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명이인/ㅈ]] [목차] == 경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장천석 == || 성명 ||<(> 장천석(張天錫) || || 생몰 ||<(> [[1874년]] [[2월 3일]] ~ ? || || [[출생지]] ||<(>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전리 || || 사망지 ||<(> 미상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장천석은 1874년 2월 3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10월 하순경 자신의 집에서 [[현창묵]],임정발(林正發),최창악(崔昌岳),이용춘(李容春) 등과 만나, 사감부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 결과 주남면 용전동 사감부 임원으로 사감 장천석, 서기 최창악, 재무 이용춘 등을 각각 선출하였다. 이후 이들은 동지를 규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연통제에 참여해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9년 말에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0년 8월 1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장천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경성군 출신 인물]][[분류:1874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 == 여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장천석 == || 성명 ||<(> 장천석(張千石) || || 이명 ||<(> 장건오(張建五) || || 생몰 ||<(> [[1882년]] [[7월 2일]] ~ ? || || [[출생지]] ||<(> [[경기도]] [[여주시|여주군]] 주내면 단현리 || || 사망지 ||<(> 미상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장천석은 1882년 7월 2일 경기도 여주군 주내면 단현리에서 태어났다. 1908년 8월 13일, 가평경찰관주재소 순사보조원 하라 류타로(原龍太郞)는 강원도 원주 방면으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이걸 본 장천석은 이재현(李在賢)ㆍ지용봉(池用奉)과 함께 순사보조원을 처단하기로 했다. 이재현이 단현리에서 순사보조원이 가지고 있던 칼을 빼앗아 베려 하자, 하라는 부근의 연못으로 뛰어들어 물가로 오르려 했다. 그러자 이재현은 칼로 그의 앞 이마 부분을 베어 중상을 입혔고, 장천석과 지용봉은 주민들과 함께 연못 주위를 에워싸고 돌을 하라에게 던져 연못 속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1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자 이에 상고하여 1919년 12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장천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여주시 출신 인물]][[분류:1882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