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장경춘}}}'''[br]'''張景春'''}}}}}} || || '''이명''' ||장창식(張昌植), 장원식(張元植)|| || '''본관''' ||미상(未詳)|| ||<|2> '''출생''' ||[[1880년]] [[10월 8일]]|| ||[[충청북도]] [[음성]]|| || '''사망''' ||[[1923년]] [[5월 9일]]|| || '''묘소''' ||[[대전현충원]]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 생애와 주요 활동 == 충청북도 음성(陰城) 출신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인 장경춘(張景春/장창식張昌植/장원식張元植)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제천(堤川)의 의병장 정운경(鄭雲慶)의 의진에 가담하여 박달재 전투와 단양전투에 동참했다. 그 후 1907년 9월에는 괴산군(槐山郡) 죽산면(竹山面)의 백암(白岩) 시장에서 의병장 강한조(姜漢祚)와 만나 의병부대의 십장(什長)으로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이천(利川), 진천(鎭川), 음성(陰城)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이행하던 중 이교철(李敎喆)의 의병부대와 투숙하던 민가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힌 장경춘은 몇 달 뒤인 1907년 12월에 경기재판소에서 종신 유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의 1월, 재판 관청인 평리원(平理院)에서 15년의 유형으로 감형된 그는 서도(西島)에 유배되었다. 장경춘은 대략 2년 8개월간 지속되었던 유배생활의 끝에 1910년 해금되었으며 그 이후 만주(滿洲)의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해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휘하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장경춘에게는 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Popup.do?goTocode=0&mngNo=4459&kwd=%EC%9E%A5%EA%B2%BD%EC%B6%98|참고1:독립유공자 전자사료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8261|참고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sisaanseong.com/news/articleView.html?idxno=2804|참고3:시사안성기사]]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