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전인발}}}'''[br]'''錢寅發'''}}}}}}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전인발1.png|width=100%]]}}} || ||<-2> 1929년 5월 15일 촬영된 사진. || || '''본관''' ||[[전(성씨)|문경 전씨]][* 21세 세(世) 항렬. 족보명은 전세화(錢世華).] || ||<|2> '''출생''' ||[[1902년]] [[5월 7일]][* [[http://db.history.go.kr/id/ia_4756_3689|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3월 7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 ||[[경상북도]] [[문경시|문경군]] 읍내면 하번동[br](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하리) || || '''사망''' ||[[1950년]] [[1월 20일]] || || '''상훈''' ||건국포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02년 5월 7일 경상북도 문경군 읍내면 하번동(현 문경시 문경읍 하리)에서 아버지 전덕기(錢德起, 1870. 9. 9 ~ 1905. 8. 18)와 어머니 [[청주 한씨]](1871. 7. 23 ~ 1931. 5. 3)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둘째 [[작은아버지]] 전을기(錢乙起, 1884. 3. 15 ~ 1947. 8. 25)에 입양되었고,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병목정(현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쌍림동)에 거주했다. 그는 1925년 9월 27일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정만숙(鄭萬淑) 등과 흘령단(屹嶺團)이라는 청년단체를 창립했다. 그 뒤 상경해 종업원으로 근무하다가, 1928년 6월 경성부 [[충무로|본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에서 박재영(朴齋榮)의 권유로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곧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면[* 이후 1979년에서야 임실읍으로 승격되었다.]의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야체이카회(會)를 개최하고 사회 문제를 토의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9년 5월 6일 [[서울중부경찰서|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는데, 이때 전라북도 지방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지방 야체이카'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롯한 60여 명이 함께 검거되었다. 그리고 그해 5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30년 12월 9일에는 예심이 종결되어 임종환(林宗桓) 등과 함께 공판에 회부되었고, 검사 측으로부터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2년형이 구형되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전인발2.png|width=100%]]}}} || || 1930년 12월 10일 촬영된 사진. || 그 뒤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5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50년 1월 20일 별세했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문경 전씨]][[분류:문경시 출신 인물]][[분류:1902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건국포장]][[분류:희귀성씨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