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ffd400 '''온희정빈 이씨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칠궁 배향자)]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영조의 후궁[br]{{{+1 온희정빈 이씨 | 溫僖靖嬪 李氏}}}'''}}}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수길원.jpg|width=100%]]}}} || ||<-2> {{{#ffd400 {{{-2 수길원 전경}}} }}} || || '''출생''' ||[[1694년]] || ||<|2> '''사망''' ||[[1721년]] [[12월 23일]] (향년 28세) || ||[[조선]] [[한성부|한성부]] [[중구(서울)|북부]] [[순화동|순화방]] [[창의궁]][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서울)|효자로]] 19 일대) || || '''능묘''' ||수길원(綏吉園) || ||<|2> '''재위기간''' ||'''{{{#ffd400 조선 소훈}}}''' || ||[[1721년]] ~ [[1721년]] [[12월 2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함양 이씨]] || || '''부모''' ||부친 - 이후철(李後哲)[br]모친 - [[김해 김씨]] || || '''배우자''' ||[[영조]] || || '''자녀''' ||{{{#!folding 슬하 1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화억옹주]](和憶翁主, {{{-3 1717 ~ 1718}}}) 장남 - [[효장세자|진종 소황제]](眞宗 昭皇帝, {{{-3 1719 ~ 1728}}}) 차녀 - [[화순옹주]](和順翁主, {{{-3 1720 ~ 1758}}})}}} || || '''봉작''' ||소훈(昭訓) → 소원(昭媛) → '''정빈(靖嬪)''' || || '''사당''' ||[[칠궁|연호궁]](延祜宮) || || '''시호''' ||'''온희정빈(溫僖靖嬪)'''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 >---- >- 《소훈이씨제문》 中 [[조선]] [[영조]]의 첫 번째 [[후궁]]. [[영조]]가 즉위하기 전 [[왕자]]인 연잉군 시절에 [[첩]]이 되어 자식을 낳고 [[후궁]]이 되었으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슬하에 [[효장세자|효장세자 이행]], [[화억옹주]], [[화순옹주]]를 낳아 1남 2녀를 두었다. == 생애 == === 연잉군의 첫사랑 === [[1701년]](숙종 27년), 8세의 어린 나이로 [[궁녀]]로 뽑혀 들어왔다. [[영조]]는 그녀를 양가의 딸이라고 밝혔는데, 양인(평민)이지만 [[궁녀]]로 입궁할만큼 집안이 한미하고 가세가 쇠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소훈이씨제문(해독).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소훈이씨제문_(해독)|#]] ] 언제 어떻게 [[영조]]의 [[성관계|승은]]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17년]](숙종 43년) 4월 22일에 [[화억옹주]]가 태어난 것으로 보아 늦어도 [[1716년]](숙종 42년)에는 [[성관계|승은]]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성관계|승은]]을 입은 이후 [[영조]]가 [[왕세제]]가 되기 전까지 [[왕자]]의 [[첩]] 신분으로 별궁이었던 [[창의궁]]에서 살았다. 그녀가 낳은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까지 모두 [[영조]]의 사저(잠저)이자 별궁인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이때부터 정비 [[정성왕후]]는 외면당했다-- === 임신과 출산 === [[1718년]](숙종 44년) 3월 9일, [[시어머니]]가 되는 [[숙빈 최씨]]가 [[사망]]하고, 한달 만인 4월 8일에는 딸 향염(香艶)[* 향염(香艶)은 향기롭고 고운 꽃이라는 뜻이다.]이 [[돌잔치|돌]]이 막 지나서 [[사망]]했다. 일련의 사건들이 [[영조]]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시대상 꽤 늦은 나이인 24세에 처음으로 얻은 자식에다 첫사랑이던 이씨(정빈 이씨)에게서 태어났으니... ] [[영조]]는 요절한 죽은 딸을 위해 직접 글을 지어 무덤에 넣어주기까지 했고[*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1773년]](영조 49년) 4월 7일 '''[[화억옹주]]'''로 추증한다. 이듬해 2월 28일, 첫 아들 [[효장세자]](아명은 만복萬福)를 낳는다. 이 때 꾸었던 [[태몽]]은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새가 날아들고 황금 거북이가 나오는 꿈'이었다고 한다.[* 《[[영조실록]]》 20권, 영조 4년([[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11월 26일 (임신)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11026_002|#]] ] 그러나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에 따르면 이 탄생은 썩 환영받지 못한 모양이다. >[[연령군]](延齡君)은 사람됨이 온유(溫柔)하고 영민(英敏)하여 [[숙종(조선)|임금]]의 사랑을 받은 것이 [[영조|연잉군]]보다 지나쳤다. 연잉군은 자주 [[숙종(조선)|임금]]의 질책을 받았고 또 '''[[숙빈 최씨|생모]]의 [[장례|상중]]에 있으면서 [[효장세자|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행검(行檢, 점잖고 바른 몸가짐)이 없다고 책망하여''' [[숙종(조선)|임금]]을 알현하지 못하게 한 것이 몇 개월이나 되었다. 정유년([[1617년|1617]]),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정유독대^^했을 때 [[숙종(조선)|임금]]의 [[조선/왕사|뜻]]은 대개 [[연령군]]에게 있었다고 한다. > >---- >- '''《단암만록》, [[민진원]](閔鎭遠)''' 출처가 출처인만큼 걸러서 보아야겠지만 [[민진원]]이 [[영조]]의 재위 초반부 정치적 파트너이였다는 점과 그의 정치 성향([[노론]])을 고려했을 때 굳이 이런 이야기를 실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숙빈 최씨]]의 삼우제와 졸곡제가 5월에 있었고 그녀의 삼년상까지 생각하면 이때 [[영조]]는 [[정실]]이든 [[첩]]이든 절대 [[임신]]시켜선 안되고 [[금욕]]해야 하는 상중 기간이었다.[* 이러한 상중 임신의 금기시는 민간에서 시부모 상중에 임신한 며느리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성리학적으로 엄격하게 따졌다. 특히 이씨는 첩이라 더욱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을듯.] 그러니까 [[숙종(조선)|숙종]]이 이씨의 출산에 대해 화를 낸 건 시대상으로는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근데 숙종도 효종의 삼년상 기간에 태어났다-- === 독살 의혹 === [[영조|연잉군]]이 [[왕세제]]가 되면서 그녀도 종5품 '소훈(昭訓)'으로 봉작되었으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요절]]한다. [[영조]]는 제문에서 그녀가 정식 [[후궁]]이 되고 자식들도 귀해진 탓에 궁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나 도리어 병이 되었다고 썼다.[* 일개 [[왕자]]의 첩일 때는 별궁이자 사저인 [[창의궁]]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지만 [[후궁]] 봉작 후에는 엄격한 예법으로 규제하는 궁중에서 살아야했던 데다, 당시 정치 상황이 [[노론]]과 [[소론]]으로 극명히 갈려 치열하게 당파싸움 중이었으니 [[왕세자|동궁]] 생활이 녹록치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궁중에서 일하는 [[궁녀]]·[[환관]]들도 [[경종(조선)|경종]]을 지지하는 [[소론]] 편과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 편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당시 [[영조|연잉군]]이 [[조선/왕사|왕]]이었던 이복형 [[경종(조선)|경종]]에게 문안 인사를 갈 때 드나드는 문까지 감히 막을 정도였다. ] 궁궐은 엄격하고 복잡한 곳이니 사저에서 살던 시절 같을 수는 없어서 고질병이 되었다고 탓한 것이다. 그런데 [[1722년]](경종 2년) 3월 27일에 [[남인]]의 서얼 출신인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있었다. [[노론]] 측에서 [[경종(조선)|왕]]을 [[살해|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 대급수(大急手): 칼로 살해 / 소급수(小急手): 약으로 살해 / 평지수(平地手): 모해하여 폐출함.]를 들고 나왔는데, 이 중에 정빈 이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이다. [[목호룡]]의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정빈 이씨의 독살을 주도한 사람은 서덕수(徐德修)이다.[* 서덕수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의 조카로, 미천한 신분인 이씨가 총애를 받고 아이를 셋이나 낳으니 제거하려 했다고 해도 설득력이 있다. 일례로 [[숙빈 최씨]]도 [[희빈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 쪽에게 이런 위협을 받았다.] [[1721년]](경종 1년) 6월에 은자 300냥을 [[환관]] 장세상(張世相)에게 보내 [[독|약]]을 구입하게 했는데, 약의 성능을 시험해보고자 그해 11월 [[왕세자|동궁]]의 주방나인 이씨를 시켜 음식에 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음식을 먹고 당시 소훈이었던 [[후궁]] 정빈 이씨가 죽었다고 밝혔다.[* 《[[경종실록]]》 8권, 경종 2년([[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5월 14일 (무술) 1번째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5014_001|#]] ] 이 말인즉 [[조선/왕사|국왕]] [[경종(조선)|경종]]을 [[살해|시해]]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모르모트]]가 되었다는 소리다. 이 사건은 [[신임사화]]로 번지고, 당시 [[경종(조선)|경종]]과 [[영조|연잉군]]은 물론 정국을 흔들어 놓았다. 훗날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따라 [[노론]]을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소론]]의 정치공작이 되고 [[1738년]](영조 14년), [[역적]]이 된 서덕수는 신원되었다.[* 《[[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1738년]], 청 건륭(乾隆) 3년) 12월 10일 (무자)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412010_001|#]] ] [[영조]]는 서덕수를 가리켜 "서덕수는 사람됨이 어리석어서 속임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각에서는 서덕수가 저지른 일로 [[영조]]의 정치 생명까지 정말 끝장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왕비|중전]] [[정성왕후]]와의 불화 원인으로 꼽는다. [[영조]]의 말에 의하면 당시 [[영조]]와 [[정성왕후]]의 불화 때문에 장차 [[기사환국|기사년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있었다고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102010_004|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2월 10일 신해 4번째기사]]] 다만 이 사건은 [[영조]]에 의해 '[[독살]] 의혹'으로 끝났다. >그리고 서덕수(徐德修)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신축년([[1721년]]) 6월에 약을 환관 장세상(張世相)의 처소에 들여보내고, >>동궁(東宮) 주방(廚房)의 나인이 이소훈(李昭訓)을 독살하였다.’ 고 하였는데, >>신축년 6월에는 전하께서 바야흐로 사제에 계셨으니, >>어찌 동궁 주방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이야기들이 바로 내가 앞서 말한 사리에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였다. >---- >- '''《[[영조실록]]》 4권, 영조 1년([[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3월 2일 (경자) 1번째기사''' [[1725년]](영조 1년), [[영조]]는 [[창경궁 시민당]]에서 조정 대신들을 인견하였는데, 당시 예조 판서 [[민진원]]이 [[임인국안]]을 '없는 죄를 꾸며서 [[무고죄|무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지를 펼쳤다. [[영조]]가 이에 동의하면서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조선)|이건명]], [[조태채]])'''이 복권되는 길이 열린다. === 사후 === [[영조]]는 즉위한 해([[1724년]])에 이씨를 정4품 '소원(昭媛)', 그 다음 해([[1725년]])에 정1품 '정빈(靖嬪)'으로 추증한다. >'''왕세자를 탄생한 소원 이씨를 정빈으로 추증하다''' >---- >소원(昭媛) '''이씨(李氏)'''를 '''정빈(靖嬪)'''에 추증(追贈)했는데, [[효장세자|왕세자]](王世子)를 탄생했기 때문이다. >---- >- '''《[[영조실록]]》 3권, 영조 1년([[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2월 27일 (을미) 1번째기사''' [[1764년]](영조 38년), [[영조]]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조선)|세손 이산]]은 법적으로 [[효장세자]]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었는데, 이후 [[정조(조선)|정조]]로 즉위하며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면서, 진종의 어머니 정빈 이씨 또한 '온희(溫僖)'의 [[시호]]와 수길원(綏吉園)의 원호, 연호궁(延祜宮)의 궁호가 추상되었다. 신주는 국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인 [[칠궁]]의 하나인 '''연호궁(延祜宮)'''에 모셔졌고 무덤은 수길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숙빈 최씨]] 옆에 장사를 지낸 것은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옆에서 모시겠다는 그녀의 바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소령원과 수길원은 무척 가깝다. 연호궁에 모셔진 이후 '연호궁의 정빈 자가(延祜宮靖嬪自家)'라고 불렸다.[* 일성록 451책[[https://kyudb.snu.ac.kr/ImageServlet.do?imgFileNm=KYIL001_0451_0108.jpg&path=/data01/stream/ILS/IMG/GK12811_00/GK12811_00_0451/KYIL001_0451_0108.jpg|#]]] === 치제문 === 정빈 이씨의 사망 당시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은 이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제문을 지었다. >치제문 中 >----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 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두 아이([[효장세자]] · [[화순옹주]])가 장성하여 만약 생모를 묻는다면 >>내가 장차 무슨 말로 답하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을 도려내는 듯하다." >"아침에는 나와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저녁에는 병이 심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날의 참혹한 광경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이것이 곧 운명인가? 운명이 아닌가?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방년 스물여덟이 어찌 청춘이 아니겠으며, >>운명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간사한 이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 >'''소훈 이씨 제문''' >---- >[[왕세제]]가 상궁 이씨를 보내고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소훈 이씨('''정빈''')의 영구 앞에서 전을 올리고 말합니다. >아 슬프구나! >세상에 어찌 애통한 아픔이 없겠느냐만 어찌 내가 오늘 당한 일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아아! 완순한 성품과 우아한 기질을 가지고 양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입궁하였다. >그대가 뽑혀 들어 왔을 때에 나 또한 나이가 어렸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처신하는 바가 규범과 법도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남몰래 탄복한 바이다. >(중략) >규중에서 경사스럽게 자식을 낳아 길러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내가 일찍이 >>“선을 쌓은 사람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으리니 뒷날 자손이 번성 하는 기쁨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백년을 기한하여 그 복을 누릴 것이다.” >라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하나의 질병에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 슬프도다. >(중략) >이 삶은 끝났으니, 가는 것이 애통하다. >저승과 이승이 영원이 갈라져 소식이 서로 통하기가 어렵고, >소리를 머금고 슬퍼하니 눈물이 흐르는 시내를 이루었으며, >슬픔을 품고 제문을 지으니 목메어 차마 못 짓겠네. >촛불 아래에서 붓을 적시니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못하였다. >아 슬프고, 슬프구나. >(중략) >영혼이여! 멀리 가지 않았으면, 이 슬픈 정을 살펴다오. >아! 나의 도가 다하도다! 내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통곡하겠는가! >온화한 말과 낭낭한 소리를 어느 날에 다시 듣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낯빛을 어느 때에 다시 보겠는가? >매사 슬픔이 더해지고 물건마다 마음이 상하니 바야흐로 함께 살면서 해로하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합하였다가는 다시 이별하게 되었는가! >날마다 더욱 애달파서 이 정을 억제하기 어렵구나. >죽은 후에 의탁할 곳이 있으니 밝은 혼령에 의지할 것이다. >길택을 정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위로된다. 이에 여관을 보내어 술을 대신 드리게 하니 >영혼은 아느냐? 영혼은 아느냐? >지금 내 이 글은 나의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글을 꾸미고 지나치게 칭찬하여 평소 삼가고 경계하는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 >- [[1721년]](신축년, 청 강희(康熙) 60년) 11월 19일, [[왕세제]]([[영조]]) 지음[* '''현대어 번역'''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章書閣) -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 == 가계 == === 친가 === * 증조부: 증 이조참판 이언양(李彦良) * 증조모 증 정경부인 안산 이씨 * 조부: 증 이조판서 이신선(李信瑄) * 조모: 증 정부인 경주 김씨 * 부친: 증 의정부 좌찬성(贈 議政府 左贊成) 이후철(李後哲)[* 《'''정빈 함성이씨 묘지'''(靖嬪咸城李氏墓地)》 - 靖嬪李氏甲戌生系出咸陽考後哲通訓母金氏副司果梅一女 : 정빈 이씨는 갑술생(1694년)으로, 가계는 [[함양군|함양]]이며 아버지는 통훈대부 후철(後哲)이고, 어머니 김씨는 부사과(副司果, 종6품 무관) 매일(梅一)의 딸이다.] * 모친: 증 정경부인 [[김해 김씨]](贈 貞敬夫人 金海 金氏) * '''본인: 정빈 이씨''' === 외가 === * 외증조부: 동지중추부사 김명실(金命實) * 외조부: 부사과 김매일(金梅一) * 외조모: 철성 이씨^^(통정대부 이갑생(李甲生)의 딸)^^ === 시가 === * '''시조부 : [[현종(조선)|현종]](顯宗) 이연(李棩)''' * '''시조모 : [[명성왕후]] [[청풍 김씨|김씨]](明聖王后 金氏)''' * '''시아버지 : [[숙종(조선)|숙종]](肅宗) 이광/이순(李爌/李焞)''' * '''시어머니 : [[숙빈 최씨|화경숙빈]] [[해주 최씨|최씨]](和敬淑嬪 崔氏)''' ==== 배우자 / 자녀 ==== * '''남편 : [[영조]](英祖) 이금(李昑)''' * '''장녀 : [[화억옹주]] 이향염(和憶翁主 李香艶) - [[요절]]''' * '''장남 : ^^(추존)^^[[효장세자|진종 소황제]](眞宗 昭皇帝) 이행(李緈)''' *''' 며느리 : ^^(추존)^^[[효순왕후|효순소황후]] [[풍양 조씨|조씨]](孝純昭皇后 趙氏)''' * '''양손자 : ^^(추존)^^[[정조(조선)|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 이산(李祘)''' * '''양손자며느리 : ^^(추존)^^[[효의왕후|효의선황후]] [[청풍 김씨|김씨]](孝懿宣皇后 金氏)''' * '''차녀 : [[화순옹주]](和順翁主)''' * 사위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화순 옹주가 월성위 김한신에게 하가하다. '''《[[영조실록]]》 32권, 영조 8년(1732년, 청 옹정(雍正) 10년) 11월 29일 (임자) 1번째기사.'''] * 양외손자 : 김이주(金頤柱) == 참고 문서 == * [[경종(조선)|경종]] * [[경종실록]] * [[김창집]] * [[김한신]] * [[민진원]] * [[숙빈 최씨]] * [[숙종(조선)|숙종]] * [[숙종실록]] * [[승정원일기]] * [[신임사화]] * [[연령군]] * [[영빈 이씨]] * [[영조]] * [[영조실록]] * [[이건명(조선)|이건명]] * [[이이명]] * [[인원왕후]] * [[정미환국]] * [[정성왕후]] * [[조태채]] * [[칠궁]](연호궁) * [[화순옹주]] * [[화억옹주]] * [[효장세자]](진종) * [[효순왕후|효순현빈]] [[분류:조선의 후궁]][[분류:1694년 출생]][[분류:172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