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榮澤 [[1894년]] [[1월 18일]] ~ [[1968년]] [[1월 16일]] (향년 73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감리회]] 목회자이다. 본관은 [[담양 전씨|담양]](潭陽)이다. 호는 늘봄, 추호(秋湖), 불수레, 장춘(長春) 등이다. == 생애 == [[1894년]] [[1월 18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외천방 사창동(現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에서 아버지 전석영(田錫永, ? ~ 1909)과 어머니 강순애 사이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https://his.kmc.or.kr/person-dictionaries/43332?page=12|태어났다]]. 진남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성학교|대성중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재학 중이던 1910년 중퇴했다. 중퇴 후 잠시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고, 이듬해인 1911년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로 이주해 [[경성의학전문학교|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 입학했으나 곧 [[https://his.kmc.or.kr/person-dictionaries/43332?page=12|중퇴했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가쿠인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고, 1914년 고등학부를 졸업했다. 1915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문학부에 입학해 1918년 졸업했으며, 같은 해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1919년 [[김동인]], [[주요한]], 김환 등과 문예지 창조(創造)의 동인이 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창간호에 '혜선(惠善)의 사(死)'를 발표했다. 같은 해 [[도쿄도]]에서 있었던 [[2.8 독립 선언]]에 가담했다가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3월 말 일시 귀국했고, 4월 29일 [[이화학당]]을 졸업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42|채혜수]](蔡惠秀)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튿날 채혜수가 평양부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이 때문에 9개월간 아내의 옥바라지를 했다. 192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신학부에 재입학해 30세 되던 1923년 마침내 졸업하고 귀국했다. 1923년 7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5986|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정기 간행물인 '신생명(新生命)'을 창간하자, 초대 주필에 선임돼 편집 실무를 담당했고, 1924년 [[감리교신학대학교|협성여자신학교]] [[교수]]에 임명돼 활동하면서 중앙교회, 창천교회 소속으로 목회 활동에 종사했다. 1925년 [[화수분(소설)|화수분]]을 발표했으며, 1927년 5월 감리교회 목사 안수를 받고 이듬해인 1928년 10월 아현교회에 부임했다. 1930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퍼시픽 신학교에 입학했고, [[시카고]]에서 [[흥사단]]에 입단했다. 1932년 12월 퍼시픽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으며, 이듬해인 1933년 [[황해도]] 봉산교회에 파견되었다. 1935년 목회를 그만두고 경기도 경성부로 이주해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938년 6월 18일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김여식(金麗植)·[[현제명]](玄濟明)·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갈홍기]](葛弘基)·[[홍난파]](洪蘭坡)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노진설]](盧鎭卨)·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34845&categoryId=46623|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http://db.history.go.kr/id/ma_016_0660_0010|가입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했다. 같은 해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http://db.history.go.kr/id/npsh_1938_08_18_v0001_0080|받았다]]. 1939년 10월에는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8.15 광복]] 후 [[조선민주당]] 문교부장에 선임되었고, 1945년 12월 월남해 이듬해인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관이 되었다. 1947년 국립맹아학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52년 도쿄 한국복음신보 주간,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1961년 초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한국외국어대학교]] 부근인 [[동대문구]] [[이문동]] 327-15번지에 거주했다.] 그러던 1968년 1월 16일, 범세계 기독교통합을 축하하는 원고를 작성해 기독연합신문에 기고한 뒤 오후 3시 5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91번지 기독교방송국 앞길에서 전차를 타려고 길을 건너던 중, 코로나택시에 치여 [[교통사고]]를 당했다. 직후에 [[동대문구]] [[신설동]] 윤복영외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오후 6시 13분 [[뇌출혈]]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8011700209203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01-17&officeId=00020&pageNo=3&printNo=14232&publishType=00020|별세했다]]. == 가족 == * 부인 채혜수(蔡惠秀) * 장남 전상범(田相範, 1926 ~ 1999): 조각가, [[연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 차남 전상수(田相秀, 1929 ~ ): 화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경기고등공업전문학교]] 강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 장녀 전산초(田山草): 의학자.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교수]]. 호는 메풀. * 차녀 전계옥(田桂玉) * 3녀 전명옥(田明玉)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한국 남성 작가]][[분류:1894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담양 전씨]][[분류:실향민]][[분류:대한민국의 감리회 목사]][[분류:교통사고로 죽은 인물]][[분류:뇌출혈로 죽은 인물]][[분류:아오야마가쿠인대학 출신]][[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3.1 운동/관련 인물 및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