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손오의 인물, rd1=장패(손오))] [include(틀:위서)] ||<-2> '''{{{#fecd21 {{{+1 노구(奴寇)[br]臧覇[br]장패}}}}}}'''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장패.jpg|width=100%]]}}} || ||<:> '''[[시호|{{{#FEDC21 시호}}}]]'''||<(> 위후^^(威侯)^^ || ||<:> '''[[작위|{{{#FEDC21 작위}}}]]''' ||<(> 열후^^(列侯)^^→도정후^^(都亭侯)^^→무안향후^^(武安鄕侯)^^→개양후^^(開陽侯)^^→양성후^^(良成侯)^^ || ||<:> '''[[직위|{{{#FEDC21 최종직위}}}]]''' ||<(> 집금오^^(執金吾)^^ 겸 위특진^^(位特進)^^ 겸 행태위사^^(行 太尉事)^^ || ||<:> '''[[성씨|{{{#FEDC21 성씨}}}]]'''||<(> 장^^(臧)^^ || ||<:> '''[[이름|{{{#FEDC21 명}}}]]'''||<(> 패^^(覇)^^ || ||<:> '''[[자(이름)|{{{#FEDC21 자}}}]]'''||<(> 선고^^(宣高)^^ || ||<:> '''{{{#FEDC21 아버지}}}''' ||<(> 장계^^(臧戒)^^ || ||<:> '''{{{#FEDC21 생몰기간}}}''' ||<(> ?년 ~ ?년 || ||<:> '''{{{#FEDC21 고향}}}''' ||<(> 연주^^(兖州)^^ 태산군^^(泰山郡)^^ 화현^^(華縣)^^ || ||<:> '''{{{#FEDC21 태위대리 재임기간}}}''' ||<(><#ffffff> 230년 8월 ~ ?년 || ||<:><-2> {{{#!folding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0px;margin-top:-6px;margin-bottom:-16px" ||<:> {{{#FEDC21 후한([[도겸(삼국지)|{{{#FEDC21 도겸}}}]])}}}||<(> {{{-1 기도위^^(騎都尉)^^}}} || || {{{#FEDC21 후한([[조조|{{{#FEDC21 조조}}}]])}}} ||<(> {{{-1 낭야상^^(瑯邪相)^^→ 위로장군^^(威虜將軍)^^→[br]서주자사^^(徐州刺史)^^ 겸 위로장군^^(威虜將軍)^^→[br]서주자사^^(徐州刺史)^^ 겸 양위장군^^(揚威將軍)^^ 겸 가절^^(假節)^^[* 상존호주(上尊號奏)에 의하면 사지절(使持節)이다.]}}} || || {{{#FEDC21 조위([[조비|{{{#FEDC21 조비}}}]]→[[조예#s-2|{{{#FEDC21 조예}}}]])}}} ||<(>{{{-1 가절^^(假節)^^ 행 도독청주제군사^^(行 都督青州諸軍事)^^ 겸 서주자사^^(徐州刺史)^^ 겸 진동장군^^(鎭東將軍)^^→[br]집금오^^(執金吾)^^ 겸 위특진^^(位特進)^^→[br]집금오^^(執金吾)^^ 겸 위특진^^(位特進)^^ 겸 행태위사^^(行 太尉事)^^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 말과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삼국시대)|위나라]]의 인물이며 [[자(이름)|자]]는 선고(宣高)로 연주 태산군 화현 출신. 위략에 따르면 별명은 노구(奴寇). 본디 여포와 연합 관계였던 독자적인 세력의 수장이었고, 여포 패망 이후에도 조조와 제휴하며 한동안 세력을 유지하다 조조가 화북을 장악하면서 위세를 떨치자 세력권을 포기하고 조조에게 편입되었다. 항장 출신 중에서 도독을 수여받은 몇 안 되는 인물. 말년엔 중앙귀족 고관직까지 올랐으니 뛰어난 인물이었다. == [[삼국지(정사)|정사]] == 18살 때 태산군 화연의 옥리로 있었던 장패의 아버지 장계(臧戒)가 태수의 죄수들을 사사로이 처형하라는 명을 거역하자 태수는 그를 체포해 호송하였는데 장패가 동료들과 함께 산길에서 습격하여 부친을 구해낸 것으로 무용담이 널리 퍼진다. 그렇게 한 뒤 서주의 동해국으로 망명했는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그 용맹함을 높게 산 서주목 [[도겸(삼국지)|도겸]]에게 초빙되어 황건적을 격파하는 공적을 세우고 기도위에 임명된다. 이후 동료인 [[손관]], [[오돈]], [[윤례]], [[창희]] 등과 군사를 모아 개양에 주둔했으며 태산의 산맥지대에 근거해 독자 세력화한다. 이후 [[여포]]가 서주를 점거하자 장패는 여포의 휘하로 들어간 동해상 소건을 격파하고 물자를 노략질한 일로 여포의 공격을 받는 등 여포와 잠시 대립했지만 곧 화해했고, [[조조]]가 쳐들어왔을 때 여포를 지원했다가 여포가 조조에게 패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잠적했지만, 조조는 장패의 행방을 수색하는 한편 장패를 부르기도 하면서 기어이 장패를 찾아낸다. 애초에 조조는 장패를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장패를 직접 만나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우두머리 격이었던 장패가 손관, 오돈, 윤례, 창희 등을 모두 불러들이게 했으며, 장패를 낭야국상으로 임명하는 한편 청주와 서주를 감독하게 했고, 나머지도 제각기 태수로 임명하며 장패의 지휘를 받도록 한다. 물론 별도로 자사를 임명해 장패를 감독하는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이는 독자적인 군벌을 형성하고 있던 장패의 세력권을 중앙 정부의 권위를 통해 합법적인 형식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예주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이통]]이 있었는데, 조조는 이런 형태의 [[아웃소싱]]을 통해 현지의 반발을 줄이고, 이들로 청주의 [[원담]], 형주의 [[유표]] 등 인접한 경쟁 세력을 견제토록 하며 군비 지출을 절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패전에서는 당시 장패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과거 조조의 부장이었던 서흡, 모위는 [[장막(삼국지)|장막]]과 여포에게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조가 연주를 회복하자 달아나 장패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조조는 장패에게 [[유비]]를 보내 이들을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장패는 유비에게 '조공에게 거역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보호를 받는 자들도 내버릴 수 없으니 그 점을 중재해달라.'고 했고, 유비가 이를 조조에게 말하자 조조는 장패를 칭찬하며 서흡, 모위를 사면하고 태수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동맹국의 군주에게 사신을 보내 외교를 하는 모양새에 가깝고, 조조는 결국 장패의 뜻을 받아들임은 물론 입장을 완전히 바꿔 서흡, 모위를 2천석의 고관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조조로서도 최대한 장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했던 셈. 조조가 이토록 장패의 회유에 힘쓴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삼국지)|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면서 드러났는데, 장패가 별동대를 이끌고 청주로 여러차례 침입해 조조는 동쪽에 대한 방위에 신경쓰지 않고 원소와의 대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해 참수하고 기주와 청주를 평정하자 장패는 대세가 결정났다고 봤는지 조조에게 와서 축하하며 자신의 가족을 [[업성|업]]에 이주시키겠다고 했고 조조는 그의 충성심을 칭찬한다.[* 표면상으론 장패가 조조에게 복종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자신의 독립적인 세력을 자주적으로 굴리고 이해타산에 따라 협력하는 관계였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패가 조조가 수도로 삼은 업에 가족을 두겠다는 것은 조조에게 자신의 가족을 사실상 볼모를 두는 것이자 신하로서 섬기겠다는 복종의 뜻을 비춘 것이었다. 그래서 조조에게 충성심이 있다고 칭찬받은 것이다.] 원담 사후 청주의 혼란을 틈타 청주 제남군 일대에서 서화, 사마구 등의 황건적 잔당들이 난리를 피우자 [[하후연]]과 함께 이를 토벌했으며 [[창희]]가 모반했을 때도 [[우금]]과 함께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다. [[적벽 전투|적벽에서 참패]]하자 진란, 매성이 남양 일대[* [[원술]]이 과거 세력을 잡은 곳이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손권이 [[한당]]을 파견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장패는 한당과 싸워 격파하고 서둘러 서구로 이동하였는데 [[손권]]은 자신의 수군을 이끌고 서구를 점령해 이곳으로 계속 진란을 지원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의 수군은 장패가 이미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 철수한다. 손권이 철수하자 장패는 자신의 군으로 하루만에 백리를 행군하여 [[장료]]군과 합류, 진란을 격파한다. 그 뒤 조조가 유수구에서 손권과 싸울 때[* 조조는 세 번 유수구에서 손권과 싸웠는데 213년, 214년, 그리고 217년에 싸웠다. 이때는 217년의 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제기에 철수하면서 [[하후돈]], [[조인]], 장료를 거소에 남겼다고 하고 장패전에선 하후돈과 장패를 거소에 남겼다고 하므로 하후돈이 거소에 남긴 시기였던 217년의 일로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장패전에서는 손권이 항복했다고 했는데 손권이 이렇게 저 자세를 보였던 적은 213년과 217년의 일이었는데 213년에는 하후돈을 거소에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패는 장료와 함께 선봉을 맡았으나 불리하였다. 장료가 군을 철수하려 하자 장패는 조조의 철수 명령이 내려올테니 기다리자고 하였고 과연 다음날 조조가 철수 명령을 내린다. 조조는 이에 감탄하여 장패의 벼슬을 높인다. 조조가 한중에서 패배한 뒤 [[관우]]가 북상하고 손권이 비밀리에 조조와 손잡자 조조가 동쪽의 부대를 중앙에 집결시킨 일이 있었다. 장료도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였고 장패 역시 별군을 보내 조조가 있는 곳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후 조조가 죽자 장패가 인솔하는 부대가 자진해산해서 청주로 가버렸다. 이는 하필 그가 이끌던 부대가 전직 [[황건적]] 출신으로 이루어진 [[청주병]]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야사에는 애초에 조조한테 주워질 때부터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한정으로만 충성을 바치고, 그가 죽거든 농업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진위는 불명. 확실한 것은 이들의 해산으로 인해 장패는 직접 인솔하는 부대가 반토막도 더 나버렸다는 거다. 이를 장패가 용인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찌되었건 군세가 약화된 장패는 그대로 하락세를 타게 된다. 훗날 [[조비]]가 [[조휴]]로 하여금 청주, 서주의 도독으로 삼자 장패는 그의 지휘를 받아 조휴와 함께 [[여범]]을 격퇴시켰다.[* 손권이 [[이릉대전]]에서 유비를 격파하고 [[조비의 남정|조비가 대규모로 손권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뒤 조비는 동쪽으로 순행하여 장패를 만났는데 장패가 과거 멋대로 병력을 청주로 되돌려보내 해산시킨 걸 의심하였기에 장패의 병력을 빼앗고 집금오의 벼슬을 주어 수도로 소환했다. 장패는 [[조예]] 시절까지 살았는데 그의 식읍은 3500호에 이르렀다. 230년에는 조예가 번창으로 행차하는 도중 장패에게 태위의 일을 대신하게 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웬만한 무장으로서의 행적을 보이다가 의외로 말년에는 태위 대리까지 오른 인물. == [[삼국지연의|연의]] == 스토리 중심축에서 떨어진 곁가지라 여겼기 때문인지 처음부터 [[여포]]의 부하로 나와 [[조조]]와 싸우는데 연주에서 처음 맞붙었을때 [[악진]]과 싸워 승부를 겨루지 못했다. 여포가 패망하자 [[장료]]의 설득으로 항복한다.[* 연의에서 주요 군웅의 부하로 소개되는 인물들 중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관서의 군벌들은 모조리 한수의 부하로 묘사되었다.] 나중에 적벽 전투 전에 [[방통]]의 계략으로 서량의 [[마등]]과 [[한수(삼국지)|한수]]가 후방을 친다는 소문이 돌자 [[서서]]와 함께 산관으로 군대를 이끌고 떠나면서 적벽의 불사태도 운 좋게 피해갔는데 이후의 행적은 없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장계(臧戒) * 아들 장애(臧艾) * 아들 장순(臧舜) 이외에도 열후로 임명된 아들 한 명이 더 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장패/기타 창작물)] == 둘러보기 == [include(틀:조위의 태위)] [include(틀:팔건장)] [각주] [[분류:후한의 인물]][[분류:조위의 태위]][[분류:몰년 미상]][[분류:린이시 출신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장패, d=2023-01-18 01:4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