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백제의 인물]][[분류:458년 사망]][[분류:화형된 인물]] ||<-3><:> '''백제국 귀족''' || ||<:> '''이름''' ||||적계(適稽)?[* '적계여랑'(適稽女郞)에는 '챠쿠케이 에하시토'라는 훈이 달려있는데 '챠쿠케이'는 '적계'를 그냥 그대로 음독한 것이고 '에하시토'는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 훈으로 아가씨와 관련있는 단어로 추정된다. 즉 이는 '적계 에하시토'가 되는데 현대어로 바꾸면 '적계(適稽) 아가씨'란 뜻이 된다. 여기서 '에하시토'야 당연히 존칭이고 '적계'는 본명이거나 별명 혹은 존칭을 나타낸 것이 된다.] || || '''별명''' ||||이케츠히메(池津媛)[* 못(池)의(津, 연결 조사) 여인/공주(媛)라는 뜻이다. '히메'는 딱히 공주에게 한정해서 쓰이던 말이 아닌 여성 귀족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던 존칭으로 이케츠히메 또한 당연히 본명은 아니고 일본측에 의해 주어진 별명.] || || '''직급''' ||||우네메(采女)[* '우네메'란 일본 궁중에서 천황과 황후의 식사 등 자잘한 가사를 가까이서 도맡던 궁녀의 직급이다.] || || '''생몰연도''' ||||? ~ [[458년]] 음력 7월 || || '''가족관계''' ||||어머니 [[모니부인]] || [목차] [clearfix] == 개요 == [[백제]]의 인물. 국내기록에는 없고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개로왕]] 즉위 이후 [[일본]]으로 파견되어 [[유라쿠 덴노]]의 궁녀가 되었는데, 이시카와노 타테(石川楯)라는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다 발각되어 [[458년]] 7월 [[화형]]에 처해져서 사망했다. 이를 소위 우네메(采女) 사건이라 하는데, 이리 불리게 된 것은 그녀에게 우네메의 직급이 주어졌기 때문. [[백제]] 측이 이 사실을 언제 파악했는지는 불명. 다만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61년]] 4월 [[개로왕]]과 [[부여곤지]]의 대화 기록이 실려있는데, 개로왕은 적계여랑이 화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여자를 보내는 걸 금지하고 대신 [[부여곤지]]를 일본에 파견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서술했다. 아무튼 적계여랑 이후로는 사절로는 남성만 파견하게 된 것이 된다. 적계여랑이 사망하고 3년 뒤, [[461년]]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그 외에 실제 [[개로왕]]의 즉위는 [[455년]]의 일인 점을 감안하면, 적계여랑의 도왜 시기는 [[429년]]경이 아닌 [[455년]] ~ 458년 사이의 일로 추정된다. == 관련 기록 == >2년 가을 7월 백제의 이케츠히메(池津媛)는 천황이 장차 동침(同寢)하려는 것을 거스르고, 이시카와노 타테(石川楯)[옛 책에서는 이시카와노 코무라노 오비토(石河股合首)의 조상 타테(楯)라고 한다][* '이시카와'가 성씨에 해당하는 우지, '오비토'는 성씨의 등급을 나타내는 가바네, '코무라'는 이름.]와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오오토모노 무라야노오오무라지(大伴室屋大連)[* '오오토모'가 우지, '오오무라지'가 가바네, '무라야'가 이름.]에게 명하여 쿠메베(來目部)를 시켜 부부의 사지(四支)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화형|불에 태워 죽였다]].,,《백제신찬》(百濟新撰)은 “기사년(己巳年: 429년)[* 실제 개로왕의 즉위는 429년이 아닌 [[455년]]이다. 《백제신찬》의 기록 오류로 보인다.]에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레나코(阿禮奴跪)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을 꾸며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 하고 천황에게 바쳤다”라고 하였다.,, >---- >《[[일본서기]]》 권14 <유랴쿠 덴노> == 관련 연구 == * 김수태, 5세기 후반 백제의 대외관계와 남조(5世紀後半 百濟の對倭關係南朝)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