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고려왕릉]] == === [[고려]] 창업주 [[태조(고려)|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가 안장된 정릉(貞陵) === [[파일:신성왕후 정릉 1916.jpg|width=90%]] 1916년에 촬영된 정릉의 모습. 대정5년고적조사보고에 실린 사진이다. [[http://dryplate.museum.go.kr/program_2016/sub/sub_view_category.jsp?RELICNUM=004703&IDS1=C&IDS2=C02&IDS3=C0202&IDS4=C020200&categorySelect=&keyCategory=&searchSelect=keyWordDetail&keyWord=%EC%A0%95%EB%A6%89&pageSize=10¤tPage=2&SEQ=3858|출처]] [[파일:태조의_부인_신성왕후의_정릉_추정.gif]] 정릉의 최근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고려]]의 창업주인 [[태조(고려)|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가 안장된 왕릉이다. 위치는 [[개성시]] [[판문구역]] 상도리로서, 광복 당시 주소는 개풍군 상도면 상도리 풍곡에 위치해 있다.. 북한 보존유적 제 573호. 원래 정릉은 왕릉이 아니었다. 신성왕후가 왕후로 추존된 것은 그녀의 손자인 [[현종(고려)|현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인 1009년 3월이기 때문이다.[[http://db.history.go.kr/id/kj_002r_0060_0130_0030_0010|고려사절요 기록]] 사실 정릉(貞陵)이라고 격을 높인 시점은 정확히는 기록에 드러나있지는 않으나, [[http://db.history.go.kr/id/kr_088r_0010_0060|고려사]]에서 신성왕후로 추존했다는 내용과 정릉으로 높였다는 내용이 같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1009년 3월로 추정된다. === [[고려]] 31대 왕 [[공민왕]]의 1비 [[노국대장공주]]가 안장된 정릉(正陵) ===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의 1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안장된 왕릉이다. [[개풍군]]에 있다. 자세한 내용은 [[현정릉]] 문서 참조. == [[조선왕릉]] == [include(틀:조선왕릉)] === [[조선]] 추존왕 [[이자춘|환조]]가 안장된 정릉(定陵) ===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묻힌 왕릉으로서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경흥리에 위치하고 있다. 아내인 [[의혜왕후]]가 묻혀있는 화릉(和陵)과 쌍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 [[조선]] 창업주 [[태조(조선)|태조]]의 계비 [[신덕왕후]]가 안장된 정릉(貞陵) === 조선의 창업주인 [[태조(조선)|태조]]의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가 안장된 왕릉이다. 한국에서 '정릉'이라고 하면 보통 이 왕릉을 지칭한다. 자세한 내용은 [[정릉(서울 성북)]] 문서 참조. === [[조선]] 11대 왕 [[중종(조선)|중종]]이 안장된 정릉(靖陵)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선정릉, 문단=5)] == 중국 황릉 == === [[명나라]] 13대 황제 신종 [[만력제]]가 안장된 정릉(定陵) === [include(틀:지도, 장소=Dingling, 너비=100%)] [[베이징]] 인근,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군 [[명십삼릉]]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명십삼릉은 전부 공개하지 않고 [[영락제]]가 묻힌 [[장릉]]과 [[융경제]]가 묻힌 [[소릉]], 그리고 만력제가 묻힌 정릉만 일반 대중에 공개하는데, 이중 정릉만 유일하게 발굴되어 관광객들이 내부의 지하궁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관이 안치된 방까지 천장이 둥근 석실들로 이어졌고 문과 벽은 흰 대리석이다. 석판들이 단단히 맞춰져 실내는 250년 뒤에도 완전히 건조하다. 무덤 속 부장품들은 대부분 현재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었다. 만력제가 한국에서 유명해서인지 중국 여행을 간 한국인들이 많이 가보는 유적지이다. === [[청나라]] 9대 황제 문종 [[함풍제]]가 안장된 정릉(定陵) === [[분류:동음이의어]][[분류:고려왕릉]][[분류:조선왕릉]][[분류:중국황릉]][[분류:중종(조선)]][[분류:만력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