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장용희(張龍熙) || || 본관 ||[[인동 장씨]] || || 생몰 ||[[1904년]] [[5월 1일]] ~ [[1928년]] [[7월 28일]][* 1928년 초 사망설도 있다.] || || [[출생지]] ||[[경상북도]] 인동군 읍내면 임수동[br](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 인근의 오태동·신동·구평동·황상동·인의동·양호동·구포동과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미상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장용희는 1904년 5월 1일 경상북도 인동군 읍내면(현 구미시) 임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상도 선산군 몽대면 성수동(현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에서 [[장진홍]], 김기용(金基用), 박관영(朴觀永), [[이내성]], [[황진박]] 등과 교유하면서 지금까지의 구국 방법에 한계점을 절실히 느끼고 다 같이 결사대원이 되어 직접 행동으로 옮길 것을 맹세했다. 이후 안동에서 매약상으로 일하다가 친척인 장진홍의 권유를 받아들여 경찰서, 은행 등 안동의 주요 기관 파괴를 추진했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충남대학교 교수 이성우의 논문 '창여(滄旅) 장진홍의 생애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에 따르면, 장용희는 거사를 벌이기 직전에 병사했다고 하는데, 반면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의하면, 장용희는 장진홍이 일본으로 망명간 후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28년 7월 28일에 자결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용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인동 장씨]][[분류:1904년 출생]][[분류:192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