 ~ 1764년 7월 26일) * 아버지 : [[사도세자|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 1735년 2월 13일 ~ 1762년 7월 12일) * 어머니 : [[헌경왕후|헌경의황후]] [[풍산 홍씨|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년 8월 6일 ~ 1816년 1월 13일) * 정비 : [[효의왕후|효의선황후]] [[청풍 김씨|김씨]] (孝懿宣皇后 金氏 , 1753년 12월 13일 ~ 1821년 3월 9일) * 후궁 : [[수빈 박씨|현목수비]] [[반남 박씨|박씨]] (顯穆綏妃 朴氏, 1770년 5월 8일 ~ 1822년 12월 26일) * 아들 : 제23대 [[순조|순조 숙황제]] (純祖 肅皇帝, 1790년 6월 18일 ~ 1834년 11월 13일) * 며느리: [[순원왕후|순원숙황후]] [[안동 김씨|김씨]] (純元肅皇后 金氏, 1789년 6월 8일 ~ 1857년 9월 21일) * 손자 : '''[[효명세자|문조 익황제]] (文祖 翼皇帝, (孝明世子(효명세자) / 익종대왕(翼宗大王)), 1809년 9월 18일 ~ 1812년 8월 13일)''' * 딸 : [[숙선옹주]] (淑善翁主, 1793년 3월 1일 ~ 1836년 6월 7일)[* [[숙선옹주]]의 손자 홍승억마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게되어 정조의 친자손들은 현재 전부 절손되었다.] * 후궁 : [[의빈 성씨|의빈]] [[창녕 성씨|성씨]] (宜嬪 成氏, 1753년 7월 8일 ~ 1786년 9월 14일) * 첫째 : 유산 (1780년 음력 12월 8일 이후 유산 추정) * 둘째 : 유산 (1781년 음력 7월 이후 유산 추정) * 아들 : [[문효세자|문효태자]] (文孝太子, 1782년 음력 9월 7일 ~ 1786년 음력 5월 11일) * 딸 : [[옹주]] (1784년 윤달 3월 20일 ~ 1784년 음력 5월 12일) * 다섯째 : 복중 사망 (1786년 음력 9월 14일)[* 정조대에 가선 왕실의 손이 워낙 귀해졌기 때문에 남녀+적서차별 없이 태어나기만 했으면 금이야 옥이야 자랐을 텐데 [[의빈 성씨|엄마]] 뱃속에서 세상 빛도 못 보고 죽었다.] * 후궁 : --인숙--[[원빈 홍씨]] (--仁淑--元嬪 洪氏, 1766년 5월 27일 ~ 1779년 5월 7일) * 후궁 : [[화빈 윤씨|화빈]] [[윤(성씨)|윤씨]] (和嬪 尹氏, 1765년 4월 11일 ~ 1824년 1월 14일) == 기축별감 사건([[1769년]]) == [[1769년]](영조 45년), [[정조(조선)|정조]]는 여동생 [[청선공주]]의 남편 흥은위 정재화, 그리고 별감들과 기생집을 드나드는 등 방황의 시간들을 보낸다. 이 일은 일명 '기축별감사건'으로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정조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모습과 대조적인데, 이 때 [[정조(조선)|정조]]의 나이가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18세였던데다, [[효의왕후|세손빈]]과 금슬이 친밀치 못했고, [[의빈 성씨|마음에 둔 궁녀]]에게는 [[의빈 성씨/승은 거절 및 승낙|거절]]당했으니 일종의 [[사춘기]]의 반항이었을지도? == 20년 간의 짝사랑([[1766년]]~[[1786년]]) == 정조가 26살이던 [[1778년]](정조 2년), 왕대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후궁]] 간택령을 내리면서 정조는 궁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 간택령으로 간택된 후궁이 바로 [[홍국영]]의 [[원빈 홍씨|여동생]]이다. >"대궐(大闕) 안에 있는 궁인(宮人)을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정조(조선)|주상]](主上)의 본래부터의 성념(聖念)이 미천(微賤)한 처지의 사람에게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1778년]], 정순왕후의 후궁 간택령(조선 왕조 실록)] > "빈([[의빈 성씨|의빈]])을 후정([[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 >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 >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1&fcs=&fcsd=&cf=&cd=&gb=&aa10up=kh2_je_a_vsu_25102_000&aa10no=kh2_je_a_vsu_25102_001&aa15no=001&aa20no=25102_001_0002&gnd1=&gnd2=&keywords=&rowcount=10|#]] 앞서 여러 기록에 나오듯 [[정조(조선)|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왕이었다. 그런데 순애보적인 모습도 보이는데,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그 일화가 전한다. [[1766년]](영조 42년), 정조는 15살이던 당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풍산 홍씨|친정집]] 청지기의 딸이자 처소 궁녀였던 [[의빈 성씨|나인 성덕임]](당시 14세)에게 [[성관계|승은]](왕 또는 왕세자가 궁녀와 합방하는 것)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세손빈]](당시 14세)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울면서 못한다고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맞는 말이라 [[정조(조선)|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다시 재촉하지 않았다. 당시 실록이나 일기에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 일은 오랫동안 비밀로 한 것 같은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궁녀들을 가까이해서 할아버지 [[영조]]의 눈밖에 나 죽기까지 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첫날밤|초야]]를 막 치른 젊은 [[정조(조선)|세손]]이 [[사도세자|세자]]와 같은 비행을 저지른다고 [[영조]]의 눈밖에 날 우려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정조(조선)|정조]]도 즉위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이후 [[조선/왕사|후사]](後嗣) 문제 때문에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뽑았고 다시 [[의빈 성씨|의빈]]에게 [[성관계|승은]]을 명하였지만 또 사양했다. 또 사양한 이유는 안 나와 있다. 그러자 [[정조(조선)|정조]]가 [[의빈 성씨|의빈]]의 사속(私束, 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성관계|명]](승은)을 따랐다고 한다.[*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정조가 15년이나 기다려 취할 정도면 [[의빈 성씨]]는 상당히 재색(材色, 미모를 갖추다)[* "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 정조 《어제의빈묘지명》]을 갖춘 [[후궁|여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조(조선)|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여홍(=여공, 바느질·자수)에 민첩하고, [[요리]]도 잘하고, [[서예|붓글씨]]도 범상치 않고[* 실제로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전10권에 달하는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기도 했다.], [[수학]]도 잘했다고 한다. [[의빈 성씨]]는 [[정조(조선)|정조]]에게 대단한 총애를 받아서 연년으로 유산 2번, [[문효세자]], 딸 하나를 낳지만 딸은 옹주 책봉되기도 전에 요절해 죽었다. 거기다 [[의빈 성씨]]는 만삭인 상태에서 [[문효세자]]를 잃고 슬퍼하다 사망해 마지막 아이 또한 복중 사망한다. 5년간 5번의 [[임신]]은 [[정조(조선)|정조]]가 그만큼이나 [[의빈 성씨|의빈]]을 매우 총애했다는 뜻이다. [[정조(조선)|정조]]는 [[의빈 성씨]]와 그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효창원)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문효세자]]가 먼저 죽고 뒤이어 [[의빈 성씨]]가 죽었는데 [[정조(조선)|정조]]는 모자(母子)가 함께 있으라고 [[의빈 성씨]]를 아들 [[문효세자]] 옆에 묻어줬다. 참고로 아무리 친모여도 [[후궁]]이 [[왕세자|세자]] 옆에 묻히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정조가 기존 규례를 깨고 배려해 준 모양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서울특별시|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72XXXXXX8944|서울 지명 사전]] 여담이지만 [[숙종(조선)|숙종]] - [[영조]] - [[사도세자]] - [[정조(조선)|정조]]에 이르기까지 4대 째 웃전의 궁녀에게 반했다. 숙종은 증조모 [[장렬왕후]] 처소의 궁녀였던 [[희빈 장씨]]에게,[* [[숙빈 최씨]]는 웃전 소속은 아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각각 법모/조모인 [[인원왕후]] 처소의 궁녀였던 [[영빈 이씨]],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에게, 정조는 [[혜경궁 홍씨|어머니]] 처소의 [[의빈 성씨|궁녀]]에게 반해 후궁으로 삼았고 [[문효세자|아들]]을 얻었다. == 병오년의 변고([[1786년]]) == [[임오화변]]으로부터 24년 뒤인 [[1786년]](정조 10년, 병오년)에는 유독 [[정조(조선)|정조]]와 관련된 인물들이 많이 죽었다. [[5월 11일]], 맏아들 [[문효세자]]가 [[홍역]]이 발병한 지 8일 만에 [[죽음|훙서]](薨逝)했으며,[* 우연의 일치이지만, 아버지 [[사도세자]]도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었다.] 7월에는, 계조모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죽었다. [[9월 14일]], 셋째를 [[임신]] 중이던 [[후궁]] [[의빈 성씨]]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졸(卒)하였고, 11월에는 조카 [[상계군|상계군 담]]이 의문사[* [[자살]]했다는 설, 아버지 [[은언군]]이 죽였다는 설이 있다.]했다. 정조는 이러한 불행의 원인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자리(지금의 [[양주시|양주]] 변두리 지역)가 흉지(凶地)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고, 정조 11년([[1787년]])에 올라온 상소에 따라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시|수원]] [[현륭원|화산]](華山)에 천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진짜 [[순조|아들]]이 태어난다. 더욱 놀라운 건 [[정조(조선)|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생일 일자가 같아서 이걸 보고 더 좋은 길조라고 정조는 생각 했다고 한다.] == 상상 임신([[1781년]], [[1787년]]) == 《정조실록》에 의문의 산실청 기록이 두 번 보인다. 산실청은 비빈의 출산을 돕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관청으로 보통 출산 6일 뒤에 철수된다. 《정조실록》 첫 산실청 기록은 [[1781년]](정조 5년) 1월, 후궁 [[화빈 윤씨]]의 산실청 설치 기록이다. 10개월 뒤인 《일성록》[[1781년]] 11월에 화빈의 출산을 고대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뒤 어디에도 출산 기록은 없고, 화빈의 산실청이 무려 30개월이나 지속되었다는 기록만 보인다. 비슷한 케이스로 [[1787년]](정조 11년) 9월, 이번에는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임신]]하여 산실청을 설치했다. 정조는 6년 전 화빈이 임신하자마자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출산에 이르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지 이번에는 해산달에 산실청을 설치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출산하지 못했고, 결국 [[1788년]](정조 12년) 12월, 산실청을 철수했다. 이들의 경우 공통적으로 산실청이 1년 넘게 지속되었으나 어디에도 출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임신]]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상상 임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 5년([[1781년]]), 정조 11년([[1787년]])은 [[정조(조선)|정조]]가 무남이던 때였다. 왜냐면 정조의 장남인 문효 세자는 정조 6년~정조 10년까지 살았고 정조의 차남인 순조는 정조 14년([[1790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빈 윤씨|화빈]]처럼 중전 [[효의왕후]]도 상상 임신이었지만 화빈과는 다른 점이 [[효의왕후]]의 경우에는 상상 임신이었어도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는데 반해, [[화빈 윤씨|화빈]]은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도 없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정조(조선), version=457, paragraph=6)] [[분류:정조(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