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장두관}}}[* 이명으로는 장두남(張斗南)이 있다.][br]張斗爟'''}}}}}}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장두관.jpg|width=100%]]}}} || ||<|2> '''출생''' ||[[1900년]] [[3월 1일]] || ||경상남도 진주군[br](現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리) || ||<|2> '''사망''' ||[[1958년]] [[10월 10일]] || ||[[경상남도]] [[진주시]] || || '''학력''' ||[[경상국립대학교|진주공립농업학교]]{{{-2 (졸업)}}}[br][[신흥무관학교]] {{{-2 (졸업)}}}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장두관은 1900년 3월 1일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해 6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군에 배속되었다. [[지청천]]의 <자유일기>에 따르면, 장두관은 1920년 [[홍범도]] 장군의 정일군의 소대장으로 배속되었고 '일구쓰크시 고려혁명군사관학교'에서 지청천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에 맞섰고, 1924년 군자금 모금차 국내에 들어와서 진주 금융조합에 근무하는 [[박춘성(독립운동가)|박춘성]]으로 하여금 조합돈을 군자금으로 제공하게 한 뒤 만주로 가져가다가 서울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0년 3월 에는 [[신간회]] 중앙위원 겸 진주지회 위원장으로 일했으며, [[8.15 해방]] 후에는 광복청년회에 가담하여 간부로 활동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에 입대해 장교로 복무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장두관은 국민방위군 제2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해 통영의 수비를 맡았고 1951년 1월 20일 통영극장에서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했다.[[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510120000027|#]] 지청천은 1952년 11월 26일 장두관의 넷째 딸의 결혼식의 주례를 선 뒤 <자유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00명 학생 중 병사 전서 등 희생자가 불소한 중 생존한 장대령은 시종 변절치 않고 사제로 의를 지키고 광복청년회 등 중요 간부로 있었고 금년 49세의 우수 분자인데 배경 관계로 장관(將官)급에 승진치 못하고 수년관 영관으로 노무사단장직에 복무 중인 인물이니라. 장두관은 6.25 전쟁 종결 후 1954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진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10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두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진주시 출신 인물]][[분류:1900년 출생]][[분류:195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경희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