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86년 출생]][[분류:1976년 사망]][[분류:경신고등학교(서울) 출신]][[분류:건국훈장 애국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정재용}}}'''[br]'''鄭在鎔'''}}}}}} || ||<-2> [[파일:정재용.jpg|width=100%]] || ||<|2> '''출생''' ||[[1886년]] [[11월 6일]] || ||[[황해도]] [[해주]] || ||<|2> '''사망''' ||[[1976년]] [[12월 31일]](향년 90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 ||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자 || || '''학력''' ||[[경신학교]] 졸업 || || '''상훈''' ||대통령표창[br]건국포장[br][[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youtube(NJI8cz6tuKg)] 한국의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 당시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이후 의용단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사후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86년 [[황해도]] [[해주]]에서 정추기와 나주 임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22세의 나이로 [[미국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서울특별시]] [[연지동(종로구)|연지동]]의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1911년 6월, 4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경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감리교]] 계통 [[미션스쿨]]인 의창학교(懿昌學校)에 교감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 서울 중앙감리교회의 김창준 목사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고 상경하였고 이 때 인쇄물 한 보따리를 [[함경남도]] [[원산]]감리교회의 [[정춘수]] 목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후 [[서울역]]에 도착한 후 인쇄물 가운데 한 장을 빼내어 주머니에 넣어 [[탑골공원]]으로 향하였다. 많은 시위인파가 모여든 가운데 [[민족대표 33인]]이 나타나지 않자 주머니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 들고 [[탑골공원#s-3.3|팔각정]] 단 위에 올라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형무소로 수감되었다가 2년 6개월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형을 다 마치고 고향인 해주로 돌아와 해주읍교회에서 봉사하다가, [[광복|해방]] 후 [[1946년]] [[3월 1일]] 남본정교회에서 [[3·1운동]] 기념식이 열렸을 때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선언서를 27년 만에 직접 낭독하였다. [[1954년]] [[1월 7일]],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의 작성자였던 육당 [[최남선]]을 만나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함께 사진 촬영을 하였다. 이 때 함께 찍은 사진이 그의 사후에 공개되면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자는 정재용이라는 사실 또한 함께 알려졌다.[*출처 한국장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