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의 제후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정간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고려의 왕자/국조 ~ 문종)]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9D00, #FFB200 20%, #FFB200 80%, #FF9D00)" '''고려의 제후왕[br]고려 현종의 왕자[br]고려 순종의 장인[br]{{{+1 정간왕 왕기 | 靖簡王 王基}}}'''}}} || || '''출생''' ||1021년 8월 25일 || || '''사망''' ||1069년^^([[문종(고려)|문종]] 23년)^^ 11월 4일 || || '''능묘''' ||미상 || || '''본관''' ||[[개성 왕씨]] || || '''휘''' ||기(基) || || '''부모''' ||부왕 [[현종(고려)|현종]] 모후 [[원혜왕후]] || || '''형제자매''' ||[[현종(고려)#가족관계|6남 8녀 중 5남]] || || '''배우자''' ||정간왕비(靖簡王妃)로 추정 || || '''자녀''' ||'''3남 1녀''' 장남 - [[왕진(고려)#s-1|태위 왕진]](王璡) 차남 - 사공(司空) 왕거(王琚) 삼남 - [[낙랑공|낙랑공 왕영]](王瑛) 딸 - [[정의왕후]](貞懿王后)[* [[순종(고려)|순종]]의 제1비] || || '''작위''' ||개성국공(開城國公)[*1031년][br]평양공(平壤公) || || '''시호''' ||'''정간왕(靖簡王)'''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왕조 중기의 왕족. [[조선후(고려)|조선국 양헌왕]]과 같이 사후 제후왕으로 추증되었다. 휘는 기(基). [[현종(고려)|현종]]의 넷째 아들로 아버지에 버금가는 명군이었던 [[문종(고려)|문종]]의 동복 동생이다. 또한 [[순종(고려)|순종]]의 제1비 [[정의왕후]](貞懿王后)의 아버지다. == 역임 관작 == ||<-2> '''정간왕의 생전 역임 관작''' || || '''공신호''' ||홍인숭효광덕공신(弘引崇孝光德功臣)[*1031년 弘引崇孝光德功臣守太尉兼尙書令開城國公] || || '''수직''' ||수태위(守太尉)[*1031년][br]수태보(守太保)[br]수태사(守太師)[*1049년 守太師兼內史令] || || '''직위''' ||상서령(尙書令)[*1031년][br]내사령(內史令)[*1049년][br]중서령(中書令) || || '''작위''' ||개성국공(開城國公)[*1031년][br]평양공(平壤公) || == 생애 == 현종 때 받은 작위는 개성국공(開城國公). 문종 초에 평양공(平壤公)으로 바뀌었다. 평양공이 사망한지 2년이 지난 1072년, [[문종(고려)/생애 #거신의 난|그를 옹립하려는 모의가 발각되어서 주모자들이 처벌받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거신의 난이라고 하며 만약 실행되었다면 실패한 조선시대 [[계유정난]]이 되었을 것이다.] 쿠데타 모의가 흐지부지된지 2년 이상이 지나서 갑자기 들킨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장남 왕진(王璡)이 사망한 평양공을 대신하여 유배를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나름 명망이 있었는지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사후에 정간왕(靖簡王)으로 추증되었다. 추증된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데, [[문종(고려)|문종]] 때 추증되었다는 설과 [[순종(고려)|순종]] 때 추증했다는 설이 있다. == 가족관계 == 아내의 이름은 사서에 나오지 않지만, 정간왕 즉위 음모인 [[문종(고려)/생애 #거신의 난|거신의 난]]에 휘말려 곡주(谷州)로 유배된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가 정간왕의 아내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사》에 장녕궁주라는 이름은 이 대목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며, 수안택주라는 호를 가진 사람으로 [[선종(고려)|선종]]의 딸도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더불어 수안현(遂安縣)은 곡주군(谷州郡)의 속현이기도 하다. [[태위]](太尉)의 직위에 있었던 장남 [[왕진(고려)#1|왕진]](王璡)은 [[문종(고려)/생애 #거신의 난|거신의 난]]으로 인해 유배를 간 후 사망했으며, [[사공(관직)|사공]]의 직위에 있었던 차남 왕거(王琚)는 거신의 난 이전에 요절했다고 한다. 그의 세 아들 중 후손을 둔 것은 어린 나이로 사면을 받은 막내아들 [[낙랑공|낙랑공 왕영]] 뿐이다. 왕영은 [[문종(고려)|문종]]과 [[인예왕후]] 이씨의 차녀 보령궁주(保寧宮主) 왕씨[* [[순종(고려)|순종]], [[선종(고려)|선종]], [[숙종(고려)|숙종]], [[의천]]과 동복 남매. 보령궁주의 출생 기록이 없어 이 4명과의 서열순은 알 수 없다.]와 혼인해 아들 2명을 뒀다. 딸인 [[정의왕후]](貞懿王后) 왕씨는 [[순종(고려)|순종]]과 혼인하였다. == 후손 == [[개성 왕씨]]의 한 분파인 평양공파는 정관왕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직간접을 불문하고 사료에 많이 등장하며, 《고려사》 열전 종실편을 보면 다른 항목에 비해 '''거의 20배''' 가량 많다. [[삼별초]]에게 왕으로 추대된 [[승화후|승화후 왕온]](王溫)은 그의 7대손이며, 고종~원종 때에 등장하는 [[영녕공|영녕공 왕준]](王綧)[* 왕준이 포로로 몽골에 끌려간 이후 왕준 일가는 13세기 초 [[홍다구]] 일가와 함께 요동을 관할하며 요동의 고려인들을 관리하였고, 홍씨 일가와 함께 요동행성의 고위관직을 맡았다.]은 승화후의 동생이다. 또한 충선왕에 의해 대리통치를 하게 되는 [[제안대군(고려)|제안대군]], [[희종(고려)|희종]]의 왕비 [[성평왕후]] 임씨, [[강종(고려)|강종]]의 제2비 [[원덕태후]] 유씨, [[원종(고려)|원종]]의 제2비 경창궁주(慶昌宮主) 유씨,[* 세 사람 다 남편과 성씨가 겹치는 걸 피하려고 왕씨가 아닌 다른 성씨를 썼다.] [[공민왕]]의 제3비 익비(益妃) 한씨[* 익비는 공민왕과 혼인한 후 한씨 성을 받았다.]도 그의 후손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정간왕의 후손들은 모두 왕영의 후손들이며, 왕영부터 그의 8세손인 [[제안대군(고려)|왕숙]]까지 '''무려 8연속'''으로 국왕의 부마가 되는 영예를 누린다. 이 때문에 정간왕의 후손은 부계 직계와는 상관없이 외가, 진외가, 외외가 등으로 왕통 직계와 실질적으로 매우 가까운 촌수 관계를 유지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현종(고려) , version=1899)] [[분류:고려의 왕자]][[분류:개성 왕씨 평양공파]][[분류:1021년 출생]][[분류:1069년 사망]][[분류:고려의 공작]][[분류: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