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소방공무원, rd1=정광현(소방공무원))] [include(틀: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파일:정광현.jpg]] 鄭光鉉 1902년 ~ 1980년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법학자. 친족상속법의 비조(鼻祖)이다. == 생애 == [[1902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평양의 유지였던 정재명(鄭在命, 1861~1947)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맏형은 [[제국대학]]을 3군데 졸업하고,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의학부장을 지낸 [[정두현]]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을 아버지가 세운 [[사립학교]]에서 마쳤으며,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거쳐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구제고등학교|제6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수학을 잘하여 이과(자연계)를 지망하였지만, 색맹 때문에 문과(인문-사회계)로 진로를 바꾸었다. 1925년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영법과(英法科)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1928년 9월 [[평양]] [[숭실대학교|숭실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어 귀국하였다. 1929년 3월 [[윤치호]]의 딸인 윤문희와 결혼하였다.[* 윤문희가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봉직하였다는 내용의 인터넷 글이 나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오류는 윤문희의 이력을 정광현의 것과 혼동한데서 비롯되었다. 윤문희는 엘리트 코스와 전혀 거리가 먼 가정[[주부]]로 생애를 보냈다.] 1930년 3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도 강의하였다. [[흥사단]]에 관여하였다가 1938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약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5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친족-상속법과 한국법제사를 담당했다. 당시로선 많은 나이임에도 정광현은 친족-상속법과 관련된 여러 업적을 말그대로 '쏟아내었다.' 1951년 변호사자격을 획득하였고, 1962년 8월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하고, 1970년 자녀들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0년 미국 [[메릴랜드]]에서 별세했다. 우리나라 친족-상속법의 대가인 [[김주수(법학자)|김주수]] 교수와 한국법제사의 대가 박병호 [[서울대학교]] 교수가 그의 제자이다. == 저서 == * 성씨논고 * 적산관계법규병수속편람 * 한국친족상속법강의 * 신친족상속법요론 * 신민법대의 * 한국가족법연구 * 판례로 본 3·1운동사 == 경력 == * 1944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구관습제도조사과 연구원[* 친족상속에 관한 관습조사를 하였다.] * 1946년 4월 [[미군정청]] 법무부 법무관 * 1951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 * 1952년 서울지방법원 인사조정 위원 * 1952년 서울대학교 도서관장 * 1956년 사단법인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상담위원 * 1960년 문교부 저작권심의위원회 위원 *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제사법위원회 호적제도 연구위원 * 1963년 가사심판법 기초위원 * 1963년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 1964년 가족법연구회 회장 * 1966년 학술원회원 * 1966년 제11회 학술원공로상 수상 [[분류:대한민국의 사회과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법학자]][[분류:1902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연일 정씨]][[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실향민]][[분류:서울대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