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fff '''당나라의 재상[br]하동공숙후(河東恭肅侯)[br]{{{+1 張嘉貞 | 장가정}}}'''}}} || || '''{{{#fff 작호}}}''' ||<(> 하동군후(河東郡侯) || || '''{{{#fff 시호}}}''' ||<(> 공숙(恭肅) || || '''{{{#fff 성}}}''' ||<(> 장(張) || || '''{{{#fff 이름}}}''' ||<(> 가정(嘉貞) || || '''{{{#fff 자}}}''' ||<(> 가정(嘉貞) || || '''{{{#fff 부친}}}''' ||<(> 장사의(張思義) || || '''{{{#fff 출신}}}''' ||<(> 포주(蒲州) 의씨현(猗氏縣) || || '''{{{#fff 생몰}}}''' ||<(> 666년 ~ 729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인물로 자는 가정(嘉貞). == 생애 == 포주(蒲州) 의씨현(猗氏縣) 출신으로 성기현승(成紀縣丞)을 역임한 장사의의 아들로 666년에 태어났다. 장사정은 명경과 중에서 오경과에 급제하여 평향현위(平鄉縣尉)로 임명되었다가 어떤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702년에 시어사 장순헌(張循憲)이 하동 채방사로 있으면서 장거정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측천무후]]에게 장가정을 천거했고, 장가정은 측천무후와 회견하여 이때 감찰어사로 발탁되었으며 이후 병부원외랑, 중서사인, 양진2주 도독, 병주 장사를 역임하면서 엄숙한 정치를 펼쳤다. 717년, 돌궐의 9성이 당나라에 귀순하면서 태원 이북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장가정은 이곳에 군을 두어 관할하기를 주청하였고 현종은 장가정의 주청을 받아들여 천병군(天兵軍)을 설치하고 장가정을 천병군 대사로 삼았다. 장가정은 다음해인 718년에 입조했는데, 이때 장가정이 배반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이 보고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져서 보고를 올린 이를 처벌하려고 했지만 장가정은 이들을 용서하도록 주청하였고 현종은 장가정의 주청을 받아들였다. 720년, 송경과 소정이 파직된 뒤 장가정은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임명되었고 은청광록대부가 더해졌으며, 중서령으로 승진한다. 722년, 현종이 낙양으로 거둥할 때 낙양현(洛陽縣) 주부 왕균(王鈞)이 어사로 오르고자 장가정을 위한 저택을 지으면서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현종은 왕균을 장살하도록 명했는데, 장가정은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왕균을 빨리 처형하도록 재촉했고 어사대부 위항(韋抗)과 어사중승 위허심(韋虛心)에게 죄를 돌려 이들을 내쫓았다. 이후 비서감 강교(姜皎)가 죄를 얻자 장가정은 강교에게 장형을 내려야한다고 주청했고, 광주(廣州) 도독 배주선(裴伷先)이 투옥되자 이때도 배주선에게 장형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했지만, 장열은 여기에 반대했고 현종은 장열의 의견을 따랐다. 장가정은 이로 인해 장열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장열]]이 병부시랑으로 있을 때 장가정은 병부원외랑으로 있었고 이때는 장가정의 지위가 장열의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장가정이 재상으로 임명된 뒤에 장열을 뛰어넘으면서 조금도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장열은 여기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서로가 점점 불편한 관계가 되기 시작한다. 723년, 현종이 태원으로 거둥할 때 장가정의 아우인 장가우가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장열은 장가정이 소복을 입고 대죄해야 한다며 장가정을 공격했지만, 장가정은 현종을 알현하지 않아 유주(幽州) 자사로 좌천되고 장열이 대신 중서령이 되었다. 724년, 장가정은 유주에서 돌아와 호부상서 겸 익주 대도독부 장사가 되었다. 이때 현종이 중서성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장가정은 연회에서 장열에게 쌓였던 분노를 쏟아부었고 [[원건요]]와 [[왕준(당나라)|왕준]]이 장열과 장가정을 중재하였다. 한편 이때 현종이 [[폐후 왕씨(당현종)|황후 왕씨]]를 황후 자리에서 내쫓고 왕씨의 오빠인 왕수일을 사사시켰다. 다음 해인 725년, 장가정은 왕수일과 교유한 죄로 인해 대주(臺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노종원(盧從願)을 대신하여 공부상서, 정주(定州) 자사가 되었고 북평군(北平軍)의 사무를 맡았으며, 하동후(河東侯)에 봉해졌다. 729년, 장가정은 병으로 인해 낙양에서 요양했지만 뒤에 눈이 나빠져서 실명하게 되었다. 현종은 어의를 보내 장가정을 치료했지만 장가정은 결국 사망하여 익주(益州) 대도독으로 추증되었고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평가 == >장가정은 결단이 민첩하고 상주에 뛰어났지만 조급하고 고집이 센 성품으로 인해 자못 시론으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 >비록 논과 밭을 세우지 않았지만 어찌 권세와 이익에 급하여 붕당을 만들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를 두둔하며 강교(姜皎)와 배주선(裴伷先)에게 장형을 내려 공정한 선비가 아니게 되었는가. >---- >명예를 추구하였다. >---- >『[[구당서]]』 == 참고자료 == * 『[[구당서]]』 * 『[[신당서]]』 * 『[[자치통감]]』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66년 출생]][[분류:729년 사망]][[분류:윈청시 출신 인물]]