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gss3.bdstatic.com/-Po3dSag_xI4khGkpoWK1HF6hhy/baike/c0%3Dbaike92%2C5%2C5%2C92%2C30/sign=52d2b8ff3fdbb6fd3156ed74684dc07d/730e0cf3d7ca7bcb094ecb2bb8096b63f624a8f8.jpg|이미지]] {{{+2 章學誠 / 章学诚}}} ([[한어병음|Zhāng xuéchéng]]), [[1738년]]~[[1801년]][* [[건륭제|건륭]] 3년 ~ [[가경제|가경]] 6년] [목차] == 개요 == [[중국]] [[청나라]] 중기의 [[역사학자]]이자 사상가. 본명은 장문표(章文鑣), [[자(이름)|자]]는 실재(實齋), [[아호|호]]는 소암(少巖)이며, [[저장성]] [[사오싱시]] 출신이다. == 사상과 행적 == 역사가는 변화하는 역사 과정을 맹목적으로 따라갈 것이 아니라, 훌륭한 덕을 갖춘 뒤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에는 [[고증학]]이 주류였으나 그와 별개로 자신만의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은 긍정했다고 한다. 문사통의(文史通義) 1권 역교(易敎)편에서 육경개사(六經皆史)라는 글을 썼는데, [[사서삼경|육경]]이 모두 [[역사]]와 관련 있는 책들이며, 옛사람들은 사실(事)에 대한 내용 없이 사상(理)을 말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자|문자]]가 완성되기 이전이었던 [[주나라]] 이전에는 모든 지식이 글이 아니라 구전(口傳)으로 전해졌으며, 이러한 기록 없는 사실과 감추어진 역사를 밝히는 것이 역사학자의 임무라고도 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경전학의 하위 분류로 취급받던 [[역사학]]은 경전학과 분리되고 오히려 더 상위로 오르게 된다. 같은 책의 시교(詩敎)편에서는 문체 및 문학의 다양성과 동일성이 합일된다는 관점에 의거하여, 당시까지만 해도 [[주나라#s-1]]와 [[한나라#s-1.2]]를 이어 주는 시기로만 취급받았던 [[춘추전국시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적 평가를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한서]] 이후 [[상서]]의 유의가 잊혀졌음을 지적하고, [[사기(역사책)]]의 [[기전체]]와 상서의 형식을 합친 종합적 사체 [[기사본말체]]를 애용하였다. 이는 사건별로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인과를 밝히는 역사 서술로 역사의 사변적 의의를 살리려는 것이었다. [[천자]]가 거주하는 중앙뿐 아니라, 지방의 역사 또한 역사 편찬의 주요 사료라고 여겼으며, 지방사를 포함하지 않은 역사는 완전한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장학성 역시 많은 지방사서를 편찬하였다. == 저서 == * 문사통의 (文史通義)[* 내편,,,內篇,,,5권, 외편,,,外篇,,,3권] * 교수통의 (校讎通義)[* 문사통의,,,文史通義,,, 부록,,,附錄,,,3권] * 사적고 (史籍考) === 지방사서 === * 영청현지 (永清縣志) * [[보저우시|박주]]지 (亳州志) * [[후베이성|호북]]통지 (湖北通志) [[분류:중국의 역사가]][[분류:청나라의 인물]][[분류:1738년 출생]][[분류:1801년 사망]][[분류:사오싱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