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정부)] [include(틀:전두환 정부)] ||<-3> '''{{{#fff 제4·5공화국[br]{{{+1 전두환 정부}}}[br] 全斗煥政府 | Chun Doo-hwan Government}}}''' || ||<-3> '''{{{#004C97 [[1980년|{{{#808080 1980년}}}]] [[8월 27일|{{{#808080 8월 27일}}}]] {{{#004C97 ~}}} [[1987년|{{{#0A84E9 1988년}}}]] [[2월 24일|{{{#0A84E9 2월 24일}}}]]}}}''' || ||<-2> '''출범 이전''' || '''출범 이후''' || ||<-2> [[최규하 정부|{{{#808080 '''최규하 정부'''}}}]][br][[박충훈 권한대행 체제|{{{#808080 '''박충훈 권한대행 체제'''}}}]] || [[노태우 정부|{{{#0A84E9 '''노태우 정부'''}}}]] || || '''대통령''' ||<-2>'''[[전두환]]''' ,,,/ 제11·12대,,, || || '''국무총리''' ||<-2>'''[[남덕우]]''' ,,,/ 제14대 (1980.9.22.~1982.1.3.),,,[br] '''[[유창순]]''' ,,,/ 제15대 (1982.1.23.~1982.6.24.),,,[br] '''[[김상협]]''' ,,,/ 제16대 (1982.9.21.~1983.10.14.),,,[br] '''[[진의종]]''' ,,,/ 제17대 (1983.10.17.~1985.2.18.),,,[br] '''[[노신영]]''' ,,,/ 제18대 (1985.5.16.~1987.5.25.),,,[br] '''[[김정렬(1917)|김정렬]]''' ,,,/ 제19대 (1987.8.7.~1988.2.24.),,, || || '''여당''' ||<-2>[include(틀:민주정의당(1981~1987))] ,,,(1981.1.15.~1988.2.24.),,,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nnamed 전두환.jpg|width=100%]]}}} || || {{{-1 '''▲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취임 선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전두환 정부'''는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내란]] 이후 [[최규하]] [[전 대통령]]의 하야로 인한 [[제11대 대통령 선거]] 및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헌법 개헌으로 인한 [[제12대 대통령 선거]]로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이다. [[1980년]] [[8월 27일]]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 존속했다. 일반적으로는 '''제5공화국, 5공'''으로 불리지만, [[전두환]]은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헌법 체제였던 [[1980년]]에 처음 집권했기 때문에 정확히는 둘이 다른 개념이다. == 상세 == === 시대적 특징 === 이 정부의 모토이자 캐치프레이즈는 선진조국 창조와 정의사회 구현이며 국정지표는 다음과 같다. * 정치 - 민주주의 토착화 * 경제 - 복지사회 건설 * 사회 - 정의사회 구현 * 문화 - 교육개혁과 문화창달 "선진조국 창조" 의 경우, [[https://www.youtube.com/watch?v=u7w1cG8uS-Y|이 시절 만들어진 공익광고]]를 보면 '선진조국'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의사회 구현"의 경우는 각급 경찰서 현판 바로 밑에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달린 것은 물론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 버젓이 걸려 있었고 당시 [[국민학교]] 외벽에도 걸려 있었던 문구. 이 정부의 태생부터 따져보자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치프레이즈다.[* 정의사회 구현에 앞장선다고 사회정화위원회라는 행정 부서를 전국 읍면동 단위까지 만들었다. 민주화 이후 1989년에 해체되어 기존 구성원은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라는 민간 단체에 흡수됐다.] 그리고 여당의 이름 또한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민주정의당]]이었다.[* 정당의 명칭과는 별개로 정작 제5공화국의 출범 과정과 5공화국 핵심 인사들의 집권 과정은 아예 정당성과 정통성이 결여된 점이 아이러니한 점이다.][* 이후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당권을 잡고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새누리당]]이 되었다가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바른정당은 다시 [[바른미래당]], [[새로운보수당]]을 거쳐 [[미래통합당]]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유한국당과 다시 합쳐지게 되고 이것이 현재 [[국민의힘]]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사회 각 분야와 문화부문에 있어서 제한적이나마 여러 자유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집권 후반기때 국민들의 사소한 옷차림과 머리카락까지 일일히 단속했다가 오히려 반발을 거세게 사서 결국 패망한것을 염두에 두었던것도 있었고, 거기에 집권정당성 부재로 인해서 독재정권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박정희와 대비되는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하는 이유 [* 의외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박정희에 대한 이미지는 그냥 옛날에 독재했던 독재자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도 민주공화당의 지지기반(TK와 강원)과 주요 인사들은 민주정의당으로 흡수되었지만, 민정당에 불만이 있던 민주공화당 당원들은 한국국민당과 신민주공화당으로 따로 정당을 창당했기 때문에 계보가 갈린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6월 항쟁과 5공 청문회 이후로는 전두환에 대한 이미지가 비리와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로 굳어진데다가 노태우는 정권초 유화정책과 물가상승때문에 진보층은 물론이고 보수층으로부터도 인기가 별로 없었고, 김영삼의 인기도 중반기를 지나면서 지지부진해지자, 보수언론에서 지지기반 결집용으로 써먹은 인물이 박정희였었다. 때마침 자민련이 꽤 높은 지지율을 얻었던 시절이기도 햇고, IMF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당대의 중년층 이상을 중심으로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올라간데다가 김대중도 1970년대에 박정희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았기는 했지만, 김종필의 자민련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며 집권했기 때문에 꽤 오랜기간 동안 박정희가 존경받는 대통령 1위를 해먹을수있던것이었다. ]와 함께 올림픽 개최로 인해서 보여주기식이라도 선진국들의 눈치를 어느정도 봐야했으며, 무엇보다 전두환 본인도 축구와 유흥을 즐기고, 부정축재를 하는 등 꽤나 사치향락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런 제한적 자유화 정책이 전두환 본인 성격과 구미에 잘 맞았던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올림픽 개최와 정권정당성 부재로 눈치를 봐야되는 상황과 전두환 본인의 성향이 합쳐져서 당시로써는 꽤 진일보한 정책을 펼쳤던것이다. 대표적으로 'Sports, Sex, Screen'으로 대표되는 '[[3S 정책]]'과 [[야간통행금지]]령 해제, 해외여행 단계적 자유화[* 다만 이것도 나이가 어느정도 있는 장노년층이나 자유화한것이고, 젊은층들은 자유화 조치에서 예외였다. 완전한 해외여행 자유화는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이루어진다.] 조치, 교복 자율화, 과외 금지령, 컬러TV 보급 등의 업적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여긴 국민이 가장 많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다만 이건 언론통제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이웃 일본과 대만의 경제력이 어느정도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잘 알려져있었고, 사회인프라도 많이 낙후된 시절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개혁해야된다는 식의 캠페인을 벌이거나 사회의 어두운면을 검열삭제하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언론자유가 풀어진 노태우와 김영삼때에도 경상수지 적자로 한국경제가 위기에 빠졌다는 식의 기사가 많이 남발되었다.] 특히 교육정책의 경우에는 후의 노태우와 김영삼보다도 진보적이었다는 평이 나올정도로 당대에는 꽤 파격적이었다.[* 물론 두발규제가 완화되어서 남학생은 뒷머리, 여학생은 긴머리까지 어느정도는 기를수있게 되었고,(다만 이때도 염색과 파마는 문교부 지침에 따라 대부분의 중, 고등학교에서 금지였고, 남학생들의 장발도 불허였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복장이 자율이었지만, 체벌은 여전히 만연해있었고, 학력향상과 대학진학인원 늘리기를 명목으로 대부분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강제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학교를 가는것 자체는 체벌과 야간자율학습 강제참여가 대부분 사라진 2010년대 이후가 더 편하기는 하다.] 물론 자유화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이전보다 검열수위가 낮아진 수준이지, 검열이 사라진것은 전혀 아니라서, 주요언론의 경우에는 [[보도지침]]으로 기사를 어느정도까지 내야되는지를 안기부한테 일일히 지시받았고,박정희 후반기때와 마찬가지로 시사잡지와 뉴스, 시사 프로그램에서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는것은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TV개그 프로그램에서 대머리를 소재로 쓰는것을 암묵적으로 금지한다거나. [[한수산]] 필화사건처럼 작품썼다가 심기에 거슬려서 고문당하거나 감옥가는 일은 여전히 벌어졌다. 또한 가요나 만화, 영화도 검열은 여전했었다.[* 그 유명한 아기공룡 둘리도 검열을 우회하려다가 탄생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노동시간 단축같은 조치는 없어서 연간 노동시간이 여전히 3천시간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길었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은 저런 문화를 즐길 여유가 없던 경우가 태반이었다.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김병조]]는 민주정의당 전당대회 및 차기 대선 후보 지명식에서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情)을 주는 당,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말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전신)을 진행하면서 현재 유재석이나 강호동, 신동엽 이상의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언이었으나 이 발언으로 전국민의 공분을 샀으며 그 이후 거의 연예계 생명이 끝났다고 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고, 조용히 지내다가 [[SBS]] 개국 때 이적했다. 그러나 당시 SBS로 옮겨간 원로급 코미디언이 다 그렇듯 한동안 잊혀지게 된다.][* 다만 이는 엄연히 당시 정부와 MBC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대사였으며, 실제 김병조 본인은 대본을 보는 순간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리허설 때 이 모습을 지켜본 정권 관계자는 '''"그 부분이 곤란하면 빼라."'''는 말을 했으며 결국...] 이 발언이 터져나왔던 장소는 [[잠실실내체육관]]이었으며, 그날은 '''[[6.10 민주 항쟁|1987년 6월 10일]]'''이다. * 딴지일보 자료: [[http://www.ddanzi.com/ddanziNews/24865187|그시절 문제학교의 채플린]], [[http://www.ddanzi.com/ddanziNews/21129200|대통령의 죽음과 광주]], [[http://www.ddanzi.com/ddanziNews/27561138|교육감이 된 민 선생과 전두환의 사회정화위원회]], [[http://www.ddanzi.com/ddanziNews/16767918|여당 의원의 비서가 되다]], [[http://www.ddanzi.com/ddanziNews/30356949|양 김(金)과의 인연]], [[http://www.ddanzi.com/index.php?mid=ddanziNews&search_target=user_id&search_keyword=ddanzi&document_srl=3185135|스트립 쇼와 빈민운동 사이]], [[http://www.ddanzi.com/ddanziNews/34045123|제정구, 원혜영 그리고 최기선]] ===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pa.go.kr/img_photo0810.jpg|width=100%]]}}}|| 제5공화국 헌법은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7일 개정되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다음으로 가장 짧은 국가 체제. 전두환이 투표 직전에 '''기권은 반대보다 더 나쁘다!'''면서 극언을 했던 까닭에 투표장에 환자가 앰뷸런스를 타고 나타나서 투표를 하고 간 것이 대서특필되었던 미담 아닌 미담이 있다. 제5공화국 대통령의 선출 방식은 간선제이고 임기는 7년 단임제[* 원래는 6년 단임제였고 선출 방식은 직선제였으나 전두환 본인이 당시 프랑스의 예시를 들며 숫자는 럭키 세븐[[https://www.google.co.kr/url?sa=t&source=web&rct=j&url=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1905210067&ved=2ahUKEwjEy4imnab5AhWiGaYKHam6C0oQFnoECAYQAQ&usg=AOvVaw3OyAAdc_Y83fPIEKXAPg-5|#]]이라며 임기는 7년 단임제, 선출 방식은 간선제로 변경시켰다.][* 만약 임기는 7년으로 변경시켰어도 선출 방식이 직선제였다면 정치적으로 최소한의 집권 정당성은 확보되었겠지만 간선제로 시행했고, 이 결정은 [[자업자득|결국 전두환 본인이 대한민국 대통령 중 가장 집권 정당성이 부족한 대통령으로 남는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렸다.]]]였는데, 이는 전두환 자신이 장기 집권을 한 이승만, 박정희와는 차별화되는 대통령이라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의 12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언급이 등장할 정도. 다만 본인의 임기는 단임으로 하되 후술하듯이 자신의 측근을 후임 대통령으로 내세워 [[상왕]]으로 군림하려고 시도하였다.[* 사실 전두환은 자신의 임기 말엽에 단임 결정을 후회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통해 수상 취임을 하는 방안도 고려했고, [[6.29 선언]] 이후에는 제6공화국 헌법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조항을 삽입하여 자신이 자문회의 의장으로 막후 실세로서 사실상의 대통령이 되려고 했지만 친구인 [[노태우]]가 뒤통수를 쳤다. 결국 전두환은 노태우 임기 중에는 [[백담사]]에 유배를 갔다가, [[김영삼]] 임기 중에는 친구와 함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감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국회의원 선거 방식은 전국 92개의 중대선거구 [[지역구]]에서 최다와 차다 득표자를 뽑고(184명), 지역구에서 받은 의석에 비례해서 비례대표인 [[전국구]]를 92명 뽑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역구 제1당이 비례대표의 2/3인 61석을 무조건 먹는다.''' 즉 여당이 전 지역구에서 2등 안에 들어 지역구 절반을 먹고 들어간다 + 여당이 지역구에서 제1당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 61석을 먹는다 = 여당이 5/9인 153석, 즉 150석 언저리는 먹고 들어가므로 '''여당은 결코 과반(총 의석 276석 중 138석)을 놓칠 수 없다.''' 이를 두고 11대 총선 당시 민정당 초대 대표위원 이재형[* 야당에서 변절해 5공화국에 참여했고 12대 국회의장이 되었다.]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다 합쳐 봤자 55%밖에 안 되는데 무슨 비민주적이라는 거냐."라고 발언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는 선명야당을 표방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득표율은 '''신민 29.3% + 민한19.7% = 49.0% > 민정 35.2%''' 였는데도 민정당이 148석[* 지역구 87 + 전국구 61.]을 차지하여 과반을 넘겼다. 만약 전국구를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정확히 배분했다면 신민+민한 120석 VS 민정 119석이 될 수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거제도가 얼마나 불공정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 2중대, 3소대로 전락한 관제 [[야당]] === '''게다가 야당은 안기부에서 만든 관제 야당이었다.''' [[삼김시대|3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으로 대표되는 유력 야당 정치인은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1985년에야 해금되었다. 구 [[신민당(1967년)|신민당]] 계열의 [[민주한국당]](2중대), 구 [[민주공화당]] 계열의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3소대), 그 외 신정치사회당, 민권당, 농민당, 민족당, 거기에 [[민주사회당(대한민국)|민주사회당]]([[사회민주당(1985년)|사회민주당]]) 등의 '''[[진보]] [[정당]]까지 만들었다'''. 참고로 2중대, 3소대라는 조롱에서 [[민주정의당]]은 1대대였다. 진정한 야당이 생긴 것은 1985년 1월 [[신한민주당]]이 창당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심지어 198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으로 공천신청을 했더니 제1야당 [[민주한국당]] 후보로 공천된 사례도 있다. 당시 정부가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의 창당 및 공천, 당직 임명까지 관여했기 때문인데 여야 모두가 당시 정부의 꼭두각시였던 셈이다. 자세한 건 [[민주한국당]] 참조. 이것이 어원이 되어서 현재에서도 특정 단체/집단/커뮤니티의 멀티라는 의미를 비꼴 때도 이 '''2중대'''라는 용어가 가끔 쓰인다.[* 대표적인 표현은 김용갑이 2000년에 사용한 "[[조선로동당]] 2중대"로서 북한의 멀티, 친북파라는 표현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용갑은 5공화국의 핵심인사로서, 이 표현을 다시 띄운 대표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민주한국당]] 총재였던 [[유치송]]의 회상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 '창당 후 야당 총재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조찬을 한 적이 있다. 전씨 앞에서는 야당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화 중에 야당 총재와라는 말을 무심코 썼더니 전씨가 '''"야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1, 2, 3당이지요."'''라고 정색을 했다. 전씨의 이 말에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고, 또 그러는 야당 총재도 없었다.' 실제로 여야라는 표현은 국론분열을 부추긴다며 나라일을 사이좋게 함께 논의하는 친구 정당이라고 "우(友)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대외관계 == * 대미관계 [[미국]]과의 관계는 대체로 돈독했다. [[전두환]]은 [[로널드 레이건]]의 대소정책에 부응하여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하며 전술핵무기 배치, [[팀 스피릿]] 훈련 강화 등 긴장고조 정책을 추진했고 미사일 개발 정책 폐기와 함께 [[박정희 정부|전임 정부]] 때 추진했던 [[한국의 핵무장|핵개발 정책]]도 폐기했다.[* 전두환은 비밀리에 핵개발 자체는 시도하였으나 레이건의 압력으로 1983년에 아예 포기했다.] 이를 바탕으로 집권 당위성을 인정받았지만 당시 민주화 세력 사이에선 '한반도 핵 볼모화' 우려가 커져갔고, 미군 주둔 비용도 늘어나 1986년 존 위컴의 미 의회 증언 기준으로 매년 10억 달러로 증가했다. 더군다나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압력으로 농/축산물 수입 개방이 시작되어 농민들도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이에 농민과 운동권들은 반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전두환 정부를 향한 비판도 이어졌는데, 이미 1979년 12.12 쿠데타 때부터 미국 측과 협의를 거치지 않아 마찰이 심했다. 전두환은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박정희가 집권 말에 미국과 마찰을 겪어 무너진 것과는 다르게, 상술했듯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서 대미관계를 회복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관련해서는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의 워싱턴 방미를 조건으로 김대중의 사형을 반대했고, 1985년 [[김대중]]이 귀국할 때 동행한 미국 정치 인사[* 민주/공화 양당의 상원 의원들은 물론이고 전직 외교관, 학자들이 대거 동행했다.]들과 안기부 요원들 사이에 '''몸싸움마저 있었다.''' 미국 정계 인사들이 김대중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전 해에 비슷한 경로로 귀국했던 필리핀 정객 아키노가 공항에서 마르코스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국 경찰과 안기부 요원이 김대중을 데려간답시고 미국 인사들에게까지 무력을 행사한 데 대해 미국은 내부적으로 매우 언짢아했으며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로버트 화이츠는 아예 '''"한국 경찰이 저 모양인데, [[1988 서울 올림픽|3년 후]]에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서울 거리를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는 말까지 하며 전두환 정부를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 대일관계 전두환은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관계가 깊었는데, 1983년 1월 나카소네 방한 및 11월 레이건 방일/방한을 계기로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2857&pageFlag=&sitePage=1-2-1|'안보경제협력']]이란 명분하에 7년 동안 매년 40억 달러씩을 받도록 합의했다. 이를 전후해 1982년 일본 문부성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터지면서 반미뿐만 아니라 반일투쟁도 더해갔다. 전두환 정부 출범 이전에도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해서 옹호하는 듯한 외무성 발언이 드러나기도 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607/0000000291|#]]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대한민국 제5공화국, version=701)] [[분류:전두환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