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재직]][[분류:예체능 교수]][[분류:이왕직 아악부 출신]][[분류:영주시 출신 인물]][[분류:1916년 출생]][[분류:1991년 사망]][[분류:국악인]][[분류:직제학계 인동 장씨]] ||<-2> '''{{{#ffc700 {{{+1 장사훈}}}[br]金鍾熙}}}'''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국악학자 장사훈.jpg|width=100%]]}}} || || '''{{{#ffc700 호}}}''' ||운초(云初) || || '''{{{#ffc700 본관}}}''' ||[[직제학계 인동 장씨]] || || '''{{{#ffc700 국적}}}''' ||[[일제강점기|일본령 조선]][[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28]]→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8]] || || '''{{{#ffc700 직업}}}'''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1936년~1944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61년~198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객원 교수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1986년~1989년) '한국국악교육학회' 설립자 || || '''{{{#ffc700 출생}}}''' ||[[1916년]] [[11월 26일]](음력 8월 15일).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운문리|| || '''{{{#ffc700 사망}}}''' ||[[1991년]] [[9월 25일]]. [[충청북도]] [[청주시]] (향년 75세) || [clearfix]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 [[국악|한국 음악]]이 축소되고, 잊혀지던 [[일제강점기|시기]]에 [[국악]]을 이어가고 연구하던 국악학자. 한국국악교육학회의 설립자이자 [[이왕직 아악부]] 출신의 [[국악인]]. == 상세 == 호는 운초(云初). [[경상북도]] [[영주시]](당시에는 영주군) [[출생]]이다. [[1916년]] [[11월 26일]](음력 8월 15일) [[일제강점기|일본령 조선]]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운문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9살이 되던 해인 192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홀로 서울에 오게 되었으나 당시 장사훈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남들이 학교에 다닐 때에도 일을 하면서 학업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1년, 그 당시 공립으로 운영되던 [[서울청운초등학교|청운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당시 [[법관]]이나 [[변호사]]를 희망하였으나, 부족한 형편으로 인하여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당시 [[이왕직]]에서 운영하던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이왕직 아악부]]는 학비가 모두 면제되고 옷을 비롯한 여러 학용품과 도서(책)들도 줄 뿐더러 매달 품삯까지 나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왕직]] 예식과의 수석 전사로 있는 [[친구]]의 [[할아버지]] 또한 그에게 “네 재주가 아깝다.”며 꼭 [[이왕직 아악부]]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를 보라고 하였다. [* 그 당시 장사훈은 막상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며칠 동안 밤을 새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당시로서는 [[국악|조선 음악]]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을 뿐더러 돈이 돼지도 못하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들어가게 된 [[이왕직 아악부]]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게 된다. [[1931년]]. 마침내 장사훈은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에 제 4기생으로 입소하여 [[거문고]]를 전공 악기로 하여금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장사훈은 [[1936년]]부터 [[1944년]]까지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규일과 임기준으로부터 가곡·가사·시조를 배워 악보를 만들었는데, 후에 그 일부가 [[단행본]]으로 출간되게 되었다. 장사훈은 일찍이 조선과 고려, 신라 등의 고악보들을 수집,해독하고 관심있게 연구하였다. 그는 광복 3년전인 1942년에 '보허자논고(步虛子論攷)'라는 생애 첫 논문을 발표하였고, 광복 직후인 1945년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관을 역임하였다. 그 후로는 [[중앙방송|중앙방송국]] [[국악방송|국악프로]]담당을 맡고, 편집부[*구 합동통신사]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장사훈은 [[1954년]]부터 덕성여자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무과장 등의 보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1961∼1982년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1968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밖에 한국국악교육학회를 설립하여 [국악교육] 학술지를 출간하였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부설 동양음악연구소를 설치하여 '민족음악학'이라는 학술지를 발간하였다. 1982년부터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객원 교수로 있으면서 1986년∼1989년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였고, 1991년 청주대학교 운초민족음악자료관 관장으로 재직하였다.이후 1982년에 [[서울대학교]]를 정년 퇴임한 후, 명예교수의 자격으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으며 이후 1982년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으로 부임하면서 청주에도 우리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국악과가 생기게 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평생 국악이론의 체계화와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현대 국악관련 학문들의 주요 부분들을 마련하고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국악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장사훈은 이후 76세의 생일을 2달 앞둔 [[1991년]] [[9월 23일]], 초가을에 자신이 일하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