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선조의 후궁[br]{{{+1 정빈 홍씨 | 貞嬪 洪氏}}}'''}}}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애기봉, 너비=100%)]}}} || ||<-2> {{{#ffd400 {{{-2 정빈 홍씨묘 위치}}} }}} || || '''출생''' ||[[1563년]] [[8월 25일]] || || '''사망''' ||[[1638년]] [[4월 4일]] (향년 76세) || || '''묘소'''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br]애기봉입구 서쪽 || ||<|4> '''재위기간''' ||'''{{{#ffd400 조선 숙의}}}''' || ||[[1580년]] [[7월 7일]] ~ [[1592년]] 이전 || ||'''{{{#ffd400 조선 정빈}}}''' || ||[[1592년]] 이전 ~ [[1638년]] [[4월 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남양 홍씨]] || || '''부모''' ||부친 - 홍여겸(洪汝謙)[* [[세종(조선)|세종]]의 차녀 [[정의공주]]의 5대손.][* [[정의공주]] → 안온천 → 안방언 → 안회 → 홍창의 처 안씨 → 홍여겸][* 홍여겸은 살아생전에 인동 현감을 지냈고, 사후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 - [[창녕 조씨]][* [[양녕대군]]의 5대손.][* [[양녕대군]] → 함양군 → 이종석 → 이세인 → 조명원의 처 이씨 → 조씨 부인] || || '''배우자''' ||[[선조(조선)|선조]] || || '''자녀''' ||{{{#!folding 슬하 1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정정옹주(선조)|정정옹주]](貞正翁主, {{{-3 1595 ~ 1666}}}) 장남 - [[경창군]](慶昌君, {{{-3 1596 ~ 1644}}})}}} || || '''봉작''' ||숙의(淑儀) → '''정빈(貞嬪)'''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선조(조선)|선조]]의 간택 후궁으로 [[정정옹주(선조)|정정옹주]]와 [[경창군]]의 어머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추증된 홍여겸(洪汝謙)이고, 어머니는 내자시 부정 조명원(曺明遠)의 딸이다. == 생애 == >전교하였다. >"고례(古禮)에 제후가 아홉 여자를 취한 것은 후사를 넓히려는 것이었으니 그 뜻이 은미함이 있다. 지금 후궁 자리가 많이 비어 내직(內職)이 폐지되어 있으니, 옛 법에 의하여 숙의(淑儀)을 간택해 들이도록 예조에서 승전을 받들라." >---- >《[[선조실록]]》 선조 13년 4월 28일 1580년(선조 13) '''후사를 넓힌다'''는 뜻으로 [[후궁]] [[간택]]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선조의 [[왕비]]였던 [[의인왕후]]가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나온 말이다. 이때 전 주부 정순희의 딸, 승훈랑 홍여겸의 딸, 훈련 습독 민사준의 딸이 간택에서 뽑혔으며, 홍씨는 봉상시동[*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일대. ]에 있는 궁으로 가서 입궁하기 전까지 교육 받았다.[* 《선조실록》 14권, 선조 13년 5월 26일 갑오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305026_001|#]] ][* 《선조실록》 14권, 선조 13년 5월 26일 갑오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305026_002|#]] ] 처음에 숙의로 입궁한 그가 언제 정1품 빈까지 품계가 올랐는지 알 수 없다.[* 사대부 집안의 간택 후궁이라 궁인 출신인 경우보다 기록이 보다 풍부했을텐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승정원일기》와 당대의 사초를 많이 잃어버려서 알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다. ] 다만, 1592년(선조 25)에 그를 정빈이라고 부르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전쟁 발발 이전에 책봉되었을 것이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8일 정묘 8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5008_008|#]] ] 그의 삶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겪는다. --니탕개의 난부터 병자호란까지-- 정묘호란 시절에는 제천 지역까지 피난 갔는데,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1638년(인조 16)에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라가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재정 상태도 좋지 않아서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빈 김씨]]의 딸 [[정혜옹주]]도 사망했는데, 인조는 그때에는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선왕의 간택 후궁도 예장을 못하는데, 선왕의 서출 옹주는 예장하도록 한 것이다. 신하들이 반발했지만, [[인빈 김씨|인조의 할머니]]가 누구인지 생각한다면(...). ] 이때 인조는 "이 상사는 정빈의 상사와 같지 않으니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고 반발을 일축하였다.[*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 11월 18일 병자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11018_003|#]] ] --차별대우-- [[분류: 조선의 후궁]][[분류:1563년 출생]][[분류:1638년 사망]][[분류:남양 홍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