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정극인.jpg]] || || 정극인의 초상. 제작 시기 및 작자는 미상이다.[* 이 초상은 [[경주 정씨]] 문중에서 보관해오던 것인데, 현재는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태산선비문화사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https://newsis.com/view/?id=NISX20111225_0010081519|#]]] || 丁克仁 [[1401년]]([[태종(조선)|태종]] 1) [[8월 6일]] ~ [[1481년]]([[성종(조선)|성종]] 12) [[8월 6일]] [목차] == 개요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영광 정씨|영성]](靈城), 자(字)는 가택(可宅), 호(號)는 불우헌(不憂軒), 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이다. == 생애 == 1401년 8월 6일 [[충청도]] [[광주시|광주목]] 두모포리(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아버지 정곤(丁坤)[* 이명 정인(丁寅).]과 어머니 [[안(성씨)|죽산 안씨]](竹山 安氏)[* 안정(安挺)의 딸이다.] 사이의 7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008|#]] 1429년([[세종(조선)|세종]] 11) 29세의 나이로 식년 [[생원|생원시]]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429_413371|입격하고]] [[성균관]]에 진학하였다. 그 뒤 여러 번 문과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으며, 1437년에는 당시 [[세종대왕]]이 흥천사(興天寺)[* [[태조(조선)|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가 죽자 이를 슬퍼하며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덕왕후의 릉인 [[정릉(서울 성북)|정릉]] 인근에 건설했던 사찰. 그러나 조선 건국 당시의 슬로건 중 하나였던 [[숭유억불]]과 태조가 세운 건물이라는 명분이 충돌했기 때문에 이후 철거되고 다시 건설되는 일이 번갈아 일어났다.]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유생들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샀고, 결국 성균관에서도 쫓겨났다. 원래는 사형을 당할 판이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북도(北道)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그쳤고, 그 뒤 풀려나 부인 [[임(성씨)|임실 임씨]](任實 林氏)[* 임은(林殷)의 딸이다.]의 친정이 있는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전에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으로 각각 나뉘어 있던 현을 통합한 것이다. [[정읍시/행정]] 문서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으로 내려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의 이름을 불우헌(不憂軒)이라고 지었다. 그는 불우헌 앞에 있던 냇물인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으로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1451년([[문종(조선)|문종]] 1)에 천거를 받아 6품 벼슬인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었고,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에 제수되었으며 1453년([[단종(조선)|단종]] 1)에는 당시 [[한성부]] 판관이었던 성순조(成順祖)의 권유로 식년 문과[* 그해 식년시 문과에는 김수녕(金壽寧)이 을과 1위로 장원급제하였다.]에 응시하여 정과(丁科) 1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53_001022|급제하여]],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1455년]] [[태음력]] [[6월 11일]],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자기 조카였던 단종의 왕위를 차지하고 자기가 즉위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다시 태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해 12월에 조정에서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려 다시 관직에 올라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냈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했다. 1469년([[예종(조선)|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이 되었다. 또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를 하다가 하옥되기도 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됐다. 1470년([[성종(조선)|성종]] 1)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태인으로 가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2년 뒤 벼슬에 뜻을 접고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이 내려지자 이에 감격해 <불우헌가(不憂軒歌)>,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송축했다. 1481년(성종 12)에 81세의 나이로 죽었고, 사후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으며,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그의 무덤이 있다. == 업적 == 공직자로서 눈에 띌 만한 업적을 이룬 바는 없었으나 [[청백리|선비로서 청렴한 삶을 고수했고,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문학적 소양이 매우 뛰어나, 최초의 [[가사#s-3]]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인 '''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문학사에 큰 공헌을 했으며, 불우헌집(不憂軒集)이라는 2권 1책 분량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상춘곡은 현대 국어 교육과정이나 현대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들 중 하나로, 이것은 상춘곡의 표현 기법이 조선 가사 문학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춘곡은 송순의 [[면앙정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수험생들의 악몽 [[관동별곡]]의 표현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거든 ~지마나"라는 식의 표현법으로 이는 현대의 "잘생겼으면 키 크지나 말지"같은 완곡한 표현으로 잘생기고 키도 크고 다 한다는 뜻이다.] 문학사에서 그의 위상은 정치사에서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여담으로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에는 정극인이 [[숭유억불]]의 뜻을 굽히지 않은 공을 기리기 위하여, 사후 16년이 되는 해인 1497년([[연산군]] 3년)에 왕명으로 건립된 [[http://www.doopedia.co.kr/mo/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2&MAS_IDX=101013000869802|홍교]](虹橋), 즉 아치형 돌다리가 있다. 1992년 11월 30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각주][include(틀:표절, version=1, source=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분류:조선의 문관]][[분류:성동구 출신 인물]][[분류:영광 정씨]][[분류:1401년 출생]][[분류:148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