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938년 출생]][[분류:1006년 사망]][[분류:카이펑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張去華 (938년 ~ 1006년) [[오대십국시대]] [[후주]], [[북송]]의 관료로 자는 신신(信臣). == 생애 == === 초기 생애 === 개봉부(開封府) 양읍현(襄邑縣) 출신으로 938년 장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학문을 좋아했고 글쓰기에 민첩했으며, 음서를 통해 태묘재랑(太廟齋郞)이 되었다. [[후주]]의 [[시영]]이 955년 [[남당]]을 정벌할 때 장거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이 그치지 않고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를 오랫동안 통치하는 방법이 아니로다. 장거화는 뒤에 《남정부(南征賦)》와 《치민론(治民論)》을 지어 시영에게 바쳤으며, 과거에 응시한 뒤 어사대주부(御史臺主簿)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장거화는 자신의 친구에게 >부령(簿領)의 직무는 장부가 하는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관직을 버리고 정주(鄭州)로 돌아가 3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 태조 재위기 === 960년 [[북송]]이 들어선 뒤 장거화는 자신의 시문을 가지고 개봉부를 유람하다가 이방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다음 해인 961년 진사 갑과에 급제하여 비서랑(秘書郞), 직사관(直史館)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연한이 다 되어도 승진하지 못하자 여기에 대해 상소를 올렸고 또한 [[장담(북송)|장담]], [[노다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사송(師頌)은 문학이 천박하니 그들과 자신의 우열을 비교하길 바란다고 상주하였다. 그리고 [[태조(송)|태조]]가 이들을 강무전(講武殿)에서 불러 책시를 치르게 했는데, 장담은 책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서 좌천되었고, 장거화는 우보궐(右補闕)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장거화가 승진을 조급하게 서두르는 모습 때문에 장거화를 업신여겼고 이로 인해 장거화는 16년 동안 승진하지 못했다. 장거화가 편전에서 태조와 응대할 때 태조가 장거화의 집안에 대해 물으니, 장거화는 아버지 장의가 권신들을 거역해서 좌천되었다고 대답했다. 당시 배석했던 [[설거정]] 또한 장거화를 대신해서 하소연하니 태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한(오대십국시대)|한나라]]는 도리에 어긋났고 간신들이 제멋대로 권력을 잡았는데, 이 모습은 짐이 직접 본 것이오. [[남평]]이 평정된 뒤 장거화는 도주통판(道州通判)으로 임명되었다. 장거화는 도주에서 조정으로 다음의 상주문을 보냈다. >계관(桂管)은 오령(五嶺)의 요충지로 지금은 [[유창(남한)|유창]]이 영지를 보전하고 완강히 수비하며 계관을 의지하여 적의 공격을 막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군이 먼저 유창의 성을 공격한다면 번우(番禺)로 가는 것이 무인지경에 발을 들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또한 장거화는 계주(桂州)를 공략할 수 있는 정황에 대해 상주하여 태조가 이에 대해 칭찬하였다. 장거화는 뒤에 지자주(知磁州), 지건주(知乾州)를 역임했고 익주통판(益州通判)으로 선임되었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 지봉상부(知鳳翔府)로 승진하였다. === 태종 재위기 === 979년, 장거화는 [[태종(송)|태종]]이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태종을 따르며 좌장고(左藏庫)를 감호하고 경동전운사(京東轉運使)로 임명되었다. 뒤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예부낭중(禮部郞中)을 역임하였다. 982년, 강남전운사(江南轉運使)로 임명되었다. 옹희(雍熙) 연간[* 984년~987년]에 태종이 유주(幽州)를 정벌할 때 장거화는 송주(宋州)의 군량을 거마하(拒馬河)로 운송하는 것을 감독하며 하북전운사(河北轉運使)로 임명되었다. 986년, 지섬주(知陝州)로 임명되다가 부임하기 전에 《대정요록(大政要錄)》 30편을 지어 바쳤으며, 태종은 장거화의 대정요록을 열람한 뒤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견사 50필을 하사하며 섬주로 보내지 않았다. 뒤에 허왕(許王) [[조원희(송)|조원희]]이 개봉부윤(開封府尹)을 맡으면서 장거화는 개봉부판관(開封府判官)으로 임명되고 전중시어사 진재(陳載)가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어 모두 금자(金紫)를 받았다. 태종은 장거화와 진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1백만 냥을 하사하였다. >경들은 모두 조정에서 품행이 단정한 선비들이라 특별히 짐이 선발했으니 마땅히 내 아들을 잘 보좌해주시오. 장거화는 뒤에 좌간의대부로 임명되었으며, 태종은 다시 추밀사(樞密使) 왕현(王顯)을 보내 장거화에게 조원희를 잘 보좌하라는 뜻을 전했다. 이런 가운데 여주(廬州)의 여승 도안(道安)이 제부[* 서현(徐鉉)의 처조카였다.]의 불성실함에 대해 호소했는데, 개봉부에서는 부인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형틀을 채워 여주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도안은 등문고(登聞鼓)를 치며 서현이 편지를 보내서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장거화가 고의로 죄를 다스리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여기에 태종이 분노하여 장거화는 죄를 받아 안주(安州) 사마(司馬)로 폄관되었다. 곧이어 장작소감(將作少監), 지흥원부(知興元府)로 제수되었다가 흥원부로 부임하기 직전 지진주(知晉州)로 전임되었으며, 비서소감(秘書少監), 지허주(知許州)로 옮겼다. === 진종 재위기 === 997년 [[진종(송)|진종]]이 즉위한 뒤, 장거화는 좌간의대부로 옮겼다가 얼마 안 있어 급사중(給事中), 지항주(知杭州)로 옮겼다. 당시 양절(兩浙)은 [[오월(오대십국시대)|오월]]에서 백성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했는데, 어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인두세가 면제되지 않았다. 장거화는 고인에게 부과된 인두세를 면제할 것을 건의했지만 관련 부서에서는 경비 의존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999년, 지소주(知蘇州)로 옮겼으나 곧이어 병으로 인해 서경분사(西京分司)를 청하였다. 장거화는 낙양에서 정원과 오두막을 가꾸고 중은정(中隱亭)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1004년,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전임되어 물러났고 1006년 사망했다. == 기타 == * [[상민중]]은 장거화의 사위였다. 이 때문에 비구니 도안의 사건에 장거화가 연루될 때 상민중은 장거화와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좌천되었다. * 장거화는 영도(營道)에서 아버지 장의의 동문생인 하씨(何氏)의 두 아들을 거두어 자신의 학문을 가르쳤다. 임기가 만료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수도로 가서 천거하고 숙식을 제공했으며, 모두 관리의 명부에 올랐다. * 장거화는 《원원론(元元論)》을 바치며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농사에 힘쓰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고 진종은 매우 원원론을 보고 매우 칭찬하여 합사로 짠 비단에 장거화의 원원론을 베껴 적게 했으며, 용도각(龍圖閣)의 벽에 내걸도록 명하였다. * 장거화는 용모가 아름다웠고 담론에 뛰어났으며, 너그럽고 절개를 숭상하였다. 하지만 겉치레를 꾸미지 않았고 청의(淸議)로부터 배척을 받아 중용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