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정재호}}}'''[br]'''鄭在浩[* [[http://aks.ai/GC05101425|디지털영천문화대전]]에는 鄭在'''{{{+1 鎬}}}'''로 등재돼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정재호1.jpg|width=100%]]}}} || || '''이명''' ||정원일 || || '''자 / 호''' ||건중(建仲) / 춘산(春山) || || '''본관''' ||[[연일 정씨]][* 사정공파(司正公派)-우헌공계(愚軒公系) 28대 호(浩) 항렬.] || ||<|2> '''출생''' ||[[1891년]] [[2월 7일]] || ||[[경상도]] [[영천군]] 환귀면 연하동[br](現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연하마을 316번지) || ||<|2> '''사망''' ||[[1943년]][* 영일정씨세보 권11 511쪽에는 1944년,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945년에 별세한 것으로 각각 다르게 등재돼 있다.] [[12월 27일]] (향년 52세) ||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용정형무소 || ||<|2>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부부위패 6판-193호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선산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91년]] [[2월 7일]] [[경상도]] [[영천군]] 환귀면 연하동(現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연하마을 316번지)에서 아버지 율파(栗坡) 정용우(鄭鏞禹, 1852. 9. 18 ~ 1914. 2. 10)[* 자는 성언(聲彦).]와 어머니 [[안동 권씨]](1847. 6. 7 ~ 1936. 10. 6)[* 권석구(權錫九)의 딸이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영천군 임고면 고천동(現 영천시 임고면 고천리)로 이주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0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004&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본적을 옮겼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개최를 앞두고 [[기미독립선언서]] 서명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해 유림들끼리 유림들만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로 해 이른바 "[[파리장서]]"를 작성하자, 이때 [[김창숙]]·[[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82|곽종석]](郭鍾錫) 등 136명의 유림과 함께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가족들을 이끌고 [[중화민국]] [[길림성]]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북로군정서]]에 입대해 활동했다.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안창호]] 등과 제휴하다가, 임시정부의 비밀 지방행정조직인 [[연통제]]의 함경도 독판부 기밀 경감에 위임되었고, [[함경남도]] [[함흥시|함흥부]](現 [[함흥시]])를 거점으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3257|윤태선]](尹台善)·[[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35|이상호]](李相鎬)·[[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32|전재일]](全在一) 등 수십 명의 조직원과 함께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임시정부의 명령을 도내에 전달하는 등 연락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동지를 포섭해 연통제 조직이 완비될 수 있도록 국내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힘썼다. 그러나 같은 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청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어 총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만기출옥 후에는 다시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1925년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화전현(樺甸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화뎬시(樺甸市).]에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930|이탁]](李鐸)·[[지청천]]·김이대(金履大) 등이 결성한 정의부(正義府)에 입대해 무장항일투쟁에 종사했다. 특히 1926년 4월부터는 정의부 검무감(檢務監)으로 있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0257|고인섭]](高仁燮)과 함께 [[봉천성]] [[선양시|봉천시]], 길림성 [[무단장시|목단강 지역]][* 목단강이 시(市)로 승격된 것은 [[만주국]] 시기인 1937년 12월 1일의 일이다.],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 해림보(海林堡)[*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海林市).], 길림성 [[화룡시|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칭산촌(靑山村).], 봉천성 요심도(遼沈道) 개원현(開原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톄링시]] 카이위안시(開原市).]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제국 경찰에 매수된 밀정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아보았다.[* 당시 주소지는 [[중화민국]] [[봉천성]] 개원현 소구사(小九社),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톄링시]] 카이위안시(開原市) 샤오주서촌(小九社村)이다.[[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0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004&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수형인명부]]] 그러나 1927년 2월 12일 개원성(開原城) 내 동문(東門) 밖 서학생(徐學生)의 집에서 중화민국 관헌에 체포되었고, 이튿날인 2월 13일 일본 제국 경찰에 인계되어 [[평안북도]] [[신의주시|신의주부]](現 [[신의주시]])로 압송되었다. 결국 1927년 11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죄|강도]] 혐의로 징역 2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0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004&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에 공소했으나 같은 해 12월 5일 공소가 기각되어 징역 2년형의 원심 판결이 유지되었다. 출옥 후에는 귀국해 [[강원도]] [[횡성군]]에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851|은거하다가]] 1943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이때 모집한 군자금을 [[중경시]]에 피난해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달하기 위해 함경도에서 중화민국으로 건너가던 도중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용정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3년 12월 27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10월에는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에서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유해는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선산에 안장되었으며[* 용정형무소에서 옥사한 이후 후손들이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2016년 12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정재호와 그의 부인 서월분[* 영일정씨세보 권11에는 정재호 지사의 부인으로 이도빈(李道彬)의 딸 [[청안 이씨]](1890. 2. 13 ~ 1919. 7. 6) 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청안 이씨는 1919년 7월 6일 [[만주]]에서 별세했다고 한다. 차남 정훈식이 1939년생인 것으로 보아 서월분은 둘째 부인으로 추정된다.]을 기리는 부부위패가 봉안되었다. == 여담 == * 2004년 9월 11일, [[영남일보]]에서 정재호 지사의 차남 정훈식(鄭勳植, 1939. 3. 27 ~ )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040911.010051059030001|2004년 9월 11일 영남일보 [향토 독립유공자 그 후손들의 삶 .9] 정재호 선생 아들 훈식씨]]] 정훈식은 어릴 적부터 짚신을 팔아 생계를 연명했고, 이후에는 영천군 [[고경면]](現 영천시 고경면) 도암리, [[경산군]] [[하양읍|하양면]](現 [[경산시]] [[하양읍]]) 등 다른 사람의 집을 전전하며 품을 팔고 머슴살이를 해 그 대가로 쌀을 받으며 생활하는 힘든 청년기를 보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해 한동안 [[무학]]으로 지내다 입대 후 군 복무 중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글자를 깨치기도 했다고 한다. 전역 후에는 여러 일을 전전하다 [[영천시청]]에서 16년간 [[환경미화원]]으로 근무하다 1999년 퇴직했는데, 1994년 근무 도중 [[청소차]]에서 떨어지는 [[낙상]] 사고를 당해 다리를 크게 다쳤다. 이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2004년 당시에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한 부인 [[해주 오씨]](1948. 3. 24 ~ ?)[* 오석연(吳錫淵)의 딸이다.]와 일찍 사별하고 끊임없는 생활고로 가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외아들]]마저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치 못해 [[교도소]]를 전전하는 것이 늘 가슴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1977년 늦게나마 선친이 [[독립유공자]]에 서훈되고, 2001년 고향 근처인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964번지에 선친의 독립유공을 기리는 '[[http://mfis.mpva.go.kr/memorial/movementView.do;jsessionid=S9Na9rYojUhvK7U_o3u8T2vHMKpRd2RspyAiUeKb.mfisweb10?gubunCode=ALL&sid=895&pageIndex=134&searFacilgubun=&searTopicsort=&searAddr_sigun=&searMpvabranch=&searVR=&searGbn=tit&searTxt=|정재호 애국지사 추모비]]'가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5719|건립되어]]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연일 정씨]][[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1891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옥사한 인물]][[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