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張文休}}} [목차] == 개요 == [[발해]]의 [[장군]]. == 정보 == 발해의 장군들 중 유일하게 군사적인 군공이 알려진 [[장군]].[* 발해 장군들에 대해 남아 있는 발해의 기록 자체가 없다. 장문휴 개인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고 발해의 [[등주]] 공격 내용이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 발해 조정과 계약을 한 [[해적]]이거나 [[고구려]] [[귀족]]이라고 보는 시각, 고구려 해상 세력의 잔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희박하여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삼국유사]]에도 [[구삼국사]]의 기록을 인용해 해당 공격과 관련된 내용을 수록했다. >【『[[구삼국사|삼국사(三國史)]]』에서는, (중략)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침략하자,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라고 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559&cid=49616&categoryId=49616&expCategoryId=49616|《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말갈과 발해]]''' [[천문령 전투]]에서 무주군의 중랑장 색구를 참살했고[* [[박은식]]의 '''발해태조건국지'''에 이것이 나타나 있다.] 이후에는 [[무왕(발해)|무왕]]의 명을 받아 [[산둥 반도]]의 등주를 기습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다. 이후 등주에는 실업자가 넘치는 등 발해군의 기습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고 한다. 등주는 [[당나라|당]]에서 발해를 해로로 공격하는데 있어서 최적의 군항으로 이용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 시기 육로는 [[거란]], [[돌궐]] 등과 얽혀 있었기 때문에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후방을 치게 하고 바다를 통해 [[수도(행정구역)|수도]]를 직접 공격하는 과거 [[백제]] 공격과 같은 형태를 노릴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발해의 입장에서는 등주가 군사적 목표점으로서 의미 부여가 된다. 이 때 [[요동 반도]]에서 당군의 저지가 보이지 않고 [[산둥성]]과 [[하북성]]에 이르러서야 저지선이 형성되는 점, 요동 일대를 관할하는 발해의 직책이 보이는 점과 더불어 발해가 이미 이 시점에서 요동 일대를 차지했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남아있는 기록은 무왕이 장문휴로 하여금 등주를 공격하게 했고 그 결과 등주자사를 죽였다는 것으로 끝이므로 과정은 전혀 알 길이 없다.] 계속 바다를 통해 공격한다고 언급되는 이유는 등주가 산둥 반도의 발달된 상업항이고 발해가 굳이 육로로 당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요동]]은 물론이고 [[요서]] 일부까지 점령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도 [[만리장성]]과 [[황하]]를 넘는 등의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야 했다. [[분류:몰년 미상]][[분류:발해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